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범은 왜 죽어가는 아들에게 페니실린 쓰기를 거부했나
2018-11-26 14:48
[임시정부 기념공연-길위의 나라]며느리의 절규와 그의 공평무사…지금 우리의 삶은, 임시정부에 뿌리깊이 빚지고 있다
# 35세 아내 잃은 백범, 빈젖 물리며 손자 키운 백범 모친 곽낙원
2018년 11월24일 저녁 서울 대학로 예술극장. 임시정부 기념사업회가 주최한 다큐멘터리 음악극 '길 위의 나라' 시리즈 3부 마지막 공연의 조명은 백범 김구(1876~1949)를 오래 비추고 있었다. 그는 1944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에 선임된다. 그의 얼굴은 곧 '임정의 얼굴'이기도 했다.
백범은 상하이 시절, 아내 최준례를 잃는다. 결핵 병중에 둘째아들 김신(金信)을 낳은 최준례 여사는 산후조리를 하던 중에 계단에서 발을 헛디뎌 중상을 입는다. 이 일로 1924년 외국인 교회 무료진료소에서 35세로 숨을 거둔다. 이 병원이 일본인 거주지역에 있어서 백범은 임종도 지키지 못했다.
백범의 어머니 곽낙원은 핏덩이 손자 김신을 안고 자신의 빈젖을 물리며 키웠다. 끓인 물에 설탕을 타먹이며 우는 아이를 달랬다. 먹을 것이 없어, 백범의 첫째 아들 김인(金仁, 1917~1945)과 함께 중국인들이 버린 채소쓰레기 속에서 먹을 만한 푸성귀를 찾고 있는 어머니를 본 백범이 이렇게 말했다.
"차라리 고향(해주)으로 돌아가시지요."
어머니는 대답했다. "두 손주가 독립운동에 방해가 되어서는 안되니 내가 데려가겠다."
백범은 임정 청사에 기거했고 동농 김가진의 며느리인 정정화가 먹거리를 간간이 챙겨준다.
# "우리는 반역자, 선구자...죽음은 당연합니다" 백범 맏아들 김인의 시
이 아이들이 다시 돌아오는 것은 1932년 이후이다. 이봉창과 윤봉길 의거를 주모(主謨)한 사람으로 백범을 지목한 일제가, 해주에 있는 가족들을 끝없이 괴롭혔기 때문이다. 이후 맏아들 김인은 중국 군관학교에 입학해 공부한다. 1935년 김인은 17세 나이로 항저우 한국국민당 실무진이 된다. 백범의 지시를 받으며 일제 관공서 폭파, 고관 암살, 일본 전투함 격침 등의 프로젝트를 맡았다. 또 일본군 점령지에서 첩보활동을 벌이기도 한다.
공연 무대의 화면에 육필(肉筆)의 시 한 편이 떴다. 젊은 기운이 배어있는 서글서글한 필체. 1939년 21살 김인이 충칭에서 당시 임시의정원 의장 김붕준의 딸 효숙에게 써준 즉흥시였다.
"누이! 우리는 반역자! 현실과 타협을 거절하는 무리외다...우리는 선구자! 선구자인 까닭에 어느 때 어느 곳에서든지 죽음이 기다리고 있는 것을 압니다."
# 임시정부 수반으로, 동지들에게도 안쓴 약을 아들에게 쓰겠느냐
김인은 안중근의 동생인 안정근의 딸(안미생)과 연애 결혼을 한다. 안미생(1914~2007)이 세 살 연상이었다. 중국어, 영어, 러시아어 등 외국어에 능통했던 안미생은 충칭의 영국대사관에서 근무를 하다가 김인을 알게 된다. 독립운동을 하느라 사랑의 감정에 대해선 전혀 몰랐던 그가, 미생에게 느꼈던 이상한 감정을 동갑나기였던 장준하에게 호소하는 장면이, 극중에 등장하기도 한다. 1941년 김인의 딸 김효자가 태어난다.
1940년 임시정부는 충칭으로 옮겨진다. 1937년 중일전쟁 이후 중국은 수도를 이곳으로 옮겼는데 갑자기 인구가 급증하고 도시규모가 커지면서 석탄매연이 극심했다고 한다. 백범일지에는 "우리 동포 300~400명이 6~7년 거주하는 동안 폐병으로 사망한 사람만 70~80명에 달했다"고 적고 있다. 김인도 폐병을 앓는다. 아내 안미생은 임시정부 주석이자 시아버지인 백범을 찾아가 엎드려 울면서 '페니실린이 있으면 폐병을 낫게 할 수 있다고 합니다, 아버님께서 그 약을 좀 구해주십시오"라고 말한다. 백범은 묵묵히 듣고 있다가 이렇게 말했다.
"독립투쟁을 하는 숱한 동지에게도 약을 못 구해줬는데, 어찌 아들에게라고 약을 쓰겠느냐."
# "그때 살릴 수도 있었는데..." 며느리 안미생에게 임시정부는 무엇이었는가
1945년 3월29일. 해방을 다섯 달도 안남긴 때, 김인은 눈을 감았다. 그의 나이 27세였다. 독립운동을 지휘하는 리더로, 아들이 죽는 마당에서도 공평무사(公平無私)를 말한 백범에게, '임시'가 붙어있는 이 정부는 어떤 의미이며 나라의 독립은 무엇이었는가. '선구자인 까닭에 어느 때이든지 죽음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안다'고 말한 김인. 그가 목숨을 걸고 일한 임시정부는 그에게 무엇으로 남았는가.
안미생은 해방 이후 백범과 함께 귀국해 경교장에서 김구의 비서관으로 활동했다. 그녀는 '안스산나'라는 이름을 쓰며 반탁운동에도 참여했다. 그러나 그녀가 백범에게 '시아버지로서의 공경'을 다한 건 3년 뿐이었다. 1948년경 돌연 미국으로 떠났다. 남편을 잃은 이 나라에서 사는 것이 너무 힘겹다는 말을 주위에 남겼다고 한다. 이듬해 경교장에서 백범이 눈을 감았을 때 뉴욕에선 안스산나 명의의 조전(弔電)만 날아왔을 뿐, 장례식장에서 얼굴을 볼 수는 없었다. 1960년 중반쯤 안미생은 딸 김효자에게 전화를 걸어 미국 유학을 권했고, 도미한 김효자도 이후 소식이 끊긴다.
안미생에게, 아들의 목숨보다 더 귀히 여겼던 임시정부 어른의 '공명정대'가, 도저히 지울 수 없는 한(恨)으로 느껴졌을지 모른다.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었을까. 그런 원망을 파묻으며 미국행 비행기를 탔을 안중근의 조카딸. 죽음과 삶으로 갈라서면서까지 얻은 조국은, 그들을 어떻게 대했는가. 어느 여인의 착잡한 잠적은 임시정부의 역사적 가치와 현재적 의미를 다시 새기게 했다.
# '나라 잃은 정부'의 마지막 문지기에게, 나라는 무엇을 주었나
공연은, 마지막에 1945년 11월23일 뒤늦게 귀국하는 김구주석을 보여준다. 출발지인 상하이 강만에서 우당 이회영의 손자인 이종찬(전 국정원장) 소년이 김주석에게 꽃목걸이를 걸어주고 기념촬영을 했다. 그러나 일행 20명과 함께 미국 수송기를 타고 들어온 김포비행장엔 미군들만 몇 명 서있을 뿐 환영인파는 없었다. 국민들은 임시정부 주석과 그 내각이 환국한 것도 모르고 있었다. 미국이 되찾아준 국가는 임시정부라는 단체를 공식으로 인정하지 않았고, 개인자격의 귀국만 허락했기 때문이었다.
중국을 떠돌며 '독립투쟁'과 '국가 정체성 유지'의 중추 역할을 해온 26년의 대한민국 정부. 3부작 공연은 많은 임시정부 관련자들의 기록과 기억을 정교하게 편집해, 마치 그 고난의 행군을 동행체험하는 듯한 묵직한 경험을 안겨주었다.
이런 기획이 가능했던 것은, '임시정부 손자'로 불렸던 김자동 임시정부기념사업회 회장의 생생한 '임정(臨政)살이'가 바탕이 됐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의 기억 속에서 어느새부터인가 한켠으로 제쳐져 있는, '임시정부'가 이토록 세밀하게 복원되어 대중에게 다가갔던 적이 있었던가 반문해보게 되는 공연이었다.
[임시정부는 대체 무엇인가]
# 따분한 임시정부? 청년에게 말걸기를 시도하다
도입부에는 청년들의 푸념이 등장한다. 내 먹고 살기도 바빠 죽겠는데, 무슨 독립운동 타령이라는 말. 지나간 구질구질한 역사를 자꾸 들먹여 무슨 국물이라도 떠먹겠다고 꺼진 불씨를 돋우느냐는 힐난. 임시정부나 독립투쟁 따위의 말을 들으면, 저런 생각이 먼저 드는 이가 뜻밖에 많을 것이다. '독립'에 대한 청년들의 반응을 먼저 제시함으로써, 그들의 생각 속을 파고든다. 그러면서 식상한 시험지 속에 등장하는 낱말의 '정체'에 대해 묻는다.
우선 임시정부가 무엇인지, 독립투쟁이 무엇인지, 그 실상을 제대로 아는 이도 드물지 모른다. 삼일운동이 일어나던 해인 1919년에 만세운동의 열기가 가시지 않은 무렵에 임시정부가 왜 생겨났는지, 삼일운동은 또 왜 일어났는지. 갑자기 사람들이 죽기를 각오하고 총칼 앞에 왜 태극기를 들고 거리로 뛰쳐나왔는지, 맥락을 명쾌하게 짚고 있는 분도 별로 없다. 그것부터 짚는 것이 필요할지 모른다.
1910년 나라를 잃은지, 9년째 되던 해 국권은 이미 넘어갔지만 국왕 고종이 멀쩡히 잠든 뒤 독살로 추정되는 죽음을 맞는다. 식민지의 조선국민들은 500년 왕국이 지탱해온 국가가 현실적으로 사멸하는 듯한 충격을 받는다. 왕의 장례식인 3월3일을 앞두고 국민적인 선제 기습시위가 기획된다. 그간 개별적인 피압박민으로 잠복 억압되어 있던 '우리나라를 돌려달라'는 요구의 표출이었다. 국민들이 편지와 귓속말과 눈짓으로 서로 통기하여 거대한 무저항 운동으로 번진다.
이 놀라운 용감성과 단결력은, 국제 사회를 놀라게 했을 뿐 아니라 일본까지도 멈칫 하게 만든다. 이후 일본은, 조선사회의 내분과 이간을 통해 친일세력이 조선을 자체 통제하는 소위 '문화정치'를 펼치기 시작한다. 일본을 통해 권세와 명망을 얻으려는 조선인들을 포섭하고 그들과의 유대를 키워나간다. 이런 소용돌이 속에서, 우리가 스스로 우리 정부를 다시 세워야 한다는 생각들이 굳건해진다. 그런데, 조선의 '군주제'는 새로운 국가를 건설할 수 있는 대안이 되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고종 황제의 종말을 본 뒤의 각성이었을 것이다.
# 국토와 국민을 지배하는 '실효(實效)권력' 대신, 잠정적인 '상징권력' 정부
국가를 잃었으니 국토를 지배하는 실효 권력을 지닌 정부를 구성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우리가 일제의 부당한 침탈을 현실적으로 인정하지 않는 만큼, 식민지 상황을 극복할 때까지 우리 국가의 정체성을 유지할 '정부'가 필요하다는 인식을 했다. 이 정부는 왕실이 아니라 정부와 의회가 다스리는 국가를 전제로 한 임시적인 기관이었다. 3곳에서 임시정부가 생기는데, 러시아와 중국 상하이, 그리고 서울이었다. 이들 정부는 곧 통합을 한다. 4월13일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수립하고 선포한다.
선포 당시 의회를 대표하는 의정원의장은 이동녕이었고, 정부 수반을 의미하는 국무총리는 이승만이었다. 9월11일 이승만은 임시대통령에 선출된다. 통합을 한 것은 좋았지만, 일제의 눈을 피해 독립운동을 해야 하는 '임시정부' 입장으로서는, 중국과 러시아, 미국 등에서 여전히 제각각 활동을 해야하는 상황이었을 것이다. 미국에 머물고 있던 이승만은, 수도 워싱턴에 집정관총재 사무실을 열고 대외적으로 프레지던트(President, 대통령)라는 호칭을 사용하기도 한다. 하지만 통합된 임시정부를 실질적으로 운영하는 일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다. 이승만의 경우 임시정부 관계자들의 교신이 원활하지 않았고, 현지 상황을 모르는 상태에서 임시정부를 '경영'하는 일도 쉽지 않았을 것이다.
# 체계적이고 줄기찬 투쟁으로 존재감을 확립한 상하이 임시정부
이런 가운데, 임시정부 활동을 줄기차게 그리고 구체적으로 해왔던 곳이 상하이 임시정부였다. 국가가 없는 상태에서 임시정부가 해야할 일은 무엇일까. 국민을 보호할 수도 없고, 국가경영의 예산을 짤 수도 없다. 오직 가능한 것은 인재를 양성하는 것이며 군사력을 키워 일본에 대항하는 실력을 키우는 일 뿐이었다.
그것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이제 '나라'가 사라졌다고 절망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붙잡기 위해, 그 임정 자체가 존재하는 일이었다. 임시정부에서 지금의 '정부'를 떠올리며, 지위나 권력, 혹은 역할이나 의무를 생각한다면, 그건 자기 국가의 존엄을 되찾으려는 처절한 나날의 사투를 연역하지 못한 것이다. 임시정부는 남의 나라 땅에 붙어살며, 이거라도 하지 않으면 '민(民)'인 우리가 무엇을 할 것이냐고 악을 쓰며 되묻던 자존심의 근간같은 것이었다.
평생 어쨌든 배 불리 먹고 살 수 있었을 재산을 모두 처분해, 임시정부의 인재육성에 아낌 없이 썼던 사람, 일제로부터 귀족 지위까지 받았으나 그걸 팽개치고 '미래'도 희망도 보이지 않는 만주로 온 가족이 달려가 하나씩 죽어가며 '나라'를 다시 세우겠다고 발버둥친 이들, 평생 흙수저로 살아왔으면서도 죽을 각오를 하고 일제에 폭탄을 던진 그들, 갈수록 일본은 강해지고 독립의 기세는 나날이 꺾이는데도 도망가기는 커녕 거기에 붙어 같이 굶고 같이 피흘리는 여자들까지.
도대체 지금의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실익 없는 투쟁'들이, 1919년에서 1945년까지 일제가 쫓아오는 길 위를 숨가쁘게 뛰고 있었다. 그 '길위의 나라'가 상하이 임시정부 환국(1945.11.23)기념 73주년인 2018년 11월23일에 다시 펼쳐진 것이다. 그 길위의 '나라'는 누구의 나라였는가.
[공연메모]
다큐멘터리 음악극 <길 위의 나라(대한민국임시정부 27년간의 대장정)>
1919년 4월11일에 상하이에서 수립되어 항저우, 자싱, 전장, 난징, 광저우, 류저우, 치장, 충칭을 거쳐 1945년 11월23일 조국으로 돌아오기까지 타국의 길 위에서 독립된 나라를 꿈꾸며 지켜온 대한민국 임시정부! 2019년 그 100년의 역사를 맞이하며 그 분들의 여정과 삶을 함께 기억하고 기념하고자 합니다.<공연 소개글>
"다큐멘터리 음악극 <길 위의 나라>는 그 길(임시정부의 길)에 동참했던 선열들의 회고문학을 바탕으로 구성된 3부작 공연입니다. 특히 독립운동에 참가한 여성들의 목소리에 주목해주실 것을 부탁드립니다. 우리 독립운동에서는 여성의 힘이 크게 작용했습니다." 김자동 임시정부사업회장, 이종찬 임시정부기념관건립위원장
"나라를 구함이 아닌 목숨을 바쳐 평범한 삶을 구하신 분들에게 누가 되지 않기를 오늘도 잠 못 들며 기도하고 있다." 연출가 이석준
상하이시기(1919~1932) 등장인물
정정화(1900~1991), 김구(1876~1949), 이은숙(1889~1979), 이회영(1867~1932), 허은(1907~1997), 한도신(1895~1986), 김예진(1898~1950), 권기옥(1901~1988), 윤재현(1920~미상), 김효숙(1915~2003), 안창호(1878~1938), 김가진(1846~1922), 신규식(1889~1922), 이세창(1946~) 김의한(1900~1951), 이봉창(1901~1933), 윤봉길(1908~19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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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국 논설실장
"나라를 구함이 아닌 목숨을 바쳐 평범한 삶을 구하신 분들에게 누가 되지 않기를 오늘도 잠 못 들며 기도하고 있다." 연출가 이석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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