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효백의 新경세유표 10-1] 문제 많은 ‘애국가’를 접고 새‘國歌’를 펴자

2019-01-31 06:00
애국가 작사가='친일파' 윤치호
대한제국 3대 망국 조약 체결자

강효백 경희대학교 법학과 교수

"모든 애국가는 하나의 양보할 수 없는 최소 요건을 요구한다. 멜로디나 가사의 우월성이나 높은 .미학적 수준에 있다기보다, 만든 이가 최소한 ‘애국적’이어야 한다."
<이해영, 『안익태 케이스 - 국가 상징에 대한 한 연구』, 삼인, 2019>

"새로운 100년엔 새로운 국가(國家&國歌)를 만들자." <강효백 경희대 법무대학원 교수>


애국가의 작사가는 윤치호가 확실한데 왜 공식적으로는 ‘미상’일까?

나는 음치다. 이는 생애 최초로 공개하는 나의 치명적 약점 ‘커밍아웃’이다.

‘하면 된다’고? 아니더라. 아무리 해도 안 되는 것도 있더라. 천성이 영민하지 못한 필자는 “영원한 고3처럼 공부하다 죽겠노라 내 이름은 영고삼”을 외치며 노력을 중시한다. 하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안 되는 건 안 되더라. 돌아가면서 노래를 꼭 불러야 하는 자리에 가면 언제나 좌불안석. 자연히 노래의 멜로디보다 가사를, 작곡자보다 작사가를 중시한다. 일종의 도피이자 부득이한 ‘선택과 집중’이다. 그래서 필자는 아주 오래전부터 몇 가지 감상과 의문을 품어왔다.

모든 노랫말 가사 중에 애국가 가사가 가장 ‘졸작’이라는 다소 ‘불경스러운’ 감상이다. 한 나라의 모든 지(知)와 정(情)을 함축하는 애국가를 이처럼 애국가답지 않게 작사한 이는 도대체 누구일까? 그리고 왜 애국가의 작곡가는 안익태인데 작사자는 (공식적으로는) ‘미상’일까?

1956년 8월 31일 대한민국 국사편찬위원회는 윤치호를 애국가 작사자로 최종 결론 내렸다.

그보다 앞서 1955년 7월 28일 국사편찬위원회 애국가 작사자 조사위원회 제3차회의는 윤치호를 작사자로 잠정 결론 내렸다. 16개월 간의 조사 결과다. 조사위원 19인 중 13인이 출석한 자리에서 작사자를 윤치호로 확정 발표하자는 것에 대해 표결을 했다. 결과는 윤치호 확정 11 대(對) 미확정 2로 나왔다.

이후 국사편찬위원회는 윤치호 자필 애국가 가사지(1907년 작)의 진위에 대한 감정을 받기도 하고, ‘찬미가’를 공개적으로 찾는 등 노력을 기울였다. 그 결과 다음과 같은 최종 결론 내렸다.

“윤치호씨로 결론, 애국가 작사자에 종지부, 국사편찬위원회 불원 문교부 장관에게 보고하리라 한다.”(국도신문國都新聞 1956.8.31.)

그러나 후일 국사편찬위원회는 ‘작사자 미상’으로 결론을 미뤘다. ‘윤치호 작사’로 결정했을 경우 후폭풍을 우려한 때문이라는 소문이 나돌았다. 윤치호의 ‘친일행적’ 을 문제 삼는 사람들 때문에 그대로 작사자 미상으로 처리했다는 것이다.

사실 애국가의 작사자=윤치호가 확실한 결정적 증거(스모킹 건)는 수십 가지가 넘는다.

그중 손이 가는 대로 15개만 들면 이렇다.

①1895년 윤치호 일본공사 주최 조선독립경절회식 통역
②1896년 윤치호 러시아황제 대관식 참관, 군악대의 위용, 국가상징 인식 계기
③1896년 독립협회·협성회·배재학당·독립문정초식(황실가·무궁화가) 윤치호 관련
④1907년 윤치호 YMCA 정초식 행사 통역, 애국가 연주
⑤1908년 윤치호 역술(譯述) 재판『찬미가』<14 Patriotic Hymn>(애국가) 수록
⑥1909년 이기재 소장 창가집, 윤치호 작사로 표기
⑦ 1910년 신한민보 <국민가>, 동일 가사 4절 작사자 ‘윤티호’ 표기
⑧1915년 <경기도경무부보고> 취조 기록에 ‘윤치호 舊作 애국가’ 언급
⑨ 1925년 동아일보, “동해물과···”를 언급하며 ‘윤치호 애국가’로 표기
⑩ 1920년대말 김종만 소장 가사집, 애국가 ‘윤선생 치호’로 표기
⑪1931년 LA 한석원목사 편저 <세계명작가곡집- 무궁화> 애국가 윤치호 작사 표기 (‘애국가의 작사는 윤치호 확정되나’ [조선일보] 2004.8.15.A24면 참조)
⑫1945년 윤치호, 애국가 4절에 ‘1907년 윤치호作’ 자필 남김
⑬1952년 E R Griffith 편저 재판『National Anthems』에 Chi-Ho Yun로 표기
⑭1954년『Korea Land of Song』에 ‘Korean Words of YunChi-Ho’ 표기
⑮ <독립기념관 자료> 애국가는 고종의 명령을 받은 윤치호(1864~1945)가 1904년 또는 1907년에 노랫말을 썼다. 영국 해군함이 아시아를 순방하다가 조선 제물포에 입항하면서 국가연주를 위한 악보를 요청했다. 그런 것 없던 때이므로 고종은 당시 외부협판(외무부 차관) 윤치호에게 애국가 작사 칙령을 내렸다.
(이상 김연갑, [애국가 작사자 연구], 집문당, 1998 참조)

윤치호 자필 애국가 작사, 미국 에모리 대학 소장 원본 [자료제공=강효백 교수]


이 외에도 애국가 작사자=윤치호’를 입증하는 데이터는 천지사방에 널려 있고 계속 나오고 있다.

무엇보다 국사편찬위원회가 1956년 8월 31일 ‘애국가 작사자=윤치호’로 최종결론을 낸지 60여년이 지났는데도 왜 여전히 작사자 미상일까?

애국가의 작사자가 친일파라는 것을 공표함에서 오는 사회적 파장이 두려웠을까.

작곡가 안익태가 확실한 친일·친나찌로 밝혀진 상황에서 현재 가장 개연성 높은 윤치호가 작사가로 인정된다면 애국가 자체가 100% 친일파들이 만든 것이 되어버린다. 그렇다고 사료가 훨씬 빈약한 다른 인물을 내울 수는 없고 작사가 만이라도 논란을 피하기 위해 환갑이 넘도록 미상으로 남겨두는 것은 아닐까. 홍길동이 아버지를 아버지로 못 부르는 까닭과 애국가 작사자를 윤치호라 못하고 공식적으론 '미상'(성은 미? 이름은 상?)이라 하는 까닭은 같은 걸까. 도대체 윤치호의 친일행적이란 무엇인가?

[자료제공=강효백 교수]


◆[친일인명사전] 속의 윤치호는 누구인가?

민족문제연구소가 2009년 10월에 펴낸 [친일인명사전] 제2권 697~702쪽에 장장 6쪽(이완용과 같은 분량)에 걸쳐 기재된 윤치호의 이력을 중심으로 살펴보자.

윤치호는 1866년 12월 21일 충청남도 아산에서 태어났다. 대한제국의 군부대신을 지내고 합병후 남작 작위를 받은 윤웅렬(尹雄烈, 1840~1911)의 장남이다. 윤웅렬은 1908년 국채보상지원금 총합소 소장으로 있으면서 모금한 4만2000원 (현재가 약 120억원)을 가로채 일본 경무총감부에 상납했다. 합병직후인 1910년 10월 조선 귀족령에 따라 남작 작위를 받았다([친일인명사전 제2권] 684-685쪽) 윤웅렬 윤치호 부자(父子)가 함께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된 매우 보기 드문 이른바 ‘친일혈통’이다.

15세까지 사숙(私塾)에서 한학을 배운 윤치호는 1881년 4월 신사유람단의 일원인 어윤중의 수행원으로 일본에 건너갔다. 그해 5월 도쿄 도진샤(同人社)에 입학하여 1년간 어학을 공부했다. 1883년 4월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 주사에 임명 이듬해 1884년 10월 참의교섭통상사무(외교부 국장급)에 임명되었다. 그해 12월의 갑신정변이 실패하면서 친분이 있던 개화파들이 역적으로 몰리자 1885년 1월 중국 상하이로 피신하여 1888년 8월까지 영어와 근대학문을 배웠다. 1988년 10월 미국으로 건너가 조지아주 에모리(Emory)대학에 입학하여 1893년 졸업하였다. 1895년 2월 귀국하여 의정부 참의에, 4월 내각 총리대신 비서관 겸 내각 참서관에, 5월 학부협판(교육부 차관)에, 6월에 외부협판(외교부 차관)에 임명되었다.

1897년 7월 독립협회에 참여하여 1898년 2월 부회장을 맡았고 같은 해 3월 의장대리를 맡았다가 8월부터 회장을 맡았다. 1898년 3월 독립신문 사장과 주필을 겸했다. 1898년 12월 한성부 판윤(서울 시장)에 임명됐고 한성부재판소 수석 판사를 겸했다. 그후 원산, 함흥, 천안, 무안 지방수장을 맡다가 1904년 3월 외부협판에 재임명되었다. 같은 해 8월 외부협판 겸 외부대신서리를 맡아 1904년 8월 22일 이른바 제1차한일협약(갑진늑약, 앞으로 ‘갑진늑약’으로 칭함)을 체결하였다.

◆대한제국 3대 망국 조약 체결자- 윤치호의 영원히 용서받을 수 없는 죄

대한제국의 사망일은 1910년 8월 29일이 아니라 1904년 8월 22일이다. 즉 이완용이 체결한 합방조약(경술국치)은 장례일 뿐. 윤치호가 체결한 갑진늑약이 사망일이다. 갑진늑약으로 일본의 1개 사범학교 교사가 한국의 교육부 장관을, 일본의 1개 대장성(재무성)국장이 한국의 재무부 장관을, 일본의 1개 부(副)무관(중령)이 한국의 국방부 장관을, 일본의 1개 경시(총경)가 한국의 경찰청장을 감시하고 통제하는 고문관을 맡아 대한제국은 이미 망한 거나 다름없게 되었다.
 

[자료제공=강효백 교수]


광무 8년(갑진년) 1904년 8월 22일 외부대신 서리 윤치호와 주한 일본공사 하야시 곤스케(林權助)가 갑진늑약을 체결했다.

갑진늑약 이후 대한제국 정부는 일본제국이 추천하는 고문관들과 협의를 거친 후에야 관계사항을 처리할 수 있었다. 재정고문으로 파견된 자는 당시 일본제국 대장성 수세국장인 메가타 다네타로(目賀田種太郞)였다.

그는 부임 직후 재정·화폐개혁을 단행하여 한국경제를 식민지구조로 변화시켰다. 외교고문으로는 친일 미국인 더럼 스티븐스가 파견되었고, 군사고문으로는 주한 일본공사관 부무관(副武官)으로 근무하던 노즈 진부(野津鎭武), 경무고문에는 일본 경시청 경시(警視, 지금의 총경에 해당)로 근무하던 마루야마 시게토시(丸山重俊), 궁내부고문에 가토 마스오(加藤增雄), 학부고문에는 동경고등사범학교 교사로 재직 중이었던 시데하라(幣原坦)등 각각 여러분야에 일본제국이 이들을 추천 임명하게 했다. 이들 고문관들과 함께 보조관이라는 명목으로 10~100여 명의 일본인이 파견되어 대한제국의 모든 내정들을 간섭하고 통제하였다. 갑진늑약으로 이미 대한제국 정부는 이름만의 정부일 뿐, 실권은 일본인의 고문관들이 장악하였다.

1905년 11월 17일 을사늑약(제2차한일협약)이 체결되었다. 윤치호가 을사오적(박제순 외부대신, 권중현 농상부대신, 이근택 군부대신, 이완용 학부대신, 이지용 내부대신)에 포함되지 않은 까닭은 무엇일까? 윤치호는 을사늑약 체결 당시 대신(장관)이 아니고 협판(차관)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을사늑약 역시 외부협판 윤치호는 일본 측과의 교섭 협상 보호조약 문안 작성과 체결 등 전 과정 최고 실세였다. 을사늑약 서명자 박제순은 외부대신(외교장관)에 임명(1905.9.17.)된지 불과 50일일 뿐. 박제순은 초기에 참정대신(총리) 한규설과 반대입장을 표명하는등 늑약 체결에 적극적이지 않았다([친일인명사전] 제2권 114~115쪽).

을사늑약 체결 직후 박제순이 참정대신으로 승진하자 윤치호는 외부대신서리가 되었으나 한 달후 쯤 관직에서 물러났다. 국내 대다수 문헌에는 ‘윤치호가 을사조약이 강제로 체결되자 이에 대한 반발로 자진해서 사퇴 한 것’으로 적고 있는데 사실은 전혀 아니다. 윤치호의 외부대신서리 사퇴는 을사늑약에 따라 1906년 1월 외부가 폐지되었기 때문이다([친일인명사전] 제2권 698쪽).

<10-2, 10-3에 계속 예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