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재우의 프리즘] 북중미 외교코드를 읽는 '등뒤의 숨은 그림자'

2019-05-03 05:00
그들의 거울을 보면 그들의 마음이 보인다

 

[주재우 교수 ]



지난 4월 11일 한·미정상회담이 워싱턴에서 있었다. 하노이 회담이 결렬된 후 처음 이루어진 한·미 정상 간의 만남이었기에 향후 미국의 북핵문제 해결을 위한 우리 정부의 중재안에 대해 미국이 타협적으로 나올지 국민들은 나름 기대에 찼었다. 그러나 미국 측은 함구했다. 아니 기존의 미국 입장, 즉 ‘빅딜’을 양보할 수 없고 북한의 거절 시 추가적인 대북 압박 가능성을 시사했다. 회담 후 우리 정부가 미국 첨단군사무기를 대량 구매키로 했다는 결정도 후문으로 들려왔다.

이 와중에 북한의 대미, 대남 독설은 그치지 않았다. 중국은 꿀 먹은 벙어리같이 침묵하고 있다. 김정은 위원장은 지난 25일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첫 정상회담을 가졌다. 회담에서 푸틴은 북핵 해결을 위한 6자회담 재개의 적합성을 강조했다. 미국이 생각조차 하지도 않는 6자회담이 논의된 것은 북·러회담이 그야말로 앙꼬 빠진 찐빵인 셈을 방증한다.

이 모든 상황은 4월 27일 ‘판문점선언’ 1주년 기념 대통령 연설문에서 ‘난관’이라는 한마디로 정리됐다. ‘난관 앞에서 숨 고르고 길을 찾겠다’는 게 우리 정부의 태세다. 북한 비핵화 의사의 진정성에 맹신하며 ‘한반도의 봄’을 작년 봄부터 기다려온 우리 정부가 1년 만에 자기 성찰할 시간을 갖겠다고 선언했다. 진정한 성찰을 통해 잘못된 원인을 제대로 알아내는 것이야말로 더 큰 미래와 더 큰 평화를 위해 덧없이 가치 있는 경험이 될 것이다.

이런 성찰의 시간이 효과적인 반면교사가 되려면 북·미·중의 지도자들 속셈을 제대로 파악해야 한다. 이들을 만났다고 이를 알 수 있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학습과 공부가 수반되어야 한다. 이들의 정치 이념과 가치관이 어떻게 형성되었는지 그 연유를 알아야 한다. 지도자의 인식, 이념과 가치관은 여러 경로와 경험을 통해 형성된다. 대부분은 연관이 있거나 존경하는 정치인들이나 가족들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

우선 트럼프 대통령은 로널드 레이건 전 대통령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2016년 대통령 유세에서 트럼프 대통령의 정치 슬로건만 봐도 알 수 있는 부분이다. 그의 ‘미국 우선주의(America First)’와 ‘위대한 미국 다시 만들기(Make America Great Again, MAGA)’ 구호는 본래 레이건의 것이었다. 트럼프가 이에 매료되어 다시 활용하는 연유는 무엇일까. 아마도 미국의 정황적, 시대적 공감대가 작동한 것 같다.

70년대 말과 2016년도의 미국의 상황이 유사하다고 트럼프는 느꼈을 것이다. 비즈니스를 막 시작하면서 80년대에 트럼프 제국을 건설한 그는 공화당의 지지자였기에 자연스럽게 레이건의 정치 후원자였고 친분도 쌓았다. 당시 미국 경제는 상당한 고충을 겪고 있었다. 일본과 중국과의 무역에서 만성적자를 면하지 못하고 있었다. 소련과의 패권경쟁에서는 적극적인 군비경쟁을 통해 경제적 타격을 입힌 후 군비감축협상을 통해 소련의 굴복을 얻어내는 이른바 ‘힘을 통한 평화’ 전략을 구사했다. 결과적으로 그의 압박전술은 통했다. 일본과는 1985년 ‘플라자합의’와 1987년 소련과 ‘중거리핵전략조약(INF)’을 이끌어 냈다.

중국문제에 있어 그의 입장은 레이건과 매우 흡사했다. 레이건과 같이 그는 대만과의 관계를 더 격상시키려는 구상을 항상 가지고 있었다. 이런 그의 염원이 대통령 당선 직후 하나의 해프닝으로 돌출되었다. 2016년 11월 대만총통에게 전화한 ‘사건’이었다. 그는 기자들에게 중국 대통령에게 전화한다는 것이 그만 실수였다고 얼버무렸다. 미국 여론의 반응은 그의 ‘무지’에서 비롯된 해프닝이라고 비웃었다. 그러나 결과는 그의 뜻대로 되었다. 레이건이 중국과 1982년 8월 27일 이른바 '상해공동성명서'를 이끌어 내면서 미 국내법에 불과했던 1979년의 '대만관계법'을 중국이 인정하는 결과를 이끌어 냈다. 트럼프는 작년 3월 '대만여행법'에 서명하면서 대만과 미국의 고위급 상호방문과 접촉을 합법화시켰다.

시진핑은 중국공산당 혁명 1세대 출신이자 중앙위원이었던 시중쉰의 아들이다. 시중쉰은 마오쩌둥, 저우언라이와 덩샤오핑 등과 함께 중국공산혁명의 승리를 이끌었던 주역 중 한명이다. 이후 중앙위원과 상무위원을 거치면서 중국의 개혁개방에도 공을 세웠다. 대외적으로 그의 절친은 김일성이었다. 그래서 그의 북한에 대한 감정은 깊었다. 시중쉰은 문화대혁명 때 숙청되었다 덩샤오핑이 정권을 장악한 후 1980년에 복권한다. 그는 1984년 김일성의 방중 때 재회하면서 모든 일정을 함께했다. 이때 김일성은 시중쉰이 문화대혁명 때 겪은 고초를 듣고 싶어했다. 세 번의 끈질긴 설득 끝에 시중쉰의 토로를 이끌어 냈다. 둘 사이의 긴밀한 친분을 방증하는 사례다. 시진핑이 남다른 대북관을 가질 수밖에 없는 설득력 있는 대목이다.

이처럼 시진핑의 북한관계도 선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태자당 출신으로 공산당 이념에도 투철한 시진핑에게 선대와의 유대관계까지 더해져서 그의 북한에 대한 기본인식은 상당히 우호적이다 못해 친북이다. 공산당의 후계자로 지명된 후 2008년 그의 첫 공식 해외방문국은 북한이었다. 그의 대북관계의 인식은 그의 역대 연설문에서 입증된다.

2008년 그의 김일성 생가 만수대 방문기념 서한은 역대 중국지도자의 것 중 최장의 것이었다. 한국전쟁 참전 65주년 기념 연설에서 그는 중국군의 참전을 정의로운 전쟁을 위한 정당한 조치로 정의했다. 비록 그가 중국 정권을 장악한 후 작년에서야 북·중정상회담이 이뤄진 사실이 의아스럽지만 북·중 양국에게는 흔히 있는 일이라 지극히 정상적인 일인지도 모른다.

김정은 역시 선대의 외교 행보를 따라하는 것으로 보인다. 특히 언론들은 그의 해외방문의 동선과 입는 옷, 헤어스타일 등을 선대와 비교하는 데 집중보도했다. 여기서 간과되는 사실이 하나 있다. 김정은의 최근 광폭 외교가 김정일이 1999~2002년까지 취한 것과 유사성이 강하다면 이후 결과에 대한 비교도 가능하다. 2002년 고이즈미 일본 총리의 방북을 끝으로 광폭외교도 종결됐다. 그러면서 북한도 경제발전에 집중한다고 큰소리치고 '7·1 경제개혁'을 단행했다. 김정일은 그러나 핵개발을 끝내 포기 못하고 그 해 10월 2차 핵위기사태를 초래했다.

우리 외교 전열의 재정비를 위한 숨고르기가 호흡을 가다듬자는 의미가 돼서는 안 된다. 눈과 두뇌, 손과 발을 모두 움직여야 한다. ‘지피지기’의 시간을 가져야 한다. ‘지피지기’를 위해서는 공부와 학습이 반드시 필요하다. 자신의 시간적 여유의 부족은 유능한 참모의 지혜로 충당해야 한다.

 

푸틴 대통령에게 '동전' 건네는 북한 김정은 (서울=연합뉴스) 조선중앙TV가 28일 오후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방러 전 과정을 담은 50분 분량의 기록영화를 방영했다. 사진은 김 위원장이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요청으로 테이블 위의 동전을 건네는 모습. 푸틴 대통령은 이어 김 위원장에게도 동전을 건네면서 "우리 풍습에 따라서 칼을 들 때는 악의를 품지 않았다는 의미에서 (상대방에게) 돈을 주게 돼 있다"라고 러시아의 관습을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