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시정부 100주년]요란한 광복군 사령부 복원공사, 한인촌 옛터는 잡초만

2019-01-02 02:00
한중 관계 개선에 복원사업 급물살
시내 한복판 3층 건물, 외관 완성돼
황량한 이동녕 거주지 등 유적 방치

충칭 도심 한복판에서 진행 중인 광복군 총사령부 복원 공사 현장. 3층 건물의 외관이 거의 완성됐다. [사진=이재호 기자 ]


중국의 여느 대도시와 마찬가지로 충칭도 시내 곳곳이 공사판이다. 어딜 가나 육중한 건설 장비가 내뿜는 굉음으로 소란스럽다.

그 가운데 절대로 그냥 지나칠 수 없는 곳이 있다. 마무리 작업이 한창인 광복군 총사령부 복원 공사 현장이다.

지상 3층, 지하 1층 규모의 건물은 외관이 거의 완성된 모습이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근거지를 충칭으로 이전한 직후인 1940년 9월 17일 항일 무력 투쟁을 위해 광복군을 창설했다.

해방 이후 임시정부가 해산하고 중국이 공산화되면서 충칭 내 광복군의 흔적도 거의 사라졌다.

2014년 박근혜 정부 때 광복군 사령부 복원 논의가 있었지만 사드(THAAD·고고도 미사일 방어체계) 갈등으로 유야무야됐다.

문재인 정부 들어 한·중 관계가 개선되면서 복원 사업은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싱가포르 기업에서 중국 대형 부동산 개발업체로 토지 소유권이 바뀌는 과정에서 현지 당국이 입김을 행사해 사령부 복원을 위한 부지를 확보했다.

공사 현장 인근의 상인 스쿵이(司空逸)씨는 "지난해 초까지 별다른 움직임이 없다가 여름부터 공사 진행 속도가 빨라졌다"며 "옛 광복군 사령부가 원래 있던 건물의 지하층 일부만 사용했던 점을 감안하면 복원 규모도 엄청나다"고 전했다.

지난해 3월 방한한 양제츠(杨洁篪) 중국 외교담당 정치국원이 "복원을 서두르라고 지방정부에 지시했다"고 밝힌 이후다.

문재인 대통령은 올해 4월까지 복원 공사가 끝난다고 공언했다.
 

충칭시 치장현의 이동녕 선생 옛 거주지. 1940년 세상을 뜰 때까지 이곳에 머물렀다. [사진=이재호 기자 ]


양국 관계의 부침에 따라 중국 내 독립 운동 거점의 보존 및 관리도 영향을 받는다.

광복군 사령부 복원은 분위기 좋을 때 진행된 정치적 타협의 결실이지만 여전히 논의조차 이뤄지지 않는 사례가 많다. 사람에 대한 기억이 특히 그렇다.

충칭에서 차로 한 시간 정도 달려 도착한 치장(綦江)현. 양쯔강 지류인 치장을 지명으로 택한 곳으로, 1940년대 임시정부 요인 가족을 비롯한 한인들의 생활 터전이었다.

강변의 주택가에서 임시정부 주석을 지낸 석오 이동녕 선생의 거주지를 어렵사리 찾아냈다. 1940년 급성 폐렴으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머물던 집이다.

주변 아파트 사이에 덩그러니 있는 반파(半破) 상태의 회백색 주택. 현지 지방정부가 걸어놓은 녹슨 명패를 통해서야 이동녕 선생의 거주지였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산책을 하던 노부부에게 유래를 아는지 물었다. "예전에 조선인이 살았다는 것은 전해 들었는데 누구였지는 모른다"는 답이 돌아왔다.

1990년대 말까지 거주하던 중국인은 당국의 거듭된 설득에도 이주를 거부하다가 이곳에서 사망했단다. 지방정부가 유적지로 지정한 것은 2000년이다.
 

충칭시내 국유기업 공장 부지에 세워진 한인촌 표지석. 한 현지 교민이 비석을 어루만지고 있다. [사진=이재호 기자 ]


충칭시 바난(巴南)구 화시(花溪)촌은 일명 '한인촌'으로 불렸다. 한인들의 집단 거주 지역이었다.

수소문 끝에 도착하니 중국 국유기업인 충칭강철그룹 강관 공장 부지였다. 공장 입구의 수위에게 통사정을 하고서야 내부로 들어설 수 있었다.

폐허가 된 공장 안으로 700~800m를 더 들어가자 얕은 언덕 위에 '한인 거주 옛터'라고 쓰인 표지석이 보였다.

독립투사를 뒷바라지하느라 허리가 굽었을 가족들의 처절했던 삶의 현장에는 잡초만 무성했다.

현장에서 만난 교민 김대원씨는 "부임한 지 얼마 안 됐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충칭이 지닌 역사적 의미를 느끼게 된다"며 "정치적으로 중요한 유적뿐 아니라 당시 민초들의 삶에도 관심을 기울였으면 한다"고 아쉬움을 내비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