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병식 칼럼] '방탄 판사단' 부끄러움을 알아야

2018-10-12 09:14

[사진=임병식 아주경제 객원 논설위원]


“주거의 평온과 안정을 위해 기각한다.” 사법농단 정점에 있는 양승태 전 대법원장에 대한 압수수색 영장 청구를 기각하면서 법원이 밝힌 사유다. 네 번째 기각이다. 갖은 이유로 네 번이나 기각하고, 또 주거 안정까지 배려할 만큼 우리 사법부는 친절하다. 하지만 국민을 졸(卒)로 보는, 자신들 논리에 무조건 수긍할 것이라고 믿는 궤변에 불과하다. 유해용 전 대법원 수석재판연구관에게 들이댄 잣대도 마찬가지다. 그는 무단 반출한 재판 자료를 분쇄, 파기했다. 영장 발부를 미루는 동안 법관으로서 지식을 동원해 증거물을 완벽하게 없앴다. 그런데도 압수수색 영장은 물론이고 증거인멸 이후 청구된 구속영장까지 기각됐다. 그와 대법원에서 함께 근무했던 영장 전담 판사는 “증거 인멸 염려가 있다고 할 수 없다”며 값싼 의리를 들먹였다. 자신들에게만 자상한 재판부다.

우리 재판부가 정말 친절한지 살펴보자. 사법농단과 관련 압수수색 영장 기각률은 90%다. 전체 208건 가운데 185건이 기각됐다. 특히 의혹의 진원지인 법원행정처에 대한 압수수색 영장 50건은 모조리 기각됐다. (9월 11일 기준) 수사 초기단계에서 증거물 확보를 위한 압수수색 영장 발부율은 통상 90%대다. 결국 일반 사건에 대한 압수수색 영장 발부율은 90%인 반면 사법부를 상대로 한 발부율은 10%에 그쳤다. 9대1과 1대9 사이에 어떤 논리가 작용했을까. 그것은 자기식구 감싸기라는 천박한 의리로밖에 해석되지 않는다. 압수수색 영장을 남발하라는 게 아니다. 신중하되, 동일한 잣대를 대라는 것이다. 일반 국민들도 압수수색을 당하면 평온이 깨진다. 판사들 가정만 평온이 깨지는 게 아니라는 말씀이다.

10일 국감장에서 사법부는 조롱거리였다. 민주당 이춘석 의원은 “방탄소년단이 들으면 불쾌하겠지만 지금 국민들은 사법부를 ‘방탄 판사단’이라고 부른다”며 직격탄을 날렸다. 제 식구를 감싸는 행태를 방탄에 빗댔다. 고양 저유소 화재와 관련 외국인 노동자 사건 처리도 도마에 올랐다. 민주당 백혜련 의원은 “풍등 하나 날렸다고 힘없는 외국인 노동자에게 모든 것을 덮어씌우는 게 온당하느냐”고 질책했다. 풍등과 저유소 화재 사이에 인과관계가 확실치 않은 상황에서 성급한 구속영장 청구를 나무랐다. 전형적인 희생양 찾기다. 대형 사건이 터질 때마다 제물로 바칠 희생양을 찾는데 익숙한 사법부다. 만일 그가 잘 나가는 검사, 법관이었어도 구속영장을 청구했을까.

익산 약촌오거리 택시기사 살인사건이 좋은 사례다. 2000년 8월, 당시 16살 소년은 살인 용의자로 구속된다. 택시기사를 살해했다는 혐의다. 무죄를 주장했지만 10년 징역형을 꼬박 살았다. 수감 생활 3년 만에 진범이 나타났지만 경찰도, 검찰도, 재판부도 귀를 막았다. 엉터리 수사, 기계적인 구속, 형식적인 재판, 뻔뻔한 책임회피 때문에 꽃다운 소년은 철창에 갇혔다. 다행히 18년만인 지난해 재심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다. 뒤늦은 무죄 판결로 재판부는 소명을 다한 것일까. 이미 소년과 가정은 철저히 망가졌다. 20대 대부분을 교도소 담장 안에서 보낸 세월은 무엇으로도 보상할 수 없다. 또 살인범 아들을 두었다며 손가락질 받아야 했던 가족이 겪은 고통은 치유되기 힘들다. 유전무죄 무전유죄(有錢無罪 無錢有罪)는 누적된 사법부 불신이 빚어낸 부끄러운 행태다.

지난 9월 13일은 사법부 70주년을 기념하는 날이다. 이날 대법원은 초상집 분위기였다. 사법농단 의혹으로 사법부 불신은 극에 달했다. 축하 대신 참회와 반성을 촉구하는 목소리만 거셌다. 우리에게도 사표(師表)가 되는 존경받는 법관이 있었다. 초대 대법원장을 지낸 가인(街人) 김병로다. 그는 민족정기를 바로세우고 사법부 초석을 다졌다. 일제 강점기에는 항일 의사들 무료 변론을 맡았고, 대법원장 시절에는 정권에 맞섰다. 무명 두루마기와 고무신을 신고 법관들에겐 청렴을 강조했다. 친일 부역자를 심판할 목적에서 설치된 반민특위가 이승만 정권에 의해 부당하게 해체되자 내무차관을 비롯해 관련자들을 검찰에 고발했다. 정권에는 눈엣가시였다. 이승만 대통령이 불만을 표시하자 “억울하면 절차를 밟아 항소하라”고 맞받아쳤다. 이런 결기와 청렴함이 대한민국 사법부를 만들었다.

김병로는 “정의를 위해 굶어죽는 것이 부정을 범하는 것보다 수만 배 명예롭다”는 말로 후배 대법관들을 일깨웠다. 또 “법관이 국민으로부터 의심을 받게 된다면 최대 명예 손상이 될 것이다”며 경계했다. 그러나 양승태 전 대법원장 아래서 법관의 청렴과 명예는 철저하게 망가졌다. 정권 입맛에 맞는 재판거래와 비자금 조성 의혹만 부끄러움으로 남았다. 가인이 보여준 추상같은 결기를 생각하면 참담하다. 전북 순창에는 그를 기린 대법원 가인연수관이 있다. 그곳에 “법관은 최후까지 오직 정의의 변호사가 되어야 한다”는 글귀가 있다. 그 말에 부끄럽지 않은 법관은 몇 이나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