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또 김가진, 세금·형벌 적폐청산

2019-01-24 18:06
동농(東農) 김가진(金嘉鎭) ⑩ 외교관에서 안동부사로

[덕휘루 현판[사진 = 사단법인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 제공]]



고종은 김가진에게 계속해서 은전(恩典)을 내렸다. 고종 26년(1889) 1월에는 공조참의(工曹參議), 고종 27년(1890) 1월에는 승정원 동부승지(同副承旨)에서 우부승지(右副承旨)로 관직을 더해주었다. 주일대사를 상공부 상역국장 및 청와대 외교안보비서관으로 겸임 발령낸 셈인데, 이 일을 다 하라는 건 아니고, 힘을 더 실어주겠다는 뜻이다. 민씨들의 경계심이 높아졌다. 1890년 1월, 고종은 일시 귀국한 그를 불러 바깥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물었다. 조선왕조실록에 그 기록이 남아 있다.

“일본에서는 의회(議會)를 설립한다고 하는데 과연 그런가?”
“과연 그런 의논이 있었는데, 올겨울에 상의원(上議院)과 하의원(下議院)을 설립한다고 합니다.”
“그 나라(일본)의 군무(軍務)와 재정(財政)의 규모는 어떠한가?”
“군사에 관한 정사는 한결같이 서양의 법을 따르는데 육군(陸軍)은 정예롭고 강하기가 비길 데 없고, 해군(海軍)도 어느 정도 정비되었습니다. 재정은 매년 연말에 한 해의 수입과 지출에 대한 예산을 세워 비용을 낭비하지 않기 때문에 언제나 모자라는 일이 없습니다.”
(<고종실록> 27권, 고종 27년 1월 22일 첫 번째 기사)

이 대화를 전해 들은 민씨들은 놀랐다. 그들은 왕이 그저 도장이나 찍어주는 존재로 남아 있기를 바랐다. 그런데 뭐라고? 의회? 군무? 재정? 심지어 고종은 나랏돈 장부를 일본에서는 누가 관리하느냐고 물어봤다 하지 않는가. 위험한 자다. 그대로 놔둬서는 안 되겠다. 하지만, 왕의 신임이 워낙 돈독하니 어쩐다? 일단, 지방관으로 밀어내기로 의견을 모았다. 고종에게 보고를 마치고 임지로 복귀해 직무를 막 재개하려는데, 교지(敎旨, 4품 이상 관리에게 주던 임명장)가 도착했다. 여주목사(驪州牧使) 겸(兼) 진관병마첨절제사(鎭管兵馬僉節制使) 겸(兼) 내무부사참의(內務府事參議) 겸대(兼帶) 판사대신(辦事大臣). 군직(軍職)에 조정 요직까지 요란하게 겸(兼) 자(字)가 붙어 있지만, 내용인즉 왕 곁을 떠나 찌그러져 있으라는 소리다.

◆ “십년 세월 분주히 보내면서 온갖 실마리만 만들었는데”
판사대신, 즉 주일공사를 겸하게 된 것은 고종이 난색을 표시한 때문으로 여겨진다. 하기는, 고종 스스로가 동농에게 승지(承旨) 직을 겸임하게 한 것 역시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정상적인 인사정책은 아니다. 이와 관련, 한홍구 교수는 “(김가진의 겸임 발령은) 당시 정부가 상주공관장의 역할을 외교관보다는 특사 정도로 이해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시간을 잠시 뒤로 돌려보자. 고종이 김가진을 일본에 보내면서 내린 밀명 중의 하나는 김옥균들의 동태를 살펴 보고하라는 것이었다. 제거까지는 확인할 길이 없으나, 감시를 명받은 것은 확실하다. 앞에서 썼던 대로, 김가진과 김옥균은 한 집안에, 개화사상을 공유하는 사이였다. 갑신정변으로 엇갈린 운명의 길을 걷게 된 두 사람이, 이번에는 감시하는 쪽과 감시당하는 쪽으로 다시 만나게 되었다.
김옥균은 일본 정계의 거물들과 친했다. 지사(志士)로 대접받았다. 굳이 뒤를 캐지 않더라도, 조선공사라면 어떤 식으로든 마주치게 되어 있다. 두 사람은 만났을 것이고, 이국(異國)의 이름 모를 술집 외진 방에서 잔을 기울이며 조선의 현실과 국제정세를 논했을 것이다. 한홍구 교수는 <김가진 평전>에서, 김가진과 김옥균이 동농의 일본 부임으로 “다시 가까워졌다”고 썼다. 두 사람이 민씨 적폐 청산에 공감했음은 불문가지다. 배후에 민씨들의 입김이 서려 있었다 해도, 왕명은 지엄한 것. 동농은 짐을 꾸렸다. 일본 외무대신 아오키 슈조로부터 송별의 글을 받고, 그는 자신이 자리를 비우는 동안 직무를 대신할 판사대신 서리를 잘 부탁한다는 답신을 보냈다. 동농이 귀국한 4월 말까지, 도쿄에서는 괄목상대할 만한 기백과 국량(局量)을 보여준 조선공사를 떠나보내는 환송연이 여러 차례 열렸다. 이 모임들은 일본 정계의 실력자나 미국공사 등 각국 외교관이 돌아가면서 주최했는데, 이것만 보더라도 동농이 도쿄 외교가에서 어떤 위치였는지 알 수 있다.

십년 세월 분주히 보내면서 온갖 실마리만 만들었는데
청심루에 올라가서 즐겁게 한바탕 웃었네.
(김위현, <동농 김가진전>, p152)

여주목사로 부임한 동농이, 여주군 서남쪽 남한강변의 청심루(淸心樓)에 올라 지은 시다. “십년 세월 분주히 보내면서 온갖 실마리만 만들었는데”라는 첫 구(句)가 의미심장하다. 이제 겨우 반청(反淸) 자주외교와 개혁의 포석(布石)을 깔았는데…. 그로서는 외척에게 휘둘리는 유약한 주군이 못내 안타까웠으리라.
◆ 송덕비(頌德碑)
동농은 심기일전, 업무 파악에 들어갔다. 요즘 잣대로 보자면 ‘목민(牧民)’이라는 단어가 심히 떨떠름하지만, 어쨌든 그 시대 목민관의 첫째 가는 덕목(德目)은 백성을 어루만지는 것. 터무니없이 과중한 세금에 허덕이는 백성들이, 여주목사 김가진의 눈에 들어왔다. 동농은 도결(都結, 조선 말기 아전들이 고을 곳간이나 군포를 사사로이 축낸 뒤 다시 채워 넣기 위해 농지세를 더 물리던 관행)부터 혁파했다.
아전들이 약탈한 백성의 피와 땀은 결국 민씨들을 위시한 세도가들에게 상납(上納)되었으니, 지방관 누구도 손대려 하지 않았던 게 도결이었다. 이어서 그는 대동미(大同米)를 돈으로 바치게 해달라는 주청(奏請)을 올려 고종의 윤허를 받았다.

의정부(議政府)에서 아뢰기를, “이제 경기감사(京畿監司) 이헌직(李憲稙)이 보고한 것을 보니, 여주목사(驪州牧使) 김가진(金嘉鎭)이 보낸 첩정(牒呈)을 일일이 들어 아뢰기를, ‘본주(本州)는 여러 가지 일과 공사가 다른 읍(邑)에 비하여 많기 때문에 대동법(大同法)에 의한 조세(租稅)를 이미 상정가(詳定價)로 쳐서 돈으로 바치게 했는데, 이제 그 기한이 차게 되니 백성들이 어쩔 줄 몰라 하므로 3년을 기한으로 다시 상정가로 쳐서 돈으로 바치게 하여 주소서.’ 하였습니다. 정공(正供)에 대한 문제를 요청하는 대로 선뜻 윤허하는 것은 일의 원칙으로 보아 매우 신중하게 해야 할 일이지만, 본 주는 다른 곳에 비해 유별하고 백성들의 힘이 아직도 많이 피지 못했으니, 다시 3년을 기한으로 상정가로 쳐서 돈으로 바치게 하여, 극진히 염려하는 조정의 혜택을 보여주라고 분부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고종실록> 27권, 고종 27년 7월 26일 두 번째 기사)

동농이 다음 임지로 떠난 뒤, 백성들은 송덕비를 세워 어진 사또를 칭송했다.


 

[동농이 쓴 봉정사 현판[사진 = 사단법인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 제공]]






◆ 안동에서
여주로는 안심할 수 없었던지, 민씨들은 김가진을 더 먼 곳으로 내치려고 수작을 부렸다. 어디가 좋을까. 욕심 같아서는 북쪽 끝 경흥부사(慶興府使)나 남쪽 끝 제주목사(濟州牧使)로 치워버리고 싶은데, 명분이 없다. 가만, 김가진이 안동 김씨지? 그래, 안동으로 보내버리자. 서얼 출신에게 금의환향(錦衣還鄕)의 영광을 주겠다는데, 왕도 반대하지는 못하겠지…. 1891년 3월, 김가진은 안동대도호부사(安東大都護府使)로 전출되었다.

재주를 부리다 벌 받음은 아버님을 이었네.
강산은 예나 다름없으나 인정은 이미 변해졌으니
관배(官盃)를 잡고 땅거미 질 무렵 난간에 기대 서 있구나.
(김위현, <동농 김가진전>, p153)

동농이 안동으로 떠나며 읊은 <부임안동부(赴任安東府)>라는 시의 마지막 구절이다. 어느덧 그의 나이도 오십줄을 바라보게 되었다. 숨돌릴 시간이 필요했다. 어머님 묘소에 절을 올린 김에, 봉정사에도 들렀다. 주지 스님이 반겨 맞으며 현판 써주기를 청한다. 코흘리개 가진의 단식에 감동해 어머님 모실 곳을 선뜻 내어준 그 봉정사다. 동농은 이 기회에 마음의 빚을 갚기로 했다. 그가 선선히 고개를 끄덕이자, 사미(沙彌, 계를 받고 불도를 닦는 중인 소년 승려)가 지필묵을 바친다. 모두 새것이다. 절집과 인연이 있는 신임 사또가 명필이라는 소문을 듣고 단단히 준비한 눈치다. 동농은 흔쾌히 붓을 들어 “天燈山鳳停寺” 여섯 글자를 써주었다. 시주의 밝은 안색에 안심한 주지가 덕휘루(德輝樓) 석 자만 더 써 달란다. 기꺼운 마음으로 부탁에 응했다.
다음 해 봄, 안동에 가뭄이 들었다. 모심기를 끝낼 철임에도, 비 한 방울 내리지 않는다. 왕조사회의 전통적인 대책은 기우제(祈雨祭)였다. 동헌(東軒) 서고(書庫)를 뒤져, 전임 부사였던 선친이 기우제를 실행한 문서를 찾아냈다. 동농은 40년 전 아버지가 행했던 그대로, 사직단과 관왕묘에서 하늘에 치성을 드렸다. 학가산(鶴駕山), 영남산(嶺南山), 갈라산(葛羅山), 태백산(太白山)까지 올랐다.

“매번 목욕재계하고, 꼭 제사시간을 지키고, 고된 행차도 내색하지 않음을 보고 관료의 모범이라 칭찬이 자자하였다. 게다가 도중에 엄청나게 많은 비가 쏟아지자, 관민 모두가 “명사또가 우리를 살렸다”고 외쳤다. …… 부로(父老)들이 동농 앞에 나와 절하면서 고마움을 표하였다. …… ‘비는 올 때가 되어 내린 것이오. 어찌 나의 치성 때문이겠소?’” (김위현, <동농 김가진전>, p172)

안동에서, 동농은 그때까지 남아 있던 가슴속 응어리를 깨끗이 씻어냈다. 목민관으로서, 민폐를 덜어내고, 관민이 한마음이 되어 하늘에 빌면서, 그는 이 나라가 진정으로 요구하는 개화의 길이 무엇인지 다시금 되새겼다. 조세(租稅) 개혁과 형법(刑法) 일신을 주도한 대한제국 대신(大臣) 동농 김가진은 이때 다시 태어났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방(下放)은 그를 꺾지 못했다.

정리 = 최석우 <독립정신> 편집위원
사진 = 사단법인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 제공

* 이 연재는 김위현 명지대 사학과 명예교수의 <동농 김가진전>(학민사, 2009)과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의 <김가진 평전>(미출간)을 저본(底本)으로 재구성했음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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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사단법인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 제공]]




갑신정변 일으킨 급진파, 고종 자객에게 암살 당해
김옥균(1851~1894)
김옥균(金玉均)의 호는 고균(古筠)이다. 김병태의 장남으로 공주에서 태어나, 일곱 살 때 당숙 김병기(金炳基, 세도가 金炳冀와는 다른 사람이다)에게 입양되어 서울에서 자랐다. 열한 살 때인 1861년 강릉부사에 임명된 양부 김병기를 따라 율곡사당(栗谷祠堂)이 있는 서당에서 공부한 까닭에, 율곡에게 강한 영향을 받았다. 어려서부터 학문은 물론, 시문(詩文)과 서도(書道)부터 그림, 음악까지 다재다능했다고 한다. 이 점은 동농의 어린 시절과 비슷하다.
십대 말부터 박규수(朴珪壽)의 사랑방을 출입하며 개화사상에 접했고, 이곳에서 함께 어울린 문도(門徒)들이 훗날 갑신정변의 주역이 된다. 고종은 가문 배경과 실력을 고루 갖춘 김옥균에게 상당한 기대를 걸었던 듯하다. 서른을 갓 넘긴 그에게 승정원 우부승지, 참의교섭통상사무(參議交涉通商事務), 이조참의, 호조참판, 외아문협판(外衙門協辦) 등의 요직을 잇달아 맡겼다.
하지만 김옥균은 고종 따위는 안중에도 없던 급진적 개혁파였다. △신분 및 문벌 폐지를 통한 인재 등용 △재정 개혁 △화폐 개혁 △관세 자주권 확보 △서양 과학기술 및 공장제 산업 도입 △신교육 실시 △신앙의 자유 허용 △군제(軍制) 및 경찰 개혁 등을 주장했고, 이를 위해서는 조정 안팎에 대경장개혁(大更張改革)을 단행해야 한다고 믿었다. 그러나 그의 노력은 민씨 수구파들의 방해와 청나라의 간섭에 가로막혔다.
결국, 김옥균은 갑신정변이라는 마지막 카드를 꺼냈으나, 청나라를 맞상대하기에는 아직 힘에 부친다고 판단한 일본의 기회주의적 처신으로, 불귀(不歸)의 망명객 신세가 되었다. 사실, 일본으로서는 밑질 게 없는 장사였다. 무슨 일만 터지면 외국군대가 개입해도 되는 선례(先例)를 끊임없이 만들어냈으니까 말이다.
메이지의 실력자들이 김옥균을 지사(志士)로 대접한 것과는 정반대로, 일본 정부는 김옥균을 거추장스럽게 여겼다. 도쿄에서 1000㎞ 바깥의 오가사와라 섬에 귀양을 보내는가 하면, 홋카이도로 추방해 연금시켰다. 일본 정계 지인들의 도움으로 겨우 도쿄로 돌아온 김옥균은 1894년 3월 상하이로 망명했으나, 고종과 민씨들이 보낸 자객 홍종우에게 암살당했고, 그의 시신은 청나라 군함에 실려 조선으로 돌아와 양화나루에서 능지처참을 당했다.
조선 말기 백성을 도탄에 빠뜨렸던 안동 김씨 가문에서, 임시정부 고문 동농 김가진, 갑신정변의 주인공 고균 김옥균 그리고 독립군의 영웅 백야(白冶) 김좌진(金佐鎭), 우리 근대사가 결코 잊을 수 없는 세 명의 위인(偉人)이 나왔다. 조선이란 나라의 뿌리는 그만큼 깊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