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국의 '타임머신']안중근 흑역사…일제 총독부에 아버지를 판 안준생의 절규

2019-04-04 07:36
편안한 심판대에 앉은 우리는, 사경에 몸부림 치던 친일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

[방송에서 다룬 '안준생의 친일'. 맨 왼쪽이 준생이다. 이 사진은 안준생이 이토 분키치(사진 오른쪽)에게 사죄한 뒤 기념사진을 찍었다.]

[안중근 부인 김아려 여사와 아들 분도(왼쪽), 준생.]

[1920년대 상하이에서 살던 무렵의 안중근 유족. 오른쪽부터 안중근 아들 안준생, 동생 안정근, 정근의 아들 안원생, 안중근 딸 안현생, 동생 안공근의 아들 안우생. ]




# 1939년 서울 남산 박문사의 충격

1939년 10월 16일 서울 남산 동쪽에 세워진 절, 박문사(博文寺) 마당에서 박수소리가 터져나왔다. 미나미 지로(南次郞. 1874~1955) 총독은 단상에 올라온 남자를 소개한다.
"이토 분기치(伊藤文吉) 남작입니다. 고(故) 이토 히로부미 통감의 아들이고요. 현재 일본광업 사장이기도 합니다."
박수소리가 커지자 미나미는 단상 아래로 손짓을 하며 한 남자를 불렀고 다시 그를 소개한다.
"이분은 안준생입니다. 안중근의 아들이죠."
주위가 시끄러워졌다. 그때 미나미 총독이 두 사람을 무대 가운데로 이끈다. 안준생 앞에 선 이토 분기치가 한 손을 내밀었다. 안준생이 허리를 숙이며 두 손을 내밀어 그의 손을 잡아 악수를 한다. 환호소리가 크게 터져나왔지만, 한쪽 구석에서는 한숨소리가 새나왔다.

이토 분기치는 이토 히로부미의 둘째 아들이며 집안의 하녀를 통해서 낳은 자식이었다. 분기치는 이토 사망 30주기를 기리기 위해 서울을 찾았고, 마침 상하이에서 온 안준생과 박문사에서 만나는 프로그램이 총독부에 의해 급히 기획된다. 분기치는 이날 조선호텔에서 미리 안준생을 만나, 박문사 이벤트의 각본을 짰다. 그 자리에는 총독부 외사부장인 마쓰자와가 있었다.

역사는 어김없이 '다음 챕터'가 기다리고 있다. 1909년 동북아시아는 물론 세계를 흔들었던 안중근(1879~1910)의 심판과 그의 순국. 우리는 더 이상 이 불멸의 영웅 뒤에 드리운 시간의 긴 그림자를 주목하지 않았다. 너무도 젊었던 31세의 죽음. 이미 결혼을 한 몸이었던 그의 가족들은 어떻게 그 뒤의 생을 살아냈을까. 그의 애국적 결행 이후를 마땅히 끝까지 지켜줘야할 '국가'는 없었다. 두억시니처럼 따라붙는 일제의 끄나풀들은 널려 있었다. 가족들은 죽음을 넘나드는 위험과 가난의 맨땅 위에 그대로 내동댕이쳐졌다.

그 30년 뒤의 모습이 저것이다. 이토의 아들에게 안중근의 아들이 사죄하는 장면을 연출함으로써, 일본은 뼈저린 '안중근 콤플렉스'를 씻어내고자 했다. 당시 자신들의 식민지국가였던 나라에 대해 이토록 오랫동안 충격과 분노를 간직하고 있었다는 의미도 된다. 일제는 저 '역전극'을 만들어내기 위해 1910년 이후 내내 안중근 가족들을 스토킹하며 그 핵심인사를 회유하여 변절시켰다. 그중의 한 사람이 안준생이다. 그는 미나미 총독의 양아들이 되었고, 일본 전역을 돌면서 서울 남산서 보여준 '화해 드라마'를 재연했다. 아버지를 부정하고, 일제의 품속에 안기면서 준생은 친일파에 허용된 짧은 영화를 누렸다.

# 30년간 별렀던 ‘이토 저격’의 역전극

박문사는 안중근의 총에 맞아 죽은 이토의 이름 ‘박문(博文)’이 들어간 사당이자 사찰이다. 1909년 하얼빈의거 직후에 지은 것은 아니었고 1932년에 을미사변 항거의 추모지인 장충단을 일제가 멋대로 공원화한 뒤 그 동쪽에 세운 절이다. 박문사를 지으면서 일제는 광화문 석재, 경복궁 선원전과 부속건물, 남별궁의 석고각을 떼어와 쓰는 문화적 만행을 저지르기도 했다. 이 절이 자리잡은 산언저리를 춘무산(春畝山)이라 불렀는데, 이토의 호가 ‘춘무’다.

이 건물은, 민망하지만 친일파의 메카였다. 낙성식을 할 때 조선총독 우가키 카즈시게가 참석했고, 이광수, 최린, 윤덕영 등 친일세력가 1000여명이 운집했다. 박문사는 이토의 훈업을 후세에 전하고 일본 불교 진흥을 통해 한일 민족간의 정신적 결합을 굳히겠다는 기치를 걸고 만들어졌다. 이런 절에, 이토를 죽인 이의 아들이 찾아와 용서를 빌고 그에게 경배하도록 한 것은 황망히 죽은 이토의 사령(死靈)을 위무하면서 이를 양국의 정신적 병합의 상징으로 삼고 싶었기 때문이다. 준생과 분기치가 박문사 앞에서 손을 잡고 대중과 언론이 보는 가운데 사과-용서 퍼포먼스를 벌인 데에는 안중근과 이토의 이미 판가름난 게임을 번복하여 이토가 결국 이겼음을 선언하고 싶었던 일제의 콤플렉스도 담겼을 것이다. 박문사는 해방 뒤 헐렸고 그 자리엔 신라호텔이 들어선다. 그러나 이토의 자취는 남아있다. 그를 추모하는 설계였던 박문사 108계단은 신라호텔 계단으로 여전히 살아있다.

일제는 '안중근의 심판'을 지우려 했을 뿐 아니라, 역사의 프레임을 새로 짜넣으려 했다. 즉 1910년의 한일합병은 일본의 식민지 전략에 의한 것이 아니라 안중근의 일제통감 암살 사건이 불러들인 필연이라는 논리였다. 합병의 원인이 일본이라는 외인(外因)이 아니라, 조선이 자초한 내인(內因)에 있다는 것이다. 거기에다 안중근에게 남은 유일한 아들의 '공적인 사죄'는 식민지 통치의 당위성을 강화하는 더할 나위 없는 호재였다. 지금도 일본에는 안중근의 아들 안준생의 ‘일본에 대한 참된 충심’을 기리는 이들이 있을 정도다. 당시 친일 언론들은 이 뉴스를 대서특필하며 큰 의미를 부여했다.

이튿날인 10월 17일자 경성일보는 “아버지가 범한 죄 때문에 고투의 30년을 보냈던 안준생 군이 생애의 원망(願望,소원)이었던 이토 공에 사과를 토로한 지금, 홍대한 성은에 감읍하면서 은혜와 원수를 초월한 자식끼리 서로 손을 잡고 과거를 청산, 국가를 위한 봉사를 맹세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신문은 이튿날 연속보도에선 이렇게 그리고 있다. “불단(佛壇) 왼쪽엔 안중근 위패, 그 옆에는 이토공의 사진이 서로 이야기를 하듯 놓여져 있었다. 남작(분기치)과 안준생은 독경을 외며 부처의 은혜에 감사했다. 남작은 안중근의 영령에도 진심으로 분향했다. 안준생은 감격의 눈물을 계속 흘리고 있었다.” 이 보도에 물론 일정한 과장과 왜곡이 있었을 거라고 짐작이 가지만, 당시 사건에 대한 친일언론의 흥분은 느낄 수 있다. 당시 매일신보는 이 뉴스를 보도하며 ‘여형약제 오월삼십년영석(如兄若弟 吳越三十年永釋)’이란 헤드라인을 달았다. “형 같고 동생 같았다, 오나라와 월나라 원수지간 삼십년이 영원히 풀렸다”란 의미다.

이 안중근 말살극에 대해 당시 식민지 사람들은 어떻게 반응했을까. 식민지의 무력감을 개탄하는 이도 있었겠지만 대부분은 안준생에 대해 '호부견자(虎父犬子, 호랑이 아비에 개 자식)'라 침을 뱉었다. 아버지의 값진 죽음을 헛되이 하는, 친일의 길을 걷는 그에게 퍼부은 욕설은, 엄혹한 시절을 절망 속에서 감내하고 있었던 많은 이들이 자신의 처지와 대비하며 억울한 마음을 섞어 내뱉은 것이리라. 그 분노도 이해가 간다.

# 안중근의 아내는, 변절자 아들에게 고생했다고 했다

이렇게 변절한 뒤 안준생은 상하이로 돌아간다. 어머니 김아려(아녜스)는 말없이 눈물을 흘렸다. 아버지를 팔고 돌아온 준생을 껴안으며 "고생했다"고 위로한다. 이 장면은 이해가 되는가. 백범 김구는 해방이 되면 반드시 죽여 응징해야할 대상으로 준생을 꼽았다. 백범일지에는 “민족반역자로 변절한 안준생을 체포하여 교수형에 처하라고 중국 관헌에게 부탁했으나 그들이 실행치 않았다”고 적어놓았다. 그런데 안중근의 아내는 측은한 눈길로 아들을 보며 30년 지옥 같은 고생길을 걷어낸 ‘변절’을 어루만져주고 있는 것이다. 이 자리에서 준생은 아내 정옥녀에게 “내가 현해탄에 몸을 던졌어야 하는데 이렇게 살아 돌아왔다”고 말하며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이제 1909년 10월 26일 이후 가족의 삶 속으로 들어가보자. 안중근은 의거 직전 동료를 통해 식구들에게 편지를 보낸다. 연해주에 살림을 장만해놨으니 그리로 오라는 메시지였다. 안 의사의 어머니 조마리아는 손녀 안현생은 두고, 며느리 김아려와 손자 안분도와 안준생을 보낸다. 김아려는 처음으로 기차를 탔고 장춘(長春)에 닿았는데 정거장이 북적거렸다. 맞은 편에 기차가 하나 서 있었는데, 나중에 알고보니 이토 히로부미의 시신이 실린 열차였다. 그때까지도 가족은 안중근의 의거를 모르고 있었다.

김아려는 하얼빈에 도착하자 남편이 편지에 적어준 대로 김성백(金聖佰)의 집을 찾아간다. 이 집에서는 안중근 가족들을 보고도 반가운 기색이 전혀 없었다. 문득 안중근의 지인이 들어와 "곧 일본경찰이 들이닥칠텐데 절대로 안중근의 아내라고 말하면 안된다"고 주의를 준다. 그의 말대로 얼마 후 일본경찰이 와서 세 사람을 잡아갔다. 경찰서에서 김아려는 "안중근을 전혀 모른다"고 잡아뗐지만, 경찰은 화를 내면서 셋을 유치장에 가둔다.

# 안중근의 죽음도 모른 채 하얼빈으로 달려간 가족들

아이들과 함께 유치장에 갇힌 김아려는 둘째 아들 준생에게 "크게 울어라"고 속삭였다. 준생의 울음에 경찰이 와서 다시 조사실로 데려갔는데, 준생이 계속 울자 아려는 "그만 울라"고 말한다. 눈치를 볼줄 모르던 어린 준생은 "엄마, 아까는 울라고 그러더니..."라고 말하자, 경찰이 사실을 알고 그녀를 향해 욕설을 퍼붓는다. 천진한 준생의 모습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대목이지만 이 말이 준생의 말년과 겹쳐지면서 씁쓸한 비감(悲感)을 자아내기도 한다.

경황없이 시작한 머나먼 이국의 삶. 서른 살 남편이 서슬 퍼런 일제통감을 쏴죽였다는 소식을 뒤늦게 접하며 하얼빈을 서성거리는 서른 즈음의 나이(김아려는 출생년도도 뚜렷하지 않다)인 여성을 떠올려 보라. 분도의 손을 잡고 준생을 들쳐업고 그 살벌한 거리에 지금 서 있다. 아려는 사흘 뒤 유치장을 나왔다. 남편은 연해주 꼬르지포에 거처를 마련해놨다고 편지에 써놓았다. 우선 그곳으로 간다. 폭탄 맞은 듯한 상황은, 아려만이 아니었다. 국내에 있었던 안중근의 어머니 조마리아와 다른 식구들도 찾아와 위협을 주며 고함을 지르는 일본경찰들 때문에 공포의 나날이었다. 가족들은 모두 보따리를 싸고 야반도주해 연해주로 몰려왔다. 그들의 정착을, 안중근을 아꼈던 동지들이 제 일인 것처럼 도와준다. 의사 유승렬이 그랬고, 도산 안창호와 이갑이 그랬다. 안중근 가족은 꼬르지포에서 10리쯤 떨어진 조선인 마을(목릉 팔면통)로 옮겼고 이곳에서 농장을 마련하기도 했다. 삶이 좀 안정되는가 싶었다.

1911년 여름 7살 맏아들 안문생(분도)이 낯선 사람이 주는 과자를 먹고 죽었다. 이들 가족에게는 늘 그들을 뒤따르는 불안한 그림자가 있었다. 그들은 분도의 죽음도 일제가 저지른 짓이라고 믿었다. 1919년 10월 그들은 상하이로 이주한다. 임시정부가 출범한 지 몇 개월이 지난 때였다. 안중근 가족은 프랑스 조계의 남영길리에 살았는데, 안창호와 김구가 도움을 준다. 안준생이 가톨릭스쿨에 입학해 영어를 공부하던 시절이기도 하다. 그러나, 아무런 밑천도 없이 이국의 떠돌이 생활을 했던 그들의 삶이 빈사(瀕死)의 지경에 이르는 과정은 지워져 있다. 안중근의 가족이 다른 독립투사 가족과 다른 점은, 그 유랑과 도피의 시절이 너무 길었다는 점이다. 1909년부터 식민지시대 내내 그들은 ‘일제의 심장을 겨눈 암살자’의 가족으로 쫓기며 살아야 했다. 일제는 이 가족을 죽이는 대신 회유와 포섭으로 그 저항의 기운을 원천적으로 꺾고자 했다. 그들이 겨냥한 1차 타깃은, 안중근의 하나 남은 아들일 수밖에 없다. 그게 준생이다. 30년 고통과 30년 유혹이 강도(强度)를 더해간 그 어느 지점에서, 준생은 아버지의 끈을 놔버렸을 것이다.

1907년생인 안준생은 2살 많은 정옥녀와 결혼했다. 시기는 정확하지 않지만 1930년대 중후반일 것이다. 처가의 권유로 약국을 했다. 헤로인 장사를 했다는 얘기도 있다. 이 약국을 개업한 돈이 일제가 건네준 은사금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당시 상하이 조선인 사회에서는 안준생을 의심하는 얘기들이 많았다고 한다. 준생에게는 자존심도 애국심도 거추장스러운 때였을까. 일제의 만주-조선시찰단 제안이 들어온 것은 그 무렵이었다(1939). 안준생과 누이 안현생의 남편 황일청이 대상이었다. 1941년엔 안현생도 박문사를 찾아 이토에게 분향 배례한다. 자식들의 이런 모습들을 지켜보았을, 안중근의 아내 김아려는 1946년 상하이에서 69세를 일기로 타계한다.

# 아버지는 나라의 영웅이지만 내겐 재앙이었다

'이토 히로부미, 안중근을 쏘다'라는 역사소설은 역사학자 이태진과 조마리아의 후손인 조동성이 쓴 기록을 작가 김성민이 소설로 다시 쓴 것이다. 거기엔 안준생의 항변이 나온다.

"왜 나는 안준생으로 살 수 없었나요? 왜 나는 내 삶을 선택할 기회도 없이 이런 운명에 던져져야 했나요. 아버지는 스스로 선택한 것이고 죽음을 택한 것이지만, 나는 왜 내 선택이 아닌 아버지의 선택 때문에 이런 삶을 살아야 합니까. 아버지는 나라의 영웅이었지만, 가족에겐 재앙이었죠. 나는 나라의 재앙이었겠지만 내 가족에겐 영웅입니다."

실제로 안준생이 한 말이라고 보기는 어렵고, 소설의 실감을 돋우기 위해 각색한 말로 짐작되지만, 그가 '친일'로 변절할 수밖에 없었던 절망의 상황을 울림있게 들려준다. 일본으로서는 30년 동안 약해질 대로 약해진 독립투사 가족들의 내면으로 파고들어 그들에게 끝없이 당근을 내밀며 완전한 변절을 하도록 유인해온 셈이다. '안준생의 나라'는 절망과 죽음의 바닥에서 끝도 없는 인내만을 요구하고 있었을 뿐이었고.

일본은 상하이의 안준생에게 유럽계 세관장이 살던 관사를 내줬다. 그들에게 영혼을 내준 대가로 난데없는 호강을 누렸지만 오래 가진 못했다. 1945년 일제 패망 이후 상하이까지 들어온 중국 공산당을 피해 홍콩으로 이주한다. 그는 아내 정옥녀와 아들 안웅호와 안연호를 미국으로 보낸 뒤 1951년 한국전쟁 와중의 국내로 들어온다. 그가 왜 가족 없이 혼자 귀국했는지 이유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자신이 한 친일행위가 해방된 국가에서 단죄되는 상황을 아내와 자식에게 부담지우지 않으려는 마음 때문이었을 수도 있다.

# 영웅의 아들은 개같이 살고, 변절자의 자식은 다시 성공했죠

귀국한 안준생은 부산 피란지에서 폐결핵을 앓고 있었는데, 국방장관인 손원일 제독이 부산 바다에 정박한 덴마크 적십자선에 그를 입원시켰다. 그러나 곧 숨을 거뒀다. 준생의 아들 안웅호(토니안)는 미국에서 의학박사가 되었다. 준생은 총독부에서 대준 자금으로 상하이에서 약국을 운영했는데 이런 분위기가 웅호가 의학을 전공하는 계기를 만들었을 것이다. 안준생은 아들에 대해 이런 말을 했다.

"내 아들은 의사예요. 미국에서 제법 성공했고 주위의 존경과 사랑을 받으며 잘살고 있어요. 내가 사람들의 경멸을 받으며 모은 돈으로 가족을 부양한 덕분에 사람답게 살게 된 거죠. 우습지 않나요. 영웅의 아들은 개 같은 삶을 살고 변절자의 자식은 다시 성공했죠."

안웅호는 미국계 중국인 여성과 결혼해서 1남2녀(안도용, 리사, 캐런)를 두었다고 한다. 안웅호는 얼마 전 미국서 타계했다. 안웅호의 아들 토니안 주니어는 중국인 어머니와 함께 우리 정부 초청으로 한국의 안중근 의사 추모행사에 다녀가기도 했다.

# 안중근 두 외손녀의 근황

딸 안현생 또한 친일의 길을 걷다가 해방을 맞았다. 그는 한국전쟁을 겪으며 궁핍하게 살았다. 그녀는 전구(電球)장사를 하기도 했고, 사기도 많이 당했다고 한다. 대구 효성여대(대구가톨릭대 전신)에서 불문학 교수를 지냈으며 57세 때 서울의 단칸방에서 고혈압으로 돌아간 것으로 알려져 있다. 남편 황일청 또한 친일배신자로 낙인 찍혀 1945년 12월에 광복군에게 암살된다. 귀국행 배를 타려고 가족들과 함께 충칭에서 상하이로 내려오던 중 여관에서 총을 맞고 숨진다. 안현생은 이때의 충격으로 몸져 눕기까지 한다. 그녀는 1960년에 눈을 감았다.

안현생에겐 두 딸(안중근의 외손녀)이 있는데 황은주와 황은실이다. 황은주는 이화여대 기악과를 전공했다. 미국에 가서 자식들과 함께 4년간 살다가 2015년 귀국했다. 현재 경기도 동수원병원에 입원해 있다. 황은실은 1953년에서 1956년까지 효성여대(대구가톨릭대 전신) 불문학교수로 대구에서 거주했고, 이후 유학을 떠난 뒤 미국에 거주하고 있다. 2012년 대구가톨릭대 초청으로 방한한 적이 있다.

                                 이상국 논설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