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민교의 페널티] 하다못해 동성간 바지도 벗겨…‘주홍글씨’ 못 뗀 쇼트트랙

2019-06-26 15:45


또 쇼트트랙이다. 트랙을 돌 듯 반복된 추문이 끊이지 않는다. 최근 10여 년간 온갖 추행을 일으킨 쇼트트랙 국가대표팀은 어느새 올림픽 ‘효자 종목’이 아니라 한국 체육계의 ‘골칫거리’로 전락했다.  
 

[2018 평창 동계올림픽 쇼트트랙 남자 500m에서 은·동메달을 따낸 황대헌(왼쪽)과 임효준. 사진=연합뉴스 제공 ]


최근 수년간 논란이 된 쇼트트랙 파문은 열거조차 힘들 지경이다. 한바탕 파벌 싸움으로 안현수가 조국을 등지고 러시아로 귀화했고, 국가대표 선발 과정에서는 ‘짬짜미’가 적발돼 홍역을 치렀다. 또 조재범 전 국가대표 코치는 여고생 시절부터 심석희를 상습 성폭행한 사실이 드러나 사회적 충격을 안겼다. 최근에는 ‘성폭행 파문’으로 체육계가 발칵 뒤집힌 직후에도 김건우가 선수촌 내 여자선수 숙소를 무단출입하다 적발됐다.

이번엔 동성간 성희롱 사건이다. 종목은 또 쇼트트랙 국가대표팀이고, 장소는 다시 충북 진천선수촌이다. 쇼트트랙 남자대표팀의 쌍두마차 임효준과 황대헌 사이에서 벌어진 사건이라 더 충격이다. 둘은 한국체대 선후배 사이다.

25일 대한체육회에 따르면 임효준은 17일 선수촌에서 진행된 산악 훈련 도중 황대헌의 바지를 벗겼다. 여자 선수들과 함께 훈련하던 상황에서 심한 모멸감을 느낀 황대헌은 이 사실을 감독에게 알렸고, 감독은 대한빙상경기연맹에 보고했다. 이후 신치용 선수촌장은 쇼트트랙 대표팀의 기강 해이가 심각한 수준이라며 남자 8명, 여자 8명 등 대표팀 선수 16명 전원을 한 달간 선수촌에서 퇴출시켰다.

사건이 일파만파 커지자 임효준의 매니지먼트사인 브리온컴퍼니는 “훈련 중에 일어난 일이 아닌 휴식시간에 벌어진 상황이었다”며 “임효준의 친근함에서 비롯된 장난 도중 암벽에 올라가는 황대헌을 끌어내리려다 바지가 내려가 엉덩이 절반이 노출됐고, 성기 노출은 되지 않았다”고 해명했다. 이어 임효준이 황대헌에게 메시지와 유선을 통해 사과를 시도했다고 전했다.

임효준 측의 적극적인 항변에도 논란은 식지 않고 있다. 이번 사건은 성추행이다. 가해자의 의도나 피해자의 노출 정도가 논점이 아니다. 황대헌은 이 사건으로 극심한 모멸감을 호소하며 정상적인 생활이 힘들 정도로 고통을 겪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황대헌의 매니지먼트사인 브라보앤뉴는 “수면제를 복용하고 잠을 청해야 할 정도로 심리적으로 불안한 상태”라고 전했다.

쇼트트랙에 새겨진 ‘주홍글씨’도 논란을 더 부추겼다. 온갖 병폐의 온상으로 치부됐던 쇼트트랙계의 개선 의지를 찾아볼 수 없어서다. 구속 수감 중인 조재범 전 코치의 성폭행 파문으로 성(性) 민감성이 극도로 높아진 상황에서 이 같은 사건이 또 일어난 것은 심각한 문제다. 잘못된 관행의 연장선에서 단순히 장난스러운 ‘철없는 행동’으로 넘길 수 없는 이유다.

대한체육회와 신치용 선수촌장의 16명 전원 퇴촌 결정도 납득하기 힘들다. 기강 해이를 이유로 들었지만, 가해자와 피해자가 명확히 있는 상황에서 연대책임을 물은 판단의 근거가 미심쩍다. 임효준의 징계 여부도 나오지 않은 상황에서 간판선수를 감싸듯 어물쩍 넘기려는 모양새다. 최근 김건우의 여자숙소 무단출입 사건 당시에도 ‘출전정지 1개월’ 징계 처분을 내렸으나 사실상 김건우의 국가대표 선발전 출전 자격은 그대로 유지돼 징계 자체가 큰 의미가 없었다.

대한체육회도 문화체육관광부 스포츠혁신위원회의 권고를 적극 수용하겠다는 의지를 보이던 터라 책임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대한체육회는 올해 초 국가대표 선수에 대한 성폭력 의혹 사건으로 촉발된 체육계의 고질적인 인권 침해 문제와 관련해 다양한 대책을 마련하고 추진 중에 있다면서 중대한 성추행에 대한 징계 기준 강화 등 가해자에 대한 처벌을 강화하겠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쇼트트랙 국가대표 선수들은 입촌 이후 인권교육을 단 한 차례만 받았다는 이야기도 들린다.

관리단체로 지정된 대한빙상경기연맹에 대한 신뢰도도 바닥이다. 빙상계에서는, 가해 선수의 처벌은 다음 달 징계 심의 결과를 보지 않고도 예측 가능한 ‘가벼운’ 수위일 것이라는 지적부터 나오고 있으니 한심하다. 성적 지상주의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엘리트 스포츠의 시스템 속에서 체육계 체질 개선은 여전히 제자리걸음만 하고 있다. 바지를 내린 순간 또 다시 국민들 앞에 벌거벗겨진 쇼트트랙의 변함없는 현주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