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철스님의 ‘가로세로’] ​삶 자체가 이야기 보따리로 가득찬 화가를 찾아가다

2019-04-27 07:00

 

 

[원철 스님, 출처: media Buddha.net ]


같은 사무실에서 근무하고 있는 일감(日鑑)스님 방에 한국 수묵화의 대가인 김호석 화백(1957~)이 들렀다. 혼자 오는 경우는 별로 없고 늘 각계각층의 다양한 인물들과 함께 무리지어 나타나곤 한다. 비좁은 자리지만 억지로 밀고 들어가 합석하여 이런저런 이야기를 귀동냥으로 듣는 재미가 쏠쏠하다. 화엄경에서 말하는 “청하지 않아도 가야할 자리라면 알아서 간다”는 불청지우(不請之友)를 자청하는 것은 야사(野史)를 들을 수 있는 좋은 기회이기 때문이다.

요즘 제주도에서 전시회를 하고 있단다. 법전(法傳 1926~2014 조계종 11대 12대 종정) 스님을 모델로 한 수묵화도 출품했다고 한다. 줄곧 애용하던 먹이 아니라 목탄을 사용하여 수묵화 형식을 빌려 그린 작품이라고 운을 뗀 후, 목탄 수묵화를 사진영상으로 보여주었다. 40대 시절의 앞모습 한 점과 60대 무렵의 뒷모습 두 점이다. 서있는 앞모습은 여백부분에 덧댄 검은 칠로 인하여 그 강직함을 드러내는 효과를 얻고자 했다. 뭐든지 새로운 방식을 도입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 실험작이 된다는 뜻이다. 물론 그 의미는 적지 않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모험이기도 하다.

제주도 전시를 위해 제작한 화보를 대충 훑었다. 의외로 뒷모습을 묘사한 그림이 많다. 진짜미인은 뒤태까지 미인이라고 했던가. 보는 이에게 호기심과 상상력을 불러일으키게 만든다. 뒷모습을 그린 윤곽선만 봐도 누구라는 것을 짐작게 하는 솜씨가 문외한의 눈에도 예사롭지 않다. 스승은 ‘절구통 수좌’였다. 한번 앉으면 꿈적도 앉고 참선에 몰입하기 때문에 주변에서 붙여준 별명이다. 그러나 화백의 해석은 달랐다. 절구질을 하면 안에 있는 알갱이도 밖으로 튀어나오기 마련이다. 그것을 쪼아먹으려고 참새가 주변에 모인다. 그것이 당신 주위에 사람을 모을 수 있는 힘이 되었다는 것을 좌선하는 뒷모습을 통해 표현하고 싶었다고 술회했다. 절구통에 대한 작가의 또다른 후덕한 해석이다.

그 인연으로 며칠 뒤 작업실까지 찾게 되었다. 아파트 상가 3층이다. 계단을 따라 한참 올라갔다. 복도 끝에서 꺾어지는 지점에 자리를 잡았다. 문 앞에는 용도를 짐작할 수 없는 화분용 의자 두 개가 수문장처럼 지키고 있다. 그 옆에는 표구까지 끝난 액자 두 점이 포장 상태로 등짝을 드러낸 채 벽을 기대고 서있다. 화실은 석고상 화선지 벼루 먹 붓 등이 무질서 속에서 나름의 질서를 유지한 공간이다. 미세먼지를 대신한 종이먼지가 폴폴 날리는 탁자주변에 빙둘러 앉아 두런두런 이야기 꽃을 피웠다. 목탄그림을 고칠 때 식빵을 사용한다는 얘기를 들은 기억이 갑자기 떠올라 사실여부를 물었더니 요새 식빵은 기름기가 많아 지우개로 쓸 수 없다는 대답이 돌아온다. 인물화 작업을 하다가 필요하다면 생가(生家)에 가서 흙을 가져와 물감에 섞기도 했다. 쥐의 수염 혹은 노루 겨드랑이 털을 뽑아서 붓을 만들기도 하고 거친 느낌이 필요할 때는 칡으로 만든 붓인 갈필도 사용했다. 삶 그대로가 이야기 보따리였다.

어쨌거나 이 자리에 둥지를 틀고난 뒤 오랜 세월 동안 수백점의 작품과 수십번의 전시회를 성공리에 치러 낸 창작의 산실이 되었다. 작가에게 나름의 명당인지라 한두 마디 언어 속에서 이 공간에 대한 애정이 알게 모르게 뚝뚝 묻어난다. 부탁받은 인물화의 마무리 작업에 여념이 없다. 솜씨가 무르익은 시기의 작품을 접한 어떤 이는 “오도자(吳道子)에 버금가는 솜씨”라는 찬탄문자까지 보냈다고 하면서 민망한 일이라고 낯빛을 붉혔다.

수묵화의 원조는 당나라 화성(畫聖)으로 불리는 오도자(吳道子 680~759)다. 궁궐과 절집에 많은 그림을 남겼다. 당나라 때 미인의 대명사로 불리는 양귀비의 정인(情人)인 현종(玄宗)시대에 활동한 인물이다. 이름을 날리기 전에도 그의 재주를 엿볼 수 있는 일화가 전한다. 잠시 포도청에서 하급관리를 지낼 때 일이다. 그의 작품인 수배자 그림으로 방(榜)을 붙인 덕분에 현상금까지 걸린 도둑을 잡을 수 있었다. 명망을 떨칠 무렵 임금의 부탁으로 궁궐에 다섯 마리 용을 그렸다. 마치 살아있는 것 같았으며 비가 오려고 하면 그림에서 안개구름이 뭉게뭉게 피어났다고 한다.

선어록을 읽다가 오도자를 만났다. 그림이 아니라 글자를 통해 그 이름 석자를 만난 것이다. 당송시절을 풍미했던 선사들의 대화 속에 “그림은 오도자가 제일”라는 말이 종종 나오는 까닭이다. 당시에 유행하던 수묵으로 그린 관세음보살상 가운데 오도자 작품이 가장 뛰어났다. 충북 청주에서 출판된 최고의 금속활자본 『직지』에는 “오도자의 관음상은 그 자체로 사찰이다.”라고 하는 양산연관(梁山緣觀)과 대양경현(大陽警玄943~1027)이 나눈 작품평이 실려 있을 정도다.

명품 성화(聖畫)는 많은 사람들이 찾기 마련이다. 물론 인물화에 국한된 것은 아니다. 신라의 솔거(率居)가 경주 황룡사 벽에 그렸다는 소나무 역시 성화대접을 받았다. 사람뿐만 아니라 참새까지 찾아왔기 때문이다. 별다른 삶의 흔적을 남기지 않고 이름만 전하는 송나라 영안(永安)선사가 남긴 유일한 선문답이 ‘소나무 그림’이다. 물론 선사의 소나무와 솔거의 소나무가 동일한 소나무라는 근거는 없다. 또 다른 소나무라는 증거도 없다.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 무엇입니까?”
“벽 위에 마른 소나무를 그려 놓으니 벌들이 앞다투며 꽃술을 모우는구나.”

과연 중국에서 경주까지 왔을까? 그림 마니아라면 오지 못할 이유도 없겠지.

 

[김호석 화백 ]

 

[법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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