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토가 내릴 채가구역과 하얼빈역, 우덕순과 안중근 운명 갈랐다
2019-03-27 14:06
[이상국의 타임머신]총 맞은 이토 "조선인이었나?...바보같으니"
2019년 3월 26일. 안중근 의사가 순국한 지 109년째 되는 날이었다. 안중근은 도탄에 빠진 한 나라의 면목을 세운 살신애국(殺身愛國)의 민족적 위인, 그 이상이다. 당시 조선을 비롯한 중국과 일본, 세계의 뇌리 속에 ‘삶과 죽음의 참된 가치’를 온몸으로 심어주고 떠난 인류정신사의 한 챕터였다. 그 의거는 죽음을 불사한 저격이, 평화에 대한 열망이라는 역설을 품어낸 '결정적 순간'이기도 하다.
안 의사가 처형당한 뤼순감옥의 간수였던 일본인 헌병 지바 도시치는 안 의사가 써준 글씨를 고향 일본 구리하라시에 모셔놓고 해마다 기일을 기려 추모를 했다. 여기에 안중근 추모비가 세워졌다. 한일관계가 냉각된 올해도 이곳엔 그를 추모하는 열기가 식지 않았다. 서울 남산 안의사기념관에서 열린 추모식에도 일본인 20여명이 참석했다. 그들은 말한다. “안중근 의사는 테러리스트가 아니라 평화주의자입니다.”
중국 뤼순, 감옥 내 박물관에는 안 의사가 순국한 바로 그 지점에 기념실이 만들어졌다. 이곳에서도 한중친선협회, 다롄한국인상회, 민주평통 다롄지회, 주다롄 한국영사출장소, 민주평통 선양협의회를 비롯해 국내외 관련 인사들이 모여 그의 순국을 기렸다. 이 자리에서 이종걸 의원(민주당)은 “남과 북이 열사께서 외친 동양평화론의 기치를 따라 이제 평화를 위한 진군과 행진을 하고 있으며, 이제 그 평화는 5부 능선을 넘고 있다”고 말했다.
누구나 알지만 누구도 제대로 알지 못한다는 안중근. 오늘은 그를 느낄 수 있는 ‘잊지못할 몇 장면’을 함께해본다.
#1. 이토 히로부미를 鼠竊(서절, 도둑쥐)로 표현한, 안중근 ‘장부가’
안중근은 1909년 10월 26일 거사에 나가기 전에 독립투사 동지 우덕순(1880~1950)에게 ‘장부가(丈夫歌)라는 시를 써서 건넸다. 나라 위해 기꺼이 죽으러 가는 길, 이 땅의 남자로 태어나 무엇을 해야 할 것인지 스스로 다짐하며 밝힌 ’뜨거운 문장‘이다. 한자로 되어 있지만 우린 이 말들을 기억해야 하지 않을까.
丈夫處世兮 其志大矣。 時造英雄兮 英雄造時。(장부처세혜 기지대의 시조영웅혜 영웅조시)
雄視天下兮 何日成業。 東風漸寒兮 壯士義烈。(웅시천하혜 하일성업 동풍점한혜 장사의열)
憤慨一去兮 必成目的。 鼠竊伊藤兮 豈肯比命。(분개일거혜 필성목적 서절이등혜 기긍비명)
豈度至此兮 事勢固然。 同胞同胞兮 速成大業。(기도지차혜 사세고연 동포동포혜 속성대업)
萬歲萬歲兮 大韓獨立。 萬歲萬歲兮 大韓同胞。(만세만세혜 대한독립 만세만세혜 대한동포)
장부가 세상에 나온 것, 그 뜻은 크도다, 시대가 영웅을 만든다고? 영웅이 시대를 만드노라
천하를 노려보았노니, 어느 날에 뜻을 이룰꼬? 동쪽바람이 차가워지니, 사내의 의기가 뜨겁다
분노하여 한 걸음 가노니, 꼭 목적을 이루리, 도둑쥐 같은 이토여, 그 목숨줄을 자랑하리?
여기까지 오기 몇 번인가, 일의 진행은 정해져 있나니, 동포여 동포여, 곧바로 큰일 이루리라
만세만세 대한독립, 만세만세 대한동포여
#2. 손가락 잘린 수인(手印)은, ’청년 의병 안중근‘의 결의였다
안중근은 의병이었다. 1907년 헤이그 특사사건으로 고종황제가 퇴위하자 조선 군대가 해산됐다. 이때 전국에서 의병이 일어난다. 안중근은 강원도 의병 결성에 가담했고 황해도 의병대에서도 활동했다. 블라디보스토크로 이동한 그는 한인청년회 간부를 맡는다. 여기서 의병대 조직을 독려하여 300명의 대한의군 의병대를 창건한다. 김두성이 총독을, 이범윤이 대장을 맡았고 안중근은 참모중장이었다.
신규 무기를 확보한 의병대는 100여명의 병사를 두만강에 집결시켰다. 그들은 강을 넘어 함북 홍의동과 경흥의 일본군을 습격해 격파하는 전과를 올린다. 여세를 몰아 경흥 일대의 일본군과 대대적인 교전을 벌였다. 이 전투에서 안중근은 포로로 잡은 일본군을 국제공법에 의거해 석방한다. 그런데 풀려난 일본군이 의병대의 상황을 상부에 보고하면서 대대적인 기습을 받는다. 회령에서 5천명의 적을 만나 혈투를 벌였으나 중과부적으로 참패를 당했다. 안중근은 큰 충격을 받았고, 블라디보스토크로 건너가 의병대를 조직하려 했으나 여의치 않았다. 그러나 그는 꾸준히 의병 재기를 모색했다.
1909년 3월 2일 노브키예프스크에서 김기룡, 엄인섭, 황병길 등과 12인의 단지동맹(斷指同盟)을 결성한다. 이 자리에서 안중근과 엄인섭은 이토 히로부미 암살을, 김태훈은 이완용의 암살을, 손가락 자른 피로써 맹세하고 3년 내에 이루지 못하면 자살로 국민에게 속죄하기로 약속한다. 안중근은 이때 왼쪽 손의 넷째손가락(약지) 한 마디를 잘랐다. 안중근의 수인(手印)은 이때부터 찍기 시작했다.
#3. 안중근과 우덕순, 운명이 갈린 ’이토 도착역‘
안중근이 이토를 사살하여 만고의 영웅으로 남은 것은, ’운명‘이었다고도 말할 수 있다. 그가 ’장부가‘에서 사세고연(事勢固然, 일의 진행은 정해져 있다)을 말한 것은 아마도 그가 그 운명을 확고히 예감했기 때문이 아닐까. 1909년 안중근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원동보(遠東報)와 대동공보(大東共報)에 난 기사를 보고 눈이 번쩍 뜨이는 듯했다. 이토 히로부미가 러시아 재무장관 블라디미르 코코프체프와 회담을 하기 위해 하얼빈에 온다는 것이었다. 손가락을 자르며 했던 맹세를 하늘이 들었을까. 신문을 가져와 보여준 대동공보사 기자 이강(李剛)은 그가 하얼빈으로 가는 것을 도와준다. 이 거사를 모의하고 실행한 사람은 안중근, 우덕순, 조도선, 유동하 등이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토가 승차한 동청(東淸)철도는 장춘의 남장춘과 관성자역을 거쳐, 채가구역과 하얼빈역에 도착하는 코스였다. 원래는 4개의 역을 모두 커버해 저격의 기회를 만들기로 했으나, 거사를 행할 지망자가 부족했다. 당시로선 이토가 남장춘역에서 탈지, 관성자역에서 탈지 알 수 없었다. 또한 채가구역에서 내릴지 하얼빈역에서 내릴지도 알 수 없었다. 그들은 일단 도착 예정지를 모두 지키기로 한 것이다. 채가구는 우덕순과 조도선이 맡고 하얼빈은 안중근이 맡았다. 유동하는 연락책이었다.
지야이지스고역이라고 불리는 채가구역에서 기다리던 우덕순은 25일 저녁부터 역사 지하매점 옆 구내여관에 묵었다. 26일 새벽 눈을 떴을 때 조도선이 문밖의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일본 대신이 온다나 봐요, 러시아 군대의 경비가 철통 같아서 나가지도 못해요.” 매점 주인의 말이었다. 문을 열려고 하니 밖에서 이미 잠겨있었다. 문을 흔들며 두들겼으나 아무 반응이 없었다. 우덕순은 ’거사는 글렀구나‘하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오전 6시, 이토가 탄 특별열차가 2분간 정차했지만 그들은 꼼짝 없이 갇혀 있었다. 이토는 이 역에서 내리지 않고 지나갔다. 몇 시간 뒤 러시아 헌병들이 들이닥쳐 우덕순과 조도선을 체포했을 때, 그는 직감했다. “안중근 동지가 해냈구나!”
그날 이토가 채가구역에서 내렸다면 역사는 달라졌을 것이다. 하지만 이토의 운명은 안중근의 총구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3시간. 안중근에게는 피가 마르는 듯한 시간이었다.
#4. 코레아 우라! 총격 뒤 러시아어로 세 번 외쳤다
10월 26일 오전 9시. 이토가 탄 탑승열차가 하얼빈에 도착했다. 러시아 재무장관과의 회담은 열차 내에서 갖기로 되어 있었다. 30분간 대화를 나눈 이토는 열차 밖에서 러시아 군대가 사열을 기다리고 있다는 코코프체프의 말에 흐뭇한 표정을 지으며 열차계단을 내려왔다. 천천히 사열을 마친 이토가 열차로 다시 돌아가다 멈춰섰다. 등 뒤에서 러시아 군인들의 환호소리가 크게 터져나왔기 때문이다. 이토는 몸을 돌려 그들을 향해 손을 흔들며 인사했다. 순간 7발의 총성이 울린다. 열 걸음 앞에 서있던 안중근은 이토 일행이 모두 비슷한 옷을 입고 있어서 누가 통감인지 알 수 없었다. 그런데 그중의 하나가 손을 들며 인사를 한 것이다. 저 놈이다! 순식간에 꺼내든 브라우닝제 반자동권총 M1900에서 날아간 총알들은 이토를 맞히고 수행비서관과 하얼빈 주재 일본총영사, 남만주 철도의 이사를 쓰러뜨린다.
“코레아 우라, 코레아 우라, 코레아 우라!”
“코리아 만세”라는 뜻의 러시아어가 총을 든 남자의 입에서 우렁차게 터져나왔다. 일제통감을 쓰러뜨린 장면을 충격적으로 목도했을 현장의 러시아 장관과 군인들에게, 마치 세계의 모든 사람들에게 공표하듯 이 나라의 존재를 알린 것이다.
총을 맞은 뒤 이토는 아직 숨이 멎지 않았다. 피를 흘리는 채로 열차로 옮겨졌다. 30분 정도 그는 숨을 헐떡이며 살아있었다고 한다. 동행한 의사의 증언이다. 하지만 이 대목에서는 말이 엇갈린다. 총을 세 발이나 맞은 상태에서 그렇게 오래 살아있을 수 있었겠느냐는 의문을 제기하는 쪽도 있다. 이토는 의사에게 브랜디를 달라고 했다. 한 모금 마신 다음, 정신이 좀 들어온 듯 “범인은 누구인가, 조선인인가”라고 물었다. 안중근이 외친 러시아말을 들었기에 누구인지 확인하고 싶었을 것이다. 누군가가 “그렇습니다”라고 말하자, 이토는 “바보 같으니...”라고 중얼거리며 숨을 거뒀다. 이런 운명이 올 줄을, 그 또한 무의식 속에서 예감하고 있었을까.
안중근은 재판에서 이렇게 말했다.
“내가 이토를 죽인 것은 오해해서가 아니다. 동양의 평화를 어지럽히고 대한과 일본을 멀어지게 했기 때문에 이 나라 의병중장의 자격으로 죄인을 처단했다. 나는 두 나라가 더 친밀해지고 평화롭게 지내서 오대주에 모범이 되길 원했다.”
#5. 나를 금요일에 사형시켜달라
안중근은 1910년 2월 14일 뤼순 관동도독부 지방법원에서 사형선고를 받는다. 그는 천주교 조선 교구장인 뮈텔 주교에게 전보를 보내 성금요일에 사형을 집행하게 해달라고 요청한다. 성금요일(Good Friday)은 천주교에서 쓰는 명칭이다. 부활절 직전의 금요일을 말하며, 예수가 십자가에서 당한 고난과 죽음을 기념하는 날이다. 이 날은 미사를 집전하지 않고 그리스도의 수난 예식을 치른다. 안중근이 스스로의 죽음을 어떻게 생각했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이 땅의 평화를 위해 자청하여 십자가를 짊어진 운명을 택했다는 사실을 분명히 자각하고 있었다.
이 뜻이 받아들여졌는지, 일본은 3월 25일 금요일에 사형을 집행하려고 했다. 그런데 이날이 대한제국 황제 순종의 탄생일인 건원절이라 하루 미뤄 26일 오전 10시에 집행을 했다. 안중근은 자신이 대한의 의병장 자격으로 이토를 처단했다고 강조했다. 일제는 건원절을 기회로 의병들이 새로운 거사를 시도하지 않을까 하는 불안을 가지고 있기도 했다.
안중근은 이런 유언을 남겼다. “내가 죽은 뒤 하얼빈공원에 내 뼈를 묻어뒀다가 국권이 회복되면 고국으로 옮겨 묻어주시오. 천국에 가서도 나는 독립을 위해 힘쓸 것이다. 대한독립의 소리가 들려오면 나는 마땅히 춤추며 만세를 부르리라.” 하지만 사형이 집행된 뒤 일본의 간수는 공원까지 가지 않았고 뤼순감옥 뒤뜰에 그를 대강 묻었다. 2008년 광복 이후 처음으로 남북 정부가 나서 안중근 유해 공동발굴에 나섰지만, 그 위치도 알아내지 못했다. 생전 김구의 뜻으로 효창공원에 ’가묘‘만 만들어져 있다.
우리가 그를 기억하는 방법은 그의 ’뜻‘을 살피는 것일지 모른다. 중국인들은 우리를 향해 “안중근이 추구한 동양평화론은 오늘 중국도 배워야 할 만큼 선구적인 사상”이라고 평가하면서 “한국은 왜 안중근 평화사상을 국제화하지 못하느냐”고 안타까워 한다. 이토의 처단은 자국 중심적인 동양평화를 빌미로 국권을 침탈하는 위선적인 정략을 징벌한 것이라고 안중근은 밝힌 바 있다. 한·중·일이 진짜 글로벌 평화 공영시대를 어떻게 열어야 하는지, 그는 목숨을 걸고 보여주었다.
이상국 논설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