규장각 검서관에서 기기국 총판까지 뜻을 펼치다
2019-01-20 17:39
동농(東農) 김가진(金嘉鎭) ⑥출사(出仕)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당장 끼니가 걱정이었다. 동농이 언제 장가를 들었는지는 확인된 바가 없으나, 부친의 별세가 서른 살 때였으므로, 이미 가장의 책임을 지고 있었을 것이다. 서얼 신분에 상속은 꿈도 못 꿀 처지인 데다, 사실 물려받을 재산도 변변치 않았다. 형제가 새우젓 한 종지를 놓고 ‘형님 먼저, 아우 먼저’ 하다가 아무도 젓가락을 대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질 정도니까 말이다.
동농이 이십대 내내 아무 자리도 얻지 못하고 전전긍긍해야 했던 까닭은 무엇이었을까. 고지식한 아버지가 서출 아들의 앞길을 열어주지 않은 거야 그럴 수 있다 쳐도, 그의 재주나 뒷배경을 생각하면 선뜻 이해하기 힘들다. 동농의 장인은 형조판서, 예조판서를 거쳐 최고 관위(官位)인 정1품에 오른 홍재철(洪在喆)이었다. 서얼에게 허락된 관직이 전혀 없는 것도 아니었다.
안동 김씨의 세도는 몰락한 지 오래고, 남양(南陽) 홍씨(洪氏)들은 서녀 사위에게 관직을 주선할 의지나 힘을 갖고 있지 않았을 것이다. 고종 10년(1873) 최익현(崔益鉉)의 상소로 대원군이 실각하자, 권세는 민씨(閔氏)의 것이 되었다. 당상관(堂上官)만 70명이었다니, 그들의 욕심은 심하게 유별났던가 보다. 게다가, <동농 김가진전>의 저자 김위현 교수에 따르면, 동농은 그 민씨들과 사이가 나빴다.
삼십줄에 접어들면서, 동농은 초조해졌다. 매천 황현은 <매천야록>에 동농이 “젊었을 때부터 학관(學官)이 되어 순천부사 홍재현(洪在鉉)을 따라 그의 책실에서 거처”했으며, “그의 처는 홍종헌(洪鍾軒)의 서종매(庶從妹)이므로 홍종헌이 영변에 부임하였을 때, 김가진은 비장(裨將)이 되기를 원했으나 그 자리를 얻지 못하자 종일 눈물을 흘렸다”고 썼다(한홍구, <김가진 평전>에서 재인용).
◆“이조(吏曹)에서, 내일 아침 일찍 들어오시래요.”
동농의 약력과 행장(行狀)은 “선생은 남달리 서자(일명)의 몸으로 출생하여 당시 적서차별과 문벌주의가 엄격한 중 불우생장한 처지였으나 조금도 기뢰(氣餒)치 않고 남다른 포부와 이상으로 조금도 굴치 않았다”고 기록한다(한홍구, <김가진 평전>에서 재인용). 그러나 며느리 수당(修堂) 정정화(鄭靖和) 선생은 자신의 회고록 <장강일기(長江日記)>에 “한때 모멸과 좌절에 빠지기도 했다”고 썼다.
뜻이 맞고 처지가 비슷한 친구들이 있다 해도, 인간관계를 거기에만 한정시킨다면 기회는 영영 찾아오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 무렵 동농이 남긴 시문에는 취기상서(醉箕尙書)와 후옹상서(厚翁尙書)라는 인물이 자주 등장한다. 상서(尙書)는 판서의 옛 이름이다. 김위현 교수는 취기상서(醉箕尙書)를 장인 홍재철로 추정한다. 자부심이 강한 동농으로서는, 이들이 베푸는 시회(詩會) 말석에 끼어 앉는 것이 스스로 용납할 수 있는 최대한의 인사청탁이었을 게다.
그 곤궁한 형편에 아버지 삼년상을 마쳤다. 아내 얼굴 보기가 민망했다. 배다른 오빠 동생 눈치를 살피며 친정에 다녀오던 아내 아니던가. 바람이 차다. 월동(越冬) 걱정에 어깨가 절로 움츠러든다. 아무런 소득도 없이 들어서는 가진을 아내가 종종걸음으로 달려 나와 맞는다. 좀처럼 볼 수 없던 환한 표정인데, 눈가가 촉촉하다. “여보, 이조에서 기별이 왔는데, 내일 아침 일찍 들어오시래요. 아마도 좋은 소식이 있겠지요?” 아, 완서(浣西)구나….
◆규장각(奎章閣) 검서관(檢書官)
고종 14년(1877) 11월, 동농은 규장각검서관위효력부위용양위부사용(奎章閣檢書官爲效力副尉龍驤衛副司勇, 정9품)으로 계차(啓差, 임금에게 아뢰어 사무를 담당시키게 한다는 뜻) 되었다. 그것이 그의 첫 관직이었고, 병인양요(丙寅洋擾, 1866) 당시 조대비의 눈에 들어, 서얼의 관직 등용을 호소하는 상소를 올린 지 11년 만의 일이었다.
동농은 북학(北學)의 그늘에서 학문의 바탕을 닦았음에도, 유생(儒生)들이 대개 그러했듯이, 위정척사(衛正斥邪)로 나라의 중심을 잡아야 한다고 믿었던 듯하다. 출사 직전인 고종 13년(1876), 일본의 강압으로 강화도조약이 체결되자, <서사(書事)>를 써서 성인이 다시 태어나 더러운 움직임을 깨끗이 씻어주기를 기원했다(신동준, <한국사 인물 탐험>에서 재인용).
규장각에는 그의 둘도 없는 벗 완서 이조연이 있었다. 규장각은 정조(正祖)가 왕권 강화를 목적으로 설치한 일종의 친위(親衛) ‘싱크탱크’였다. 정조가 죽고 세도정치가 국정을 농단하면서, 규장각의 역할은 축소되고 왕실도서관 수준으로 그 지위가 떨어졌지만, 왕실을 수호하는 두뇌집단이라는 전통이 쉽사리 허물어지지는 않았으리라. 그런 곳에서, 조만간 고종의 측근 테크노크라트로 떠오를 이조연과 2년 넘게 일한 경험은, 동농의 뇌리에 근왕(勤王)과 개화(開化)의 정신을 심어주었다.
1880년 7월, 동농은 승훈랑(承訓郎, 정6품) 관위를 받고, 사헌부(司憲府) 감찰(監察)에 임명되었다. 관리들의 비위행위를 적발하고 회계 감사업무까지 수행하는 사헌부 감찰에 임명되었다는 것은, 그의 관직 생활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음을 의미했다. 하지만, 요직(要職)에 진입하기에는 아직 일렀다. 동농은 조지서(造紙署) 별제(別提, 실무책임자이나 녹봉은 받지 못함), 장흥고(長興庫, 왕실이 사용하는 돗자리나 기름 먹인 종이를 관리하는 부서) 주부(主簿)를 거치며, 때를 기다렸다.
◆6년 만에 기기국(機器局) 총판(總辦)으로
<김가진 평전>을 쓴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에 따르면, 동농은 표지에 “경(京)”이라고 쓰인 13장짜리 문서를 작성한 바 있다. 이 문서는 그가 상당한 실력자로 추정되는 ‘집사(執事)’라는 인물에게 국가 존망 시기의 군사문제, 서양 사정 등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설명한 것으로, 속표지에 “통훈대부(通訓大夫) 행(行) 장흥고주부 김가진 년 37”이라고 그의 직위가 표시되어 있다. 그가 서른일곱 살이면, 고종 19년(1882). 6년 만에 당하관(堂下官) 중에서는 최고 관위인 정3품 통훈대부에 오른 것이다.
그러나 주어진 일이 너무 태평스러웠다. 서양에서는 기계로 옷감을 짠다는데, 돗자리라니. 식은땀이 날 지경이었다. 동농은 앞에 소개한 문서에서 군계(軍械, 무기), 농기(農器, 농기기), 함선(艦船), 개광(開鑛, 광산개발) 등과 같은 우수한 서양문물을 적극적으로 도입하자고 건의했다. 그가 이런 주장을 펴게 된 데에는, 청국과 일본을 드나들며 개화의 현장을 직접 목격한 이조연의 조언이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동농은 서양문물 도입의 필요성을 역설한 뒤, ‘집사’가 국정을 다룸에 있어서 꼭 염두에 둬야 할 12가지 항목을 제시했다.
(1) 백성의 뜻을 안정시킬 것(定民志)
(2) 절약과 검소함을 숭상할 것(崇節儉)
(3) 뇌물을 금지할 것(禁苞苴)
(4) 세법에 없는 세금을 혁파할 것(革他科)
(5) 향리를 오래 임용할 것(久任長吏)
(6) 기계를 널리 퍼트릴 것(廣布機械)
(7) 남·서·북 3도에 철도를 부설할 것(鑄銕路於南西北三道)
(8) 도로와 교량을 닦되 수형자들을 사역시킬 것(治道路橋梁以胥靡役之)
(9) 소읍을 통합하여 대읍으로 만들 것(合小邑作大邑)
(10) 8도의 모든 역을 혁파하여 공행에 제공할 것(革八路諸驛以供公行)
(11) 울릉도를 개발하여 경계를 개척할 것(開菀陵島以拓疆界)
(12) 서울과 지방의 향리를 모두 감액할 것(京外吏屬一幷減額)
다음 해 4월, 아버지의 정실부인인 달성 서씨가 돌아가셨다. 부모상을 당하면 상기(喪期)를 마칠 때까지 벼슬자리에서 물러나야 하는 게 조선의 법도였다. 상복을 입고 거동을 삼가며, 부족한 학문을 채울 요량이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조정은 동농을 기기국(機器局) 총판(總辦)에 전격적으로 임명했다. 나랏일이 급하니 상복을 벗고 빨리 나와서 일하라는 게다. 기기국은 양식(洋式) 무기 개발과 제조를 전담하는 부서로, 총판은 모든 사무를 지휘하는 책임자다. 전임(前任) 기기국 총판은 다름 아닌 완서 이조연, 바로 그였다.
* 이 연재는 김위현 명지대 사학과 명예교수의 <동농 김가진전>(학민사, 2009)과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의 <김가진 평전>(미출간)을 저본(底本)으로 재구성했음을 밝힙니다.
정리=최석우 <독립정신> 편집위원
사진=사단법인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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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얼에 ‘입신출세’의 길을
- 조선의 왕실 도서관, 규장각(奎章閣)
정조는 즉위한 즉시, 창덕궁 북쪽 비원에 새로 전각을 짓게 하고, 규장각이라는 명칭을 내려 역대 국왕의 시문(詩文)과 어필(御筆) 서화(書畫), 왕실 족보를 기록한 선보(璿譜), 왕실이 수집한 서책 등을 보관하게 하였다.
규장각은 형식상으로는 왕립도서관으로 출발했으나, 정조가 이를 설치한 진짜 목적은 다른 데 있었다. 사도세자의 아들이라는 멍에를 쓰고 당시 집권당인 노론(老論)에 포위되어 있던 정조로서는, 친위세력를 기르는 게 무엇보다 시급한 당면의 과제였다. 따라서, 규장각의 문(文)과 장용영(壯勇營)의 무(武)는 왕권 강화를 꾀한 정조의 구상을 뒷받침하는 쌍두마차라고 볼 수 있다.
정조는 규장각 관원을 선발하는 데 있어서 당색(黨色)을 불문하고 학식이 높은 이를 우대했고, 검서관 자리를 마련해 서얼에게도 등용의 기회를 주었다. 조선 후기 실학사상의 원조라 할 수 있는 박제가(朴齊家)․유득공(柳得恭)․이덕무(李德懋)․서이수(徐理修)는 모두 서얼 출신으로, 당대에 “규장각 사(四) 검서관”으로 이름을 떨쳤다.
호학군주(好學君主)라고 불릴 만큼, 정조는 그 자신이 누구보다도 학문에 조예가 깊었으며, 왕실 차원에서 도서를 수집하고 서책을 간행했다. 이 점에서 규장각은 세종대의 집현전에 비교될 만하다. 정조가 심혈을 기울여 모은 규장각의 장서는 3만여 권에 달했으며, 이 도서목록은 서호수(徐浩修)가 정리한 <규장총목(奎章總目)>으로 남았다.
경술국치 이후 규장각은 일제의 손에 들어가 1922년 총독부 학무국 관할로 이관되었는데, 이 당시 규장각이 보유한 장서는 5,353부 10만187책, 각종 기록은 1만730책이었다. 규장각 장서는 경성제국대학에 넘겨졌다가, 현재 서울대학교가 관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