[강일용의 CEO열전] ⑦ 세계 최대 생산업체 '폭스콘' 일궈낸 궈타이밍 회장... 대만의 트럼프로 불리기도
2019-06-29 09:33
궈타이밍 훙하이정밀 전 회장
반 세기 각고의 노력으로 오늘날 폭스콘 일궈내... 대만 최고 부호에도 등극
지속적인 혐한 발언으로 구설수, '타도 삼성전자' 목표로 사업 분야 확대
회사 경영 그만두고 대만 총통 선거에 나서, 유력 당선 후보 가운데 한 명
반 세기 각고의 노력으로 오늘날 폭스콘 일궈내... 대만 최고 부호에도 등극
지속적인 혐한 발언으로 구설수, '타도 삼성전자' 목표로 사업 분야 확대
회사 경영 그만두고 대만 총통 선거에 나서, 유력 당선 후보 가운데 한 명
내년 열리는 대만 총통선거에 출마하기 위해 궈타이밍(郭台銘·69) 대만 훙하이(鴻海)그룹 회장이 지난 21일(현지시각) 회장직에서 공식 사임했다. 훙하이그룹은 애플 아이폰, 소니 플레이스테이션, HP와 델 노트북, 아마존 킨들 등 전 세계 수 많은 전자 기기를 위탁생산하는 세계 최대의 생산대행업체(Contract Manufacturing) '폭스콘(Foxconn)'의 모회사다.
궈타이밍은 1974년 24세 젊은 나이로 훙하이그룹을 창업해, 회사를 세계 최대 반도체 파운드리 업체인 TSMC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대만 최대 기업으로 키운 인물이다. 그 자신이 대만 최고의 부자이기도 하다. 그는 자신의 봉급을 1대만달러만 받고 있으며, 폭스콘의 모든 임원의 연봉을 자신의 배당금에서 지급하고 있다.
◆세 번의 기회로 지금의 폭스콘 만든 풍운아
뉴욕타임스에 따르면, 전 세계에서 유통되는 가전의 40%가 폭스콘에서 생산되어 유통되고 있다. 페가트론, 위스트론, 콴타 등 대만 내에 많은 생산대행업체가 존재하지만, 폭스콘의 상대가 되진 못한다. 폭스콘은 대만, 홍콩, 영국 등 전 세계 3군데에 동시 상장되어 있고, 중국, 브라질, 인도, 말레이시아, 멕시코, 헝가리 등 전 세계 10여개국에 30여개의 공장을 두고 전 세계인들에게 전자제품을 공급하고 있다. 100만명이 넘는 노동자를 직원으로 채용하는 등 미국 월마트와 중국 페트로차이나에 이어 전 세계에서 세 번째로 많은 사람을 직원으로 두고 있다.
궈타이밍은 1950년 대만 타이베이에서 태어났다. 중국 산시성 출신인 아버지와 산둥성 출신인 어머니를 둔 외성인(중국 본토에 뿌리를 둔 대만인)이다. 중국해사상업전문대학(현 타이베이해양과기대학)을 졸업한 후 고무 공장에서 타이어를 만들며 공장 비즈니스에 대한 감각을 쌓았다. 이 경험을 토대로 자신만의 회사 창업에 나섰다. 자본금은 어머니가 준 10만대만달러를 포함한 40만대만달러에 불과했다. 직원은 총 10명으로, 그의 남동생인 궈타이창과 궈타이청도 형의 사업에 함께 했다.
궈타이밍이 처음 선택한 사업은 플라스틱 제조업이었다. 텔레비전에 쓰이는 플라스틱 부품을 제작해 다른 전자 회사에 납품하는 사업 모델을 구축했다.
이렇게 플라스틱을 생산하던 궈타이밍은 세 번의 기회를 통해 폭스콘을 오늘날 전 세계 최대의 생산 기업으로 성장시킬 수 있었다. 첫 번째 기회는 1980년 미국의 게임기 생산업체 아타리로부터 비디오게임기 '아타리 2600'의 게임 콘트롤러와 게임기와 TV를 연결하는 커넥터 생산을 주문받으면서 시작됐다. 해외 업체의 제품 생산을 수주받으면서 폭스콘은 대만 국내에서만 비즈니스를 지속하던 기업에서 글로벌 생산 기업으로 거듭났다.
아타리는 1980년 비디오 게임의 1차 호황을 맞아 아타리 2600의 생산을 대폭 확대했고, 안정적인 공급을 위해 미국 내 공장 대신 해외 제조업체에서 기기를 생산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이 기회를 궈타이밍이 움켜쥐었다. 비록 아타리와 아타리 2600은 4년 뒤 공급과다(이른바 아타리 쇼크)로 망했지만, 폭스콘이라는 유산을 남겼다. 지금도 폭스콘은 전 세계 비디오게임기의 90%를 생산하고 있다.
최초의 해외 거래선이었던 아타리가 파산하자 궈타이밍은 혈혈단신으로 미국으로 떠나 새로운 거래처를 찾아다녔다. 11개월 동안 미국의 IT 기업을 드나들며 자사에 생산을 맡기라고 권유했다. 문전박대뿐만 아니라 산업스파이로 몰리기도 했지만, 그는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이러한 노력 끝에 미국의 여러 IT 기업으로부터 생산 계약을 수주해 위기를 극복했다.
두 번째 기회는 1988년 추진한 중국 본토 진출이다. 중국에 공장을 설립해 폭스콘의 제품 생산량은 급격히 늘어났고, 굴지의 생산대행업체로 성장할 수 있었다. 1980년 후반 중국은 공산주의 경제 시스템을 버리고 자본주의를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바로 서방 자본주의와 기업을 받아들일 수는 없었다. 덕분에 대만 기업들에게 중국 본토의 문호가 열렸다. 개성공단 사례에 비유할 수 있다.
하지만 대만 기업들은 이러한 중국 정부의 제안에 선뜻 응하지 못했다. 당시에도 그렇고, 지금도 적대적인 사이인 중국에 적극적인 투자를 할 수 없었던 것이다.
궈타이밍은 다른 대만 기업과 달리 승부수를 던졌다. 원가절감과 생산관리가 주가 되는 생산대행사업을 지속하려면 많은 인력과 저렴한 인건비가 필수였다. 중국 본토가 최적이었다. 국제 정세라는 위험 때문에 포기하기에는 너무나도 매력적인 조건이었다.
궈타이밍은 1988년 중국 광둥성 선전에 폭스콘의 전자 공장을 지었다. 단순 공장이 아니라, 공장에서 일하는 모든 종업원을 수용할 수 있는 기숙사, 진료소, 양계장 등도 함께 지었다.
이러한 투자를 통해 중국 정부의 우호적인 지원도 이끌어낼 수 있었다. 폭스콘의 공장이 들어선 이후 선전에는 다른 전자 기업들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공장뿐만 아니라 본사도 함께 들어섰다. 현재 선전은 실리콘밸리에 이어 전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큰 첨단 산업 단지로 평가받고 있다. 공장을 설립한다는 궈타이밍의 결단이 이러한 선전의 발전에 한몫했다.
현재 폭스콘은 중국 8개 도시에서 15개가 넘는 공장을 운영하고 있다. 선전 롱후아 지역에 있는 폭스콘의 핵심 생산 공장에는 30만명이 넘는 근로자가 일하고 있다. 근로자의 4분의 1은 기숙사에서 생활을 하고 있고, 나머지 직원은 근처 지역에서 통근 생활을 하고 있다. 공장은 기숙사는 물론 자체 소방대, TV 방송국, 식당, 은행, 서점까지 갖추고 있다. 공장이 아니라 하나의 작은 도시를 방불케 할 정도다.
세 번째 기회는 1996년 미국의 PC 제조업체 컴팩의 제품과 케이스를 생산한다는 계약을 따내면서 찾아왔다. 궈타이밍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해 폭스콘의 생산 및 품질 관리 시스템을 강력하게 통제했다. 이를 통해 폭스콘은 단순 전자 제품을 만드는 업체에서 벗어나 당시 IT 기술의 총아였던 PC와 노트북을 안정적으로 생산할 수 있는 업체로 거듭났다.
컴팩의 사례를 지켜본 델의 창업자 마이클 델은 케이스뿐만 아니라 미국 공장에서 생산하던 PC와 노트북 제품 자체를 모두 폭스콘의 공장에서 생산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이러한 델의 결정을 본 다른 PC 기업도 하나둘씩 자사 제품 생산을 폭스콘에 맡기기 시작했다.
결정타는 애플의 참여다. 원래 애플과 스티브 잡스는 자사 제품(아이맥)의 생산을 LG전자에게 위탁하고 있었다. 강력한 독자 브랜드를 갖춘 지금은 상상하기 힘들지만, 과거에는 한국 기업도 생산대행을 했다. 2000년대에 들어 제품 생산 관리 및 QA가 엄격하기로 유명한 애플과 스티브 잡스조차 폭스콘을 인정하고 자사 제품 생산을 폭스콘에 맡기기 시작했다.
현재 애플은 폭스콘의 최대 고객이다. 연 1억대에 넘는 아이폰 생산량의 대부분을 폭스콘이 감당하고 있다. 폭스콘은 늘어나는 생산을 감당하기 위해 애플 제품 생산 라인을 위한 추가 직원을 고용하기도 했다.
이러한 폭스콘과 IT 기업의 협업을 통해 제품 설계는 IT 기업이 하고, 생산은 폭스콘이 하는 현재 IT 제품 제조 시스템이 완성됐다.
◆'전 세계 공장'의 어두운 그림자, 노동착취
생산대행업체가 많은 수익을 내려면 필연적으로 저렴한 인건비와 오랜 노동 시간이 수반된다. 궈타이밍과 폭스콘도 이 문제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사실 전 세계에서 가장 대표적인 노동착취 사례로 꼽힌다.
2010년 폭스콘에서 일하던 노동자 18명이 자살을 기도해, 이 가운데 14명이 사망하면서 폭스콘의 열악한 근로조건이 세상에 알려졌다. 상당수의 근로자가 하루 12시간씩 주 6일을 근무한다는 사실이 전 직원들을 통해 폭로됐다. 미 언론들이 앞다투어 이 사실을 보도했고, 폭스콘과 폭스콘에 제품 생산을 맡긴 미국 IT 기업들은 연일 소비자들의 비판을 받았다. 특히 이러한 근로자들의 초과근무를 부른 당사자인 애플에게 비판이 집중됐다.
애플은 궈타이밍과 폭스콘에 근무조건 개선을 요구했다. 궈타이밍은 영국 산업혁명 시대를 연상시킬 정도로 긴 노동 시간을 개선하기 위해 추가 인력을 채용하기로 결정했다. 기존 직원들의 고민을 해결하기 위해 24시간 운영되는 직원고민상담센터도 운영하기 시작했고, 노동자들의 봉급도 단계적으로 인상해 최종적으로 2배 가까이 늘리기로 결정했다.
노력이 결실을 거둬 폭스콘에서 일하던 노동자의 자살은 2011년 4명, 2012년 1명, 2013년 2명, 2016년 1명 등 꾸준히 줄어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폭스콘은 직원들의 자살을 막는다는 명분으로 이해할 수 없는 정책을 내놔 구설수에 올랐다. 대부분의 자살자가 기숙사에서 투신했다는 명분을 내세워 기숙사의 창문을 여는데 30초가 넘는 시간이 걸리도록 공사를 진행했다. 자살을 막는데 효과적인지 하나도 검증되지 않은 이 정책은 지금도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
궈타이밍 본인의 발언이 논쟁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직원들의 자살이 이어지자 "폭스콘은 전 세계적으로 100만명이 넘는 인력을 관리하고 있다. 인간도 동물인 만큼 100만의 동물을 관리하려면 여간 골치 아픈 게 아니다"는 발언을 했다. 이 발언 이후 궈타이밍은 사람과 달리 골치를 썩이지 않는 기계를 적극 도입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1대 당 2만5000달러의 로봇 1만대(이른바 '폭스봇')를 도입해 제품을 생산하려 했으나, 제조사들이 원하는 품질 기준을 만족시키지 못해 아직은 모든 생산 공정에 도입하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여러 로봇 기업과 협력해 인도네시아에 로봇 전용 생산 공장을 설립하는 등 공장의 기계화에 공을 들였다.
◆지속적인 혐한 발언으로 구설수... 목표는 삼성전자?
"부끄러운 제품 갤럭시를 사지 마라. 아이폰을 구입해라."
"한국인과 달리, 일본인은 뒤통수를 치지는 않는다."
"일본 기업과 손잡고 5년 내로 삼성전자를 꺾겠다."
일본이나 대만 인터넷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혐한(嫌韓) 발언이 아니다. 궈타이밍이 2012년 이후 공식 석상에서 거침없이 내뱉은 발언이다. 그는 평소에도 한국인을 ‘가오리방쯔(한국인에게는 매가 약이다는 뜻이 담긴 멸칭)’라고 비하하고, 삼성전자를 '고자질쟁이'로 표현했다. "배신자 삼성전자를 무너뜨리는 게 내 인생의 목표다"고 할 정도로 그의 혐한 감정은 유명하다.
대체 어쩌다 그는 이렇게 극렬한 혐한 인사가 된 것일까. 삼성전자와 분쟁이 혐한 감정으로 이어졌다는 분석이다.
삼성전자는 2010년 폭스콘의 LCD 생산 계열사인 치메이(Chimei)와 LG디스플레이 등 6개사를 유럽연합에 가격 담합 혐의로 고발했다. 때문에 궈타이밍과 폭스콘은 유럽연합으로부터 담합에 따른 과징금 3억유로를 내야만 했다. 담합의 당사자 중 하나였던 삼성전자는 자진신고에 따른 혜택으로 과징금을 전액 면제받았다. 이 사건 이후 궈타이밍은 삼성전자를 "경쟁사의 등에 칼을 꽂는 소인배"라고 비난하며 본격적인 혐한 발언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폭스콘이 삼성전자 갤럭시의 경쟁 제품인 애플 아이폰을 생산하는 곳이라는 점도 궈타이밍의 이러한 혐한 발언에 한몫 거들었다.
사실 궈타이밍의 혐한 발언은 그가 진짜 한국을 혐오해서 하는 발언이라기보다는 한국의 대표기업인 삼성전자가 폭스콘의 미래에 가장 큰 걸림돌이라는 것에서 나오는 계산된 발언으로 보는 것이 옳다.
궈타이밍의 목표는 폭스콘이 생산대행에서 벗어나 독자 브랜드로 사업을 진행하는 것에 있다. 이를 위해 새 브랜드 대신 샤프, 노키아 등 강력한 영향력을 보유하고 있었지만 경영상 문제로 매물로 나온 기존 브랜드를 인수하는데 집중했다. 폭스콘의 사업 구조를 반도체, 모바일, 디스플레이 등 (삼성전자와 완전히 겹치는) 세 가지로 재편하고 관련 사업을 강화했다.
궈타이밍은 경영 위기로 나온 샤프를 7000억엔에 인수한 후 7000여명을 해고하는 등 강도높은 구조 조정에 나서 샤프를 정상화시켰다. 자회사인 치메이와 샤프를 함께 활용해 전 세계 디스플레이 시장에서 삼성전자와 LG전자의 자리를 위협하고 있다. 이어 핀란드의 신생회사 HMD글로벌과 함께 마이크로소프트로부터 노키아 스마트폰 브랜드에 관한 권리를 사들여, 독자 스마트폰 생산에 뛰어들었다. 일본 도시바 반도체 사업부 인수전에도 뛰어들었으나, SK하이닉스 등으로 구성된 한·미·일 연합에 밀려 고배를 마셔야만 했다. 이후 폭스콘 사내에 독자적인 반도체 사업부를 신설하는 등 관련 사업 진출에 강한 의지를 드러냈다. 폭스콘의 차기 회장으로 반도체 사업을 진두지휘해 온 류양웨이 총괄을 낙점한 점도 궈타이밍이 반도체 사업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증거다.
◆유력 대만 총통후보... '대만의 트럼프'라고 불리기도
궈타이밍은 이제 기업가로서의 행보를 그만두고 정치인으로서 새 도전에 나선다. 지난 4월 "내년 대만 대선을 위한 국민당 총통 후보 경선에 출마하겠다"고 정계 진출을 공식적으로 알렸다. 궈타이밍은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과 유사한 행보를 보이고 있다는 평가다. 기업가 출신 갑부 정치인이라는 특징 외에도 공격적인 언사와 저돌적인 사업 추진력 등이 닮았다.
궈타이밍 본인도 이를 부인하지 않고 오히려 하나의 '슬로건'으로 내세우고 있다. 정계 진출을 선언한 날 궈타이밍은 대만 국기가 그려진 파란색 모자를 쓰고 나왔다. 성조기가 새겨진 모자를 자주 쓰는 트럼프 대통령을 벤치마킹한 행보다. 이후 미 백악관을 방문해 트럼프 대통령을 만나기도 했다. 그 자리에서 폭스콘의 미국 투자 계획과 자신의 대만 총통 출마 계획 등을 논의한 것으로 알려졌다. 면담 이후 궈타이밍은 자신의 페이스북에 '대만을 다시 위대하게'라는 글을 올렸다. 트럼프 대통령의 핵심 공약인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를 그대로 활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