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등(葛藤)의 한자어는 칡나무(葛)와 등나무(藤)가 서로 얽혀 있는 모습을 그린다. 갈등은 개인이나 집단이 가지고 있는 두 가지 이상의 목표나 정서가 서로 충돌하는 현상이다. 이런 갈등이 무조건 나쁜 것만은 아니다. 적잖은 사회학자들은 갈등을 해결하고 극복하는 과정을 통해 세상이 한층 나아진다고 설파한다. 그렇다면 2019년 대한민국이 직면한 수많은 갈등은 과연 더 좋은 세상을 가져올 ‘진통’의 과정일까? <아주경제>는 그 답에 대한 단초를 신년기획 ‘갈등을 넘어 상생으로’를 통해 고민해 본다. [편집자 주]​

“좌파는 돌대가리야. 빨갱이 XX들. 멍청해서 나라를 말아먹고 있어.”

2018년을 마무리하는 주말에도 어김없이 보수단체 집회가 열렸다. 지난달 22일 오후 1시 서울 중구 정동 덕수궁 대한문 앞에선 태극기와 성조기를 양손에 든 중장년 300여 명이 몰려들었다. 매주 토요일마다 열리는 태극기시민혁명운동본부 집회에 참석하기 위해서다. 참석자들이 많지도 않고, 지나는 이들도 무관심했지만 집회의 열기, 환호는 젊은이들의 콘서트장 못지 않았다.

집회 한쪽에는 박근혜 전 대통령 굿즈(goods·상품)와 태극기 배지, 모자 등을 파는 좌판도 깔렸다. 박 전 대통령 특별사면 서명운동도 벌였다.

집회 다른 한쪽에는 고(故) 이재수 전 기무사령관 분향소도 차려졌다. 이 전 사령관은 세월호 유가족 관련 정보를 수집했다는 혐의로 검찰 수사를 받다가 지난 12월 7일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

분향소에서 조문을 마친 60대 남성 김모씨는 “이 전 사령관이 세월호 유가족을 불법 사찰한 거면 문재인 정부는 간첩 집단”이라며 분개했다. 그러면서 “문재인 주사파에게 빼앗긴 조국은 머지않아 봄을 맞게 될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덕수궁 대한문에서 광화문 광장까지 같은 풍경이 이어졌다. 서울시청과 대한문 사이로는 ‘멸공’이라는 플래카드를 달고 “문재인 독재정권 타도” 사이렌이 울리는 자동차가 활보했다. 길 건너 동화면세점 앞 광화문역 6번 출구는 태극기와 성조기에 휩싸여 있고, 그 바로 옆에는 보수 단체인 ‘일파만파’가 세운 이 전 사령관 분향소가 있다.

다음 날인 23일 오후 2시엔 진보 단체가 거리로 나섰다. ‘백두칭송위원회’는 서울 종로구 마로니에공원 앞에 모여 ‘김정은 국무위원장 서울방문 환영 행진’을 진행했다. 백두칭송위는 김 위원장의 서울 답방을 환영할 목적으로 국민주권연대, 한국대학생진보연합 등 진보진영에서 결성한 단체다.

“김정은 위원장께서 서울을 방문하시면 ‘레드콤플렉스’가 깨질 것입니다.” 이날 집회에 참여한 인원은 30여명 남짓으로, 모두 손에 김정은의 방문을 환영한다는 의미의 빨간 ‘꽃술’을 들었다. 북한의 대표적인 가요 ‘반갑습니다’에 맞춰 꽃술을 들고 율동을 했다.

마이크를 잡은 꽃물결 대학생 실천단 소속 이기범씨는 “정상회담 덕에 (김정은 위원장에 대해) 우리가 평소 잘못 알고 있던 ‘독재자다’, ‘괴팍하다’는 편견이 깨졌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위원장님이 큰 결단을 통해 (서울에)내려오시기로 했던 것처럼 우리가 더 열심히 실천하고 투쟁하겠다”고 했다. 행진은 오후 3시20분쯤 마무리됐다.
 
극단적 이념 갈등은 비단 집회 현장에서만 그치지 않고  페이스북, 유튜브 등 온라인까지 활활 불타오르고 있다.

보수층은 2016년 촛불혁명으로 박근혜 전 대통령이 탄핵되면서부터 유튜브로 시선을 돌렸다. 정권을 잡은 진보진영을 피해 자신들이 듣고 싶은 콘텐츠를 이야기해주는 유튜브로 몰리고 있다. ‘신의 한수’, ‘정규재 TV’, ‘황장수의 뉴스브리핑’ 등 보수 유튜브 상위 5개 채널들은 전체 구독자가 100만명을 넘어섰다.

이념과 이익이 충돌하는 갈등이 이렇게 심각할 때 바로 정치의 중요성이 부각된다. 하지만 우리 정치는 기본임무 중 하나인 갈등의 조정, 중재 역할을 외면하고 있다. 아니 되레 이를 악용하고 있다.

 ‘보수 유튜버’를 자처한 홍준표 전 자유한국당 대표가 지난달 18일 ‘홍카콜라TV’로 정계복귀를 알렸다. 개국 첫날부터 홍 전 대표는 “북한은 김대중·노무현정권 시절 68억 달러 지원을 받았고, 정상회담 대가로 비밀리에 5억 달러 지원을 받았다”거나, 문재인 대통령의 지난달 체코 방문을 거론하며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답방 성사를 위해 모종의 거래가 있었을 가능성을 시사하는 의혹을 제기했다. 한마디로 현 정부가 북한에 ‘퍼주기’를 하고 있다는 주장이다.

더불어민주당은 홍 전 대표의 주장을 ‘온갖 가짜뉴스’라고 규정하며 논평으로 응수했다. 조승현 민주당 수석부대변인은 “문 대통령의 체코 방문, 문재인 정부의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와 탈원전 정책 등에 대해 ‘아니면 말고’식의 ‘아무말 대잔치’를 늘어놓았다”며 “보수의 자멸을 보여주는 듯한 홍 전 대표와 홍카콜라TV, 실소와 탄식을 동시에 자아내는 그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앞에 분노조차 아깝다”고 맞받아쳤다.

집권여당인 더불어민주당은 지난달 18일 국회도서관 지하 대강당에서 ‘촛불정신과 문재인 정부 개혁과제 정책심포지엄’을 개최했다.

이날 민주당은 내년 예정인 독립운동 100주년과 촛불정신을 거듭 연결시키며 ‘1919 건국론’을 은근히 부각했다. 이해찬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축사에서 3·1운동을 3·1혁명이라 언급하며 “내년이 3·1혁명 100주년인데, 지금부터가 중요하다”면서 “촛불혁명을 기준가치로 해서 앞으로 100년을 어떻게 끌어갈 것인가 깊이 성찰해야 한다”고 말했다.

‘1919 건국론’은 보혁 이념갈등의 휘발성 높은 대표적 이슈다. 진보진영은 1919년 임시정부를 건국의 기점으로 삼고 있지만, 보수에선 1948년 정부수립을 뿌리로 보고 있다.

건국절 논란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이명박 정부 이후 이를 놓고 진보와 보수가 극심하게 대립해 왔다. 지난해 광복절에도 진보와 보수는 건국절 논란을 두고 극심한 대립을 이뤘다.

2006년 이영훈 교수가 동아일보에 ‘우리도 건국절을 만들자’라는 칼럼을 올리면서 시작된 논란은 2007년 9월 한나라당의 정갑윤 의원이 광복절을 건국절로 변경하는 국경일 법안을 제출하면서 수면 위로 떠올랐고, 이명박 정부 첫해인 2008년 광복절 행사 명칭을 ‘대한민국 건국 60주년 및 광복 63주년 경축식’으로 추진하면서 격화됐다.

박근혜 전 대통령은 지난 2016년 광복절 경축사에서도 “광복 71주년, 건국 68주년”을 언급해 1948년 건국 주장을 공개적으로 지지했다. 이에 반해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해 제72주년 광복절 기념식 경축사에서 “2019년은 대한민국 건국과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는 해”라며 1919년을 건국일로 강조한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