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태 금융포럼 미리보기] 90년간 이어진 미국과 강대국간 환율 전쟁
2019-03-11 06:30
미국은 제조업 비중이 국내총생산(GDP)의 10% 정도에 불과하다. 환율이 미국 상품의 수출 경쟁력에 미치는 영향력이 제한적이라는 의미다.
환율과 미국의 무역적자와는 크게 상관관계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이 환율 전쟁을 일으키는 이유는 달러의 기축통화로서의 자리를 굳건히 지키기 위함이다.
미국은 이를 위해 한 세기에 걸쳐 4차례의 환율 전쟁을 일으켜 달러의 위상을 지켜왔다.
대공황 시절 루스벨트 전 미 대통령은 경기를 살리기 위해 유대 자본과 유대인들을 끌어들였다.
루스벨트 정부의 초대 재무차관은 유대인 헨리 모겐소 2세였다. 루스벨트 전 미 대통령과 모겐소 2세는 시중에 돈이 돌게 하고 미국 상품의 수출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서는 달러의 평가절하가 시급하다고 판단했다.
게다가 금·은복본위제(금 ·은 두 종류의 금속을 본위화폐로서 유통시키는 화폐제도)였던 미국은 국제시장에서 은을 대량 구매하기 시작해 통화량을 늘려 나갔다. 이로써 국제시장의 은 가격을 폭등시켜 은본위제 국가들을 초토화시켰다. 이로 인해 중국이 은본위제를 포기하면서 혼란에 빠져 공산화되는 계기가 됐다. 이것이 세계 환율전쟁의 시작이었다.
◆2차 환율전쟁… '닉슨 쇼크' 금환본위제 파기
이후 갈등의 정점은 1971년 8월의 '닉슨 쇼크'였다. 리처드 닉슨 전 미 대통령은 달러를 금과 바꿔주는 금태환을 금지시켜 '브레턴우즈 체제'를 무너뜨렸다.
이로 인해 달러의 신뢰도가 추락하면서 금값이 천정부지로 올랐다. 이는 석유수출국기구(OPEC)가 국제 원유가를 2달러에서 10달러로 올리는 계기가 됐다. 일명 오일 쇼크'였다.
닉슨 쇼크 시점 4개월 전부터 7년 7개월간 지속된 달러 약세기(1971년 4월~1978년 10월)에 달러화의 가치가 엔화와 마르크화에 대해 각각 39%와 절반 수준으로 떨어졌다.
◆3차 환율전쟁… '플라자 합의' 촉발
이후 갈등의 산물은 1985년 9월의 '플라자 합의'였다. 주요 선진 5개국(G5) 재무장관과 중앙은행 총재들은 뉴욕의 플라자호텔에 모여 달러화 약세 유도를 결정했다. 환율전쟁 이후 달러화는 일본의 엔화와 독일 마르크화 등 주요 통화에 대해 큰 폭의 약세를 보였다.
1985년 2월부터 10년 3개월간 지속된 달러약세기(1985년 2월~1995년 4월)에 달러 가치는 엔화에 대해 3분의1, 마르크화에 대해서는 절반 수준으로 각각 급락했다. 이로써 일본은 '잃어버린 20년'을 맞이해야 했다.
◆4차 환율전쟁··· 금융위기 이후 미국의 유동성 확대
2008년 금융위기 이후 미국의 유동성은 정점에 달했다. '헬리콥터 버냉키'라는 말이 상징하듯 마치 공중에서 돈을 살포하듯이 미국의 유동성 살포는 무제한 수준이었다.
금융위기 초기에 유대 자본가들의 반대로 부실채권을 걷어내지 못했다. 그래서 공적자금을 부실 제거에 집중적으로 투입하지 못하고 전방위로 유동성을 뿌려댄 것이다.
여기에 대응해 유럽과 일본도 금리를 낮추고 유동성 확대에 참가했다. 학자들은 이를 4차 환율전쟁의 시작으로 보고 있다. 실제로 2010년 10월, 더블딥(Double Dip·이중 침체) 우려가 커지면서 미 연준이 2차 양적완화(QE)를 발표하고 중국에 대해 환율 절상을 촉구하면서 이른바 '환율전쟁'이 시작됐다. 서울 G20 정상회의를 앞두고 있던 시점이었다.
당시 환율전쟁을 두고 미국과 신흥국들 사이에 입장이 엇갈렸다. 미국은 중국, 한국 등 신흥국이 인위적으로 환율을 절하해 수출경쟁력을 키우고 있다고 비난했다. 반대로 중국, 브라질 등 신흥국들은 미국의 양적완화로 인해 대규모 유동성이 신흥국으로 유입돼 신흥국의 환율을 절상시키고 있다고 주장했다. 같은 현상을 자기들 입장에서 해석한 것이다.
미국의 양적완화 결과 2012년 8월 말까지 브라질 헤알화가 75% 급등(2002년 말 대비)한 것을 비롯해 일본 엔화(46%), 중국 위안화(30%) 등 모두 통화 가치가 올랐다. 우리 원화도 2012년에만 미국 달러화 대비 8%가량 절상돼 세계 주요 통화 중에서 절상 폭이 가장 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