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帝國)의 대신에서 민국(民國)의 국민으로
2019-01-14 01:18
동농(東農) 김가진(金嘉鎭) ①벽력대신(霹靂大臣)과 서산대사(西山大師)
연재를 시작하며
우리의 근대는 열강(列强)의 포화로 막이 올랐다. 500년 동안 굳게 잠가놓았던 쇄국의 문이 열리자, 양반은 혼란에 빠졌다. 수구당은 정신을 못 차렸고, 개화당은 뿌리가 없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사대의 종주국이었던 청나라가 흔들리자 조선은 뿌리까지 뽑힐 지경에 처했다. 위기를 타개할 방책이 전혀 없지는 않았겠으나, 백약이 무효한 중병환자처럼 조선은 끝내 망국의 막다른 길로 몰리기 이르렀다.
이 연재는 김위현 명지대 사학과 명예교수의 <동농 김가진전>(학민사, 2009)과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의 <김가진 평전>(미출간)을 저본(底本)으로 재구성했다. 흔쾌히 허락해주신 두 분 선생님에게 감사 드린다.
백운정 몽룡정 앞 김가진[사진=사단법인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 제공]
동농(東農) 김가진(金嘉鎭) ①
벽력대신(霹靂大臣)과 서산대사(西山大師)
1910년, 경술(庚戌) 정월. 인왕산 기슭, 만 평이 넘는 숲이 병풍처럼 두른 대가(大家)의 사랑채. 환갑을 훌쩍 넘긴 노인이 서탁(書卓) 앞에 좌정한 채 글을 쓰고 있다. 희로애락을 엿보기 힘든 유현한 눈빛. 범상치 않은 기도(氣度). 획마다 절도와 기개가 서렸건만, 글의 내용이 심히 괴이하다.
“망상(妄想)이 생기면 광증이 발동하여 고함을 치고 뛰곤 하였다. 내적으로 견디기 어려운 고통이 있어 선정(禪定)을 하여 겨우 진정시키곤 하였다.”
노인은 지금 자신의 삶을 되새김하는 중이다. 고관대작의 자리에서 국사(國事)를 주관했음이 틀림없는 그가 광질(狂疾)에 시달렸다니…. 병마(病魔)는, 그가 마흔둘이 되던 해인 고종 24년(1887), 그의 뇌수를 파고들었다. 이어지는 그의 독백.
“막 고함치고 할 때는 귀물(鬼物)이 내 입을 빌려, ‘나는 벽력대신(霹靂大臣) 옹귀비(雍鬼飛)다’라고 하고, ‘너와는 전생에 원한이 있어서 너를 해하려 하지만, 너는 서산대사(西山大師)의 후신으로 선력(禪力)에 꺾여 부득이 손을 쓰지 못한다. 몇만 년에 너를 해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하였다.”
벽력. 우리는 이 단어를 기억해야 한다. 노인이 이 글을 쓰기 5년 전, 조선왕조의 심장인 경복궁에 벽력이 떨어졌다. 그 기막히고 부끄러운 순간을, 매천(梅泉) 황현(黃玹, 1855~1910)은 그의 <야록(野錄>에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을사(乙巳) 11월 9일, 일본은 군대를 동원하여 조선의 왕궁을 포위하고는 이등박문, 임권조(하야시 곤스케, 일본공사), 장곡천(하세가와 요시미치, 조선주차군사령관)이 을사오적 이완용, 박제순, 이근택, 권중현, 이지용을 앞세워 보호조약을 강요했다. 구완희가 위협하며 말했다. ‘이러시면 벽력(霹靂)이 떨어집니다.’ 임금이 벌벌 떨면서 결단을 내리지 못했다.”
바다를 건너온 군함과 대포 앞에서, 암군(暗君)과 간신(奸臣)은 제 한 몸 건사하기 바빴다. 속절없이 무너진 500년 왕조의 비정(秕政)은 멍에가 되어 백성의 어깨를 짓눌렀다. 노인의 뇌수를 파고들었던 벽력대신 옹귀비. 그것의 정체는 바로 외세였다. 서세동점(西勢東漸)의 파도. 타고 넘을 것이냐, 휩쓸려 가라앉을 것이냐. 역사의 갈림길에서, 그는 평생 몸부림쳤다.
구한말의 명신(名臣)으로 개화를 설계하고, 망국의 한을 곱씹다 상하이로 망명해 대한민국임시정부의 큰 어른으로 일생을 마감한 동농(東農) 김가진(金嘉鎭). 그의 일흔일곱 해는 양반의 아들로 태어나 민국의 국민으로 거듭나는 치열한 자기부정의 길이었다. 노인을 괴롭힌 광질은 어쩌면 뼈저린 고심(苦心)과 분망(奔忙)의 반면(反面)이 아니었을까.
# 미몽(迷夢)의 시대에서 깨어나
조선은 사대(事大)하는 나라였다. 어떤 이는 국토와 백성을 보전하기 위한 선택이었다고 말한다. 하지만, 선의는 반드시 선행으로 끝나지는 않는 법. 사대는 그 시스템이 작동하는 순간, 지배층부터 타락시킨다. 왕조란 본디 외침과 내환으로 위태롭기 짝이 없는 존재이거늘, 그 안녕을 외세에 맡긴 양반이 의무를 질 리 없다. 국방과 생산은 백성 책임이고, 교육은 ‘자기들만의 리그’가 된다.
왜란(倭亂)과 호란(胡亂)은 양반에게 돌이킬 수 없는 학습효과를 제공했다. 명나라가 구해준 왕조의 존속을 명나라를 멸망시킨 청나라가 보증했다. 척화파(斥和派)가 지키려던 게 겨레의 얼이 아니라 종묘의 권위였듯이, 주화파(主和派)가 살리려던 것 역시 백성의 삶이 아닌 신분의 장벽이었을 뿐이다. 아랫것들이야 도탄에 빠지든 말든, 사대의 동아줄만 놓치지 않으면 왕조사회의 꿀은 영원히 그들 차지라는 것인가.
그러나 제국주의의 시대는 달랐다. 근대(近代)라는 이름의 신문명은 조공(朝貢) 대신 시장을 요구했다. 당연히 마음대로 쥐어짤 영토를 노렸다. 그것은 조선의 지배층이 이제껏 단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새로운 질서였다. 중화(中華)가 천하의 중심이 아니라는 사실이 분명해졌음에도, 그들은 여전히 소중화(小中華)의 미몽(迷夢)에 빠져 있었다.
동농 김가진은 헌종 12년(1846) 정월 29일(양력 2월 25일), 홍문관(弘文館) 교리(校理) 김응균과 함안 박씨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김위현 명지대 사학과 명예교수가 집필한 <동농 김가진전>에 따르면, “그는 이미 16세 때 경(經)․사(史)․자(子, 제자백가의 저술)․집(集, 시문집)에 통달한 사람이라 하여 칭찬이 자자하였다.” 이로 미루어보건대, 동농의 자질과 식견은 또래 중 으뜸이었던 듯하다.
이처럼 유가(儒家) 지식인으로 입신을 꾀하던 그가, 느닷없이 일본어를 배우더니 중국어와 영어까지 습득하겠다고 나섰다. 양반의 자손에게는 파격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이 선택이 동농을 외교관의 길로 이끌었다.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統理交涉通商事務衙門) 주사(主事)로 출발해, 인천항 개항과 통상 실무를 맡았고, 청나라 텐진(天津) 주재 종사관(從事官)과 주일공사관 참찬관(參贊官)을 거쳐, 주일 특명전권공사로 발탁돼 자주외교를 펼쳤다.
동농은 또한 산업의 중요함을 일찌감치 깨달은 선각자였다. 전보총사(傳報總司) 설립을 건의하고, 전선을 가설해 외국과 통신을 최초로 연결했고(고종 22년, 1885), 우체국을 열었다(고종 32년, 1895). 종목국(種牧局)을 설치(고종 23년, 1886), 마장리와 청파에 사육장을 두고 외국에서 수입한 말과 소, 양, 돼지 등을 키우게 하는가 하면, 양잠회사를 세워 사장에 취임(광무 3년, 1899), 수천 명의 양잠 기술자들을 길러냈다.
이 시기의 동농은 가히 동도서기(東道西器)의 총아(寵兒)라 불릴 만했다. 고종은 그를 각별하게 신임했다. 공조참의(1889), 승정원 동부승지(1890)를 잇달아 제수하고, 병조참판과 이조참판(1894)으로 갑오경장(甲午更張)을 뒷받침하도록 했으며, 공무대신서리(1894)에 이어 농상공부대신(1895)에 임명했다. 비원(祕苑)의 중수(重修)를 맡기고, 남은 자재는 그의 별장 백운장 개축에 쓰도록 하사했다. 동농은 고종이 가장 믿었던 대한제국의 신하 중 한 명이었다.
그러나 왕조의 태양은 이미 기울고 있었다. 아편전쟁(1840~1842) 패배로 서양 열강의 먹잇감 신세가 된 청나라는 중화는 고사하고 동북아시아의 패권조차 일본으로부터 위협받는 지경에 이르렀다. 김옥균의 개화당은 갑신년(甲申年, 1884)의 덧없는 피를 뿌리고, 고종에게 입헌군주제의 트라우마만 안긴 채 역사의 미아(迷兒)가 되어 사라졌다.
# 제국의 대신에서 민국의 국민으로
그렇다면, 갑오년(甲午年, 1894)의 농민군과 손을 잡을 수는 없었을까. 사대에 찌든 조선에서는 성립 불가능한 시나리오였다. 청나라 출병 요청이 부를 일본군의 개입을 두려워하는 척신(戚臣) 민영준(閔泳駿)에게 민비는 이렇게 일갈했다. “용렬한 놈! 내가 차라리 왜놈의 포로가 될지언정 차마 다시 충주로 가는 것(임오군란 때 궁녀의 옷을 입고 충주 장호원으로 피신했던 일)은 참을 수가 없다.” 구한말의 역사가 김택영(金澤榮)이 쓴 <한사경(韓史綮>의 한 대목이다.
이런 세계관의 소유자들이 군림하는 한, 왕조의 몰락과 망국은 동시에 닥칠 게 뻔했다. 국제정세에 밝은 동농이 이러한 사태의 전개를 예측하지 못했을 리가 없다. 그 자신도 양반의 자손이건만, 그들이 쌓은 업(業)이 낳을 파국의 순간이 시시각각 다가오고 있었다. 광질에 시달릴 정도로 절망하면서도, 그는 자신의 소임을 미루지 않았다. 백성의 짐을 덜어주려 한결같이 애썼고, 교육에서 나라를 구할 빛을 찾았다.
황해도관찰사(1897) 시절 공립소학교를 개교했고, 충청남도관찰사(1906) 때는 군(郡)마다 학교를 설립하도록 독려했다. 기호흥학회(畿湖興學會)에 참여해 기호학교를 세우고(1907), 친일의 주구(走狗) 일진회(一進會)에 맞선 대한협회(大韓協會)의 회장(1908)으로, 사립학교 설립운동과 교과서 편찬운동을 전개했다. 전근대적 형법을 혁파한 주역 역시 법부대신(1904) 동농이었다.
동농은 글씨로도 유명했다. 독립문 현판을 쓴 그다. 동농은 을사년의 치욕을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동농 김가진전>은 그가 민영환(閔泳煥)과 자결을 상의했으나, 가족의 감시로 결행하지 못했다고 쓰고 있다. 만일 그날 경복궁 그 자리에 그가 있었다면, 참정대신(參政大臣) 한규설(韓圭卨)과 함께 ㅇㅇ대신 김가진의 이름이 남았으리라. 하지만 대신에서 물러난 뒤였다. 우연인지 필연인지, 이 엇갈림이 환갑을 넘긴 노인에게 반전(反轉)을 준비할 시공간을 허락했다.
1908년 규장각(奎章閣) 제학(提學)을 끝으로, 동농은 초야로 물러났다. 규장각 검서관(檢書官)으로 관직에 오른 게 고종 14년(1877)이므로, 32년 동안이다. 이 기간은 동농 개인에게는 개화에 전력을 기울이며 대한제국의 대신으로 몸을 일으킨 세월이었지만, 나라는 쇠락을 면치 못하고 끝내 멸망의 종지부를 찍었다. 돌이켜보면 허망한 노릇이었다. 제국은 신기루요, 짐(朕)은 잠꼬대에 불과했다.
동농은 칩거에 들어갔다. 의병에 가담치도 아니하고, 간도로 떠나지도 아니했다. 일제가 남작(男爵)의 작위를 수여하자, ‘너희들 마음대로 하라’며 아무 대응도 하지 않았다. 마치 매사에 체념한 듯했다. 단 하나뿐인 재산인 백운장을 왜놈의 농간에 빼앗기고, 경제적으로도 쪼들렸지만, 연금은 일절 거부했다. 과거의 동료 대신 가운데 그의 심중에 무엇이 들었는지 짐작이라도 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낙백(落魄)의 세월, 10년이 지났다. 자신을 아껴주던 고종이 승하하고, 독립만세의 함성이 전국 방방곡곡에 울렸다. 그래도 동농은 움직이지 않았다. 만세운동의 불이 아직 꺼지지 않던 기미년(己未年) 4월, 한 사나이가 찾아왔다. 전협(全協)이라고 성명을 밝힌 그는 일흔넷의 동농에게 민족대동단(民族大同團) 총재를 맡아달라는 것이었다. 민족대동단은 비밀독립결사였다.
그로부터 여섯 달 뒤, 동농 김가진은 아들 김의한(金毅漢)의 부축을 받으며 압록강 건너 안동(安東)행 열차에 노구(老軀)를 실었다. 목적지는 상하이 대한민국임시정부. 망국의 대신으로 살기보다 민국의 국민으로 죽겠다는 동농의 마지막 선택이었다. 임정은 그를 27년 역사에서 단 한 명뿐이었던 고문으로 추대했다.
독립운동에 뛰어든 양반은 많다. 그러나 대신을 지낸 인사 중에서는 동농이 유일하다. 관직 생활 내내 고종의 은혜를 받았으나, 그는 왕조를 다시 살리는 복벽(復辟)에는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망명 직후부터 눈을 감을 때까지, 동농은 오직 임시정부를 지지하고 따랐으며, 이로써 제국과 민국 사이에 계승과 발전이라는 끊어지지 않는 역사의 다리를 놓을 수 있었다. 그것이 바로 민족이 그에게 부여한 최후의 사명이었다.
동농은 양반의 자손으로 양반이 남긴 최악의 적폐인 사대를 뛰어넘었다. 외교관이었던 그가 ‘외교론’에는 고개를 저었다. 독립은 어디까지나 우리 손으로 쟁취해야 한다는 게 동농의 일관된 태도였다. 종형제인 백야(白冶) 김좌진(金佐鎭, 1889~1930) 장군이 이끄는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에 합류하려고 노심초사했던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동농 김가진(1846~1922). 그는 어떤 인물이었을까. 그의 성취는 무엇이고, 그의 한계는 무엇일까. 임시정부가 꿈꾼 나라가 100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현재진행형이듯, 동농의 삶은 오늘 우리의 삶과 맞닿아 있다. 지금부터 우리는 그를 만나는 시간여행을 떠난다.
* 이 연재는 김위현의 <동농 김가진전>(학민사, 2009)과 한홍구의 <김가진 평전>(미출간)을 저본(底本)으로 재구성했음을 밝힙니다.
정리 = 최석우 <독립정신> 편집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