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외교관 “동농은 일본 배척파” 親日과는 거리 먼, 知日의 고뇌

2019-01-30 18:36

[동농은 농상공부대신에 1895년과 1904년 두 차례 임명됐다. 사진은 광무(光武) 8년(1904) 정2품 정헌대부(正憲大夫) 의정부찬정(議政府贊政) 김가진을 농상공부대신으로 임명한다는 칙명이다. ]




명성황후 시해 9일 뒤, 日공사 임명받고 거부··· “농상공부대신 때 공금 유용” 日모함으로 구속

삼국간섭은 일본보다 갑오개혁에 더 날벼락이었다. 바다 건너 사는 치들이야 권토중래(捲土重來)의 기회라도 있지, 자기 몸 지킬 힘도 없는 개혁은 바야흐로 끈 떨어진 연 신세다. 고종의 눈이 번들거렸다. 박영효는 아직 물러가지 않은 일본군 병력 7천을 믿고, 국왕암살을 기도했다가 실패하자 일본으로 튀었다(1895년 5월). 이 사람의 처신이 대개 이러했다. 왕을 죽인다고 개혁에 날개가 돋치나? 평생을 권력만 바라보며, 정세의 고비마다 재를 뿌렸다. 대원군, 민씨, 박영효, 다 그랬다. 나라가 망하려니, 아버지에, 며느리에, 사위(박영효는 철종의 부마다)까지 불장난이다. 당장 한심해진 건 내각이었다. 고종이 억지를 써도 대꾸할 면목이 서지 않는다.
삼국간섭으로 일본도 움찔하고 있겠다, 암살사건으로 내각도 바짝 엎드려 있겠다, 고종은 사뭇 근엄한 표정으로 왕권을 회수하려 들었다. 민씨들이 궁중 출입을 재개하고, 탐관오리들이 복귀했다. 민영준이 사면되고, 고금도에 유배됐던 전 고부군수 조병갑이 판사에 임명되었을 정도이니, 다른 자들이야 말할 것도 없겠다. 시곗바늘이 거꾸로 돌아가나. 삼국간섭 직후 고종은 구미(歐美) 열강과 친교를 다지면서 일본의 영향력에서 벗어나기 위해 애썼다고, 교과서는 가르친다. 사실(fact)이지만, 진실(truth)은 아니다. 고종의 관심은 오로지 왕권 강화였다. 개혁이 왕권 약화를 의미한다면, 나는 언제든 개혁을 밟을 마음의 준비가 되어있다. 고종은 그런 사람이었다.
“본래 익힌 적이 없는 일이지만, 배워 익혀서 폐하께서 돌보아 주신 은택에 보답하려 했을 뿐 …… 재능은 한정되고 식견은 더욱더 엉성하여 오래 벼슬하도록 잘못을 감출 길이 없었습니다 …… 구차스럽게 그대로 눌러앉아 있는 것은 신이 스스로 도모할 바가 아닙니다.”
(<승정원일기> 고종 32년 8월 16일자, 한홍구 <김가진평전>에서 재인용)

1895년 10월, 동농은 농상공부대신에서 체직(遞職)시켜 달라는 사직소(辭職疏)를 올렸다.

◆세상은 나를 ‘일본당’이라고 손가락질하지만
부패의 온상인 왕실이 왕권 강화를 꿈꾼다는 건 악몽이다. 협력할 자는 권력의 단물을 좇는 자 외에는 없고, 이렇게 되면 백성과 개혁은 그 반대편에 놓인다. <동농 김가진전>의 저자, 김위현 교수는 “민씨 일파는 (갑오개혁이 이루어 놓은) 신제도의 파괴에 착수, 구제도로의 복귀를 시도하고 있었다”라고 썼다. 하물며 왕권 강화의 추진동력이 외세라면? 악몽은 현실의 비극이 된다.
‘청나라당’은 누구나 할 것 없이 ‘러시아당’으로 집결했다. 새로운 얼굴도 합류했다. 이완용(李完用). 그가 고개를 내민 게 이때다. 고종과 민비는 러시아공사 베베르(K. Veber)와 짜고 ‘친러’ 내각을 구성한 뒤, 그를 내무대신으로 발탁했다. 당황한 일본은 홍범 14조 가운데 왕비의 국정 간여를 금지한 조항을 삭제하자며 민씨들의 환심을 사려 했지만, 이제 러시아라는 모피코트를 두른 왕비는 코웃음을 칠 뿐이었다. 다 잡은 토끼를 늑대에게 빼앗긴 여우는 이를 갈았다. 일본은 왕실을 매수하려고도 했다. 박영효를 통해 300만엔(이는 청나라에게 받은 배상금의 1%도 안 되는 금액이다)을 제시했다. 왕비는 “무서운 일”이라며 받지 않겠다고 손을 내저었다(金文子, 김승일 역, <명성황후 시해와 일본인>, p135). 이 일화는 민비를 칭송하는 사료(史料)로 쓰이고 있으나, 따지고 보면 어이없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왕실이 얼마나 돈을 밝혔길래, 신하라는 자가 감히 어전에서 이따위 거간 노릇을 자청하고 나서느냐 말이다.
동농은 삼국간섭 직후 ‘정동구락부(貞洞俱樂部)’에 드나들며 조선에 압력을 가하는 열강들의 세력균형을 모색한 적이 있다. 그러나 그는 정국이 돌아가는 꼴을 지켜보면서, 외세와 왕실 사이에서 줄타기해야 하는 개혁으로는 나라 살리기가 난망하다고 느꼈다. 세상은 나를 ‘일본당’이라고 손가락질하지만, 과연 일본이 동농 김가진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고서 하는 소리일까. 주한일본공사관 서기관 히오키 에키(日置益)는 1895년 6월 25일 본국 정부에 ‘(김가진 등을) 일본 배척파라고 추정해도 틀림없을 것이라고 확신한다’는 내용의 보고서를 보냈다. 일본공사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는 “김가진이 요청한 우선회사(郵船會社) 약정변경 건은 절대 승낙해서는 안 된다”고 엄명을 내렸다(한홍구, <김가진평전>). 동농은 상소를 올린 날 바로 체직되었다.

◆왕비를 시해한 원수의 나라에 공사로 가라고?
갑오개혁의 설계자로서 내각의 핵심요직을 맡아 개혁을 이끌다가, 15개월만에 물러났다. 다음날, 고종은 동농을 중추원(中樞院) 일등의관(一等議官)에 임명했다. 중추원은 이름과는 달리 특별히 하는 일도 없는 국왕의 자문기구에 불과했다. “갑오개혁 이후 내외에서 의회 개설 요구가 제기되기 시작하자 고종은 중추원의 직제를 개편하여 의관이란 자리를 만들고 이를 통해 의회 개설 압력을 무마해보려 했던 것이다.” 한홍구 교수의 분석이다.
동농이 내각에서 물러난 나흘 뒤, 일본은 천인공노할 을미사변(乙未事變, 1895), 즉 ‘명성황후 시해 사건’을 일으켰다. 이 사건은 삼국간섭 이후 조선에 대한 영향력을 만회하기 위해 일본이 저지른 국가적 차원의 범죄였다는 사실을, 재일교포 김문자(金文子) 여사가 <명성황후 시해와 일본인>에서 밝혀낸 바 있다. 일본의 망나니패인 료우닌(浪人)들과 당시 훈련대 2대대장이었던 우범선(禹範善, 우장춘 박사의 아버지)은 하수인에 불과했다. 일본 정부는 여태까지도 사과하지 않고 있다.이날도 대원군이 등장한다. 1년 전 경복궁 점령 사건 때와 같이, 대원군은 또다시 일본군에 업혀 대궐로 들어왔다. 끔찍한 악연(惡緣)에 진저리치면서, 백성들은 노망난 노인네에게 등을 돌렸다. 그런데 엉뚱하게도, 동농이 시해에 책임이 있다는 ‘가짜뉴스’에 시달렸다. 진사(進士) 정성우가 을미사변 당시 농상공부대신이 김가진이었다며, 그를 역적으로 몬 것이다. 고등재판소는 정성우에게 “사실을 속여 거짓말 한 죄”로 3년 유배형과 김가진에게 명예회복금 1천원을 배상하라는 판결을 내렸으나, 동농의 심정은 씁쓸하기 이를 데 없었다.

남아의 사업이 어찌 이리 지체되는가?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시절 때문에 슬플 뿐이네.
나라 위한 붉은 마음은 불처럼 뜨거우니
하늘도 알고 땅도 알고 귀신도 알아주리니
(김가진, <고등재판소술회(高等裁判所述懷)>, 한홍구 <김가진평전>에서 재인용)

을미사변 아흐레가 지나, 고종은 김가진을 일본주차특명전권공사로 임명했다. 동농은 난감했다. 민씨들이 자신을 따돌렸더라도, 왕비는 조선의 국모(國母)다. 제대로 된 나라라면 선전포고를 해야 할 상황 아닌가. 이런 때, ‘일본당’이라고 경원하던 그에게 뒤처리를 부탁하는 조정의 처사에, 동농은 분노했다. 부임을 미루던 그는 사직소를 올렸다.
“(주일공사로 임명받은 직후에 사직소를 제출하지 않은 까닭은) 신이 사방에 사신으로 나가 왕명을 욕되지 않게 할 수 있다고 자부해서가 아닙니다. 그것은 변란을 만난 뒤에 나라의 원수를 아직 갚지 못하여 근심이 온통 가득하여 예의를 차려 사양할 때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승정원일기> 고종 32년 12월 18일 다섯 번째 기사, 한홍구 <김가진평전>에서 재인용)

◆일본의 모함으로 옥에 갇힌 동농
주일공사직을 거두어달라는 상소가 받아들여지자, 동농은 궁중에서 저자로 발걸음을 옮겼다. 1896년 초, 그는 미국에서 돌아온 서재필과 함께 상무회의소(商務會議所) 설립에 나섰다. 상무회의소는 일본의 경제침탈에 맞서 조선의 상권을 지키고 상인들의 권익을 보호하기 위한 단체였다. 이는 개화 정치인 동농의 행보가 대중 속으로 서서히 이동하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동농은 특별회원 자격으로 상무회의소 발족식에 참석했다. 이 자리에서 그는 석유직수입회사 설립을 발의했다. 석유직수입회사 설립은, 앞선 연재에서 서술한 바 있듯이, 그 자체가 반일운동의 일환이었다. 일본은 서재필을 출국시키는 게 여의치 않자(서재필은 미국 국적을 취득하고 있었다), “농상공부대신 시절 공금을 유용했다”는 혐의를 씌워 동농을 구속하도록 일을 꾸몄다. 동농이 구속된 지 며칠 안 돼 아관파천(俄館播遷)이라는 또 다른 정변(政變)이 일어났다. 어차피 모함이었던 데다, 일본의 입김이 사라지자, 그는 곧바로 풀려났다. 그러나, 조선이란 나라의 위신은 완전히 땅에 떨어졌다. 구속되기 전, 동농은 서재필 등과 건양협회(建陽協會) 발족을 서두른 바 있었다. 건양협회는 개혁과 주권 확립을 추동하려는 뜻있는 인사들의 결사(結社)였다. 이 건양협회가 바로 독립협회의 모태가 된다.
정리=최석우 <독립정신> 편집위원·사진=사단법인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 제공

* 이 연재는 김위현 명지대 사학과 명예교수의 <동농 김가진전>(학민사, 2009)과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의 <김가진 평전>(미출간)을 저본(底本)으로 재구성했음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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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미인들의 사교친목단체, 러·佛·英 공사와도 긴밀
정동구락부(貞洞俱樂部)

1894년(고종 31) 서울에서 조직된 구미인들의 사교친목단체. 국내인으로 이 구락부에 가입한 회원은 민영환(閔泳煥)․윤치호(尹致昊)․이상재(李商在)․서재필(徐載弼)․이완용(李完用) 등이었다. 외국인으로는 미국공사 실(J. Sill)과 프랑스영사 플랑시(C. Plancy)를 비롯해 당시 한국정부의 고문으로 초빙된 다이(W. Dye)와 리젠드르(C. Legendre), 선교사 언더우드(H. Underwood)와 아펜젤러(H. Appenzeller) 등이 있었다.
구락부의 주요 회원으로 일본인들이 전혀 가담하지 않은 사실로 미루어, 열강 세력의 성쇠 속에서 친구미파 인사와 주한구미외교관들의 연대를 위한 연락기관으로서의 역할을 행하였던 것 같다. 이들은 러시아․프랑스․미국․영국 등의 외국 공사 및 참사관들과 긴밀한 관계를 가짐은 물론, 고종과 명성황후(明成皇后) 등과도 접촉해 구미세력과의 협력에 노력하였다.
특히 러시아를 비롯해 구미 열강의 힘을 빌려 일본의 침략을 저지하려 했던 고종과 명성황후는 비밀리에 신하들을 이 구락부에 보내 친분을 맺게 하고 또 시종들을 보내어 호의를 보이기도 하였다.


개화독립운동 일환으로 조직, 독립협회 창립의 기반이 되다
건양협회(建陽協會)
갑오경장 당시의 집권 관료들에 의하여 민권 옹호와 정치개선의 촉진이라는 강령하에 개화독립운동 추진의 일환으로 조직되었다. 당초 40여인의 평의원 및 간사들이 서울 계동의 직조국(織造局)에 모여 김윤식(金允植)을 부회장으로 하고, 2월 23일 발기대회를 가지기로 한 바 있다. 그러나 2월 11일 고종의 아관파천으로 말미암아 주요인물인 유길준(兪吉濬)이 일본에 망명하고 김윤식이 제주도에 유배됨에 따라 건양협회는 사실상 유산되고 말았다.
한편, 당시 미국으로부터 돌아와, 갑오경장을 추진하던 정부로부터 신문창간사업의 지원을 받고 있던 서재필(徐載弼)은 아관파천 이후 새로 수립된 내각으로부터도 계속적인 지원을 받아 <독립신문> 발간사업을 추진하게 되었고, 이어 독립협회의 창립을 보게 되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건양협회의 남은 인사들이라고 할 수 있는 한규설(韓圭卨)․김가진(金嘉鎭) 등이 정동구락부의 주요구성원인 민영환(閔泳煥)․이완용(李完用) 등과 함께 계속적인 지원을 해주었던 까닭에, 독립협회 창립의 기반을 건양협회와 정동구락부 및 기타 제3의 개화파관료 등 3개의 흐름에서 파악하는 것이 보통이다.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