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호택 칼럼] 박근혜 청와대의 오판이 만든 헌정파괴 문건
2018-07-24 09:51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에 분노한 시민이 남대문에서 광화문 광장까지 가득 메운 3차 촛불 시위(2016년 11월 12일)를 인근 건물 20층에서 내려다보면서 필자는 “박근혜 정권은 이제 끝났다”고 생각했다. 이 도도한 민심의 물결을 무슨 수로 막는단 말인가. 1980년 5월 광주에서처럼 군 병력을 동원해 진압하는 것은 엄청난 유혈사태를 각오하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리고 무대는 군에 의해 교통과 통신이 고립됐던 광주라는 지방도시가 아니고 그로부터 36년이 흐른 수도 서울이었다.
청와대가 공개한 ‘전시계엄 및 합수 업무 수행방안’의 세부 계획에는 헌법재판소에서 탄핵을 기각하고 이에 항의하는 대규모 시위가 벌어질 경우 단계적으로 위수령, 경비계엄, 비상계엄을 선포하는 시나리오가 들어 있다. 여소야대(與小野大) 의회에서 비상계엄 해제 결의를 하지 못하도록 야당의원들을 체포해 의결정족수(재적 과반수)를 미달시키려는 것은 헌정을 짓밟는 친위 쿠데타의 음모다.
기무사가 성안한 국회무력화 계획은 1980년 5월 전두환 신(新)군부의 전국 계엄확대 조치에서 배운 듯하다. 당시 신군부는 집총한 군인들로 중앙청을 포위하고 국무회의에서 제주를 제외한 비상계엄을 전국 계엄으로 확대 의결토록 했다. 계엄업무 체계에서 국방부장관을 배제하고 내각의 권한을 사실상 군부로 넘기는 결정이었다. 전두환 신군부는 의원들의 국회 등원을 막았다가 종국에는 의회를 해산했다.
대통령의 직무가 정지된 상황에서 기무사가 단독으로 이런 ‘친위 쿠데타’ 문건을 작성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기무사가 1차 촛불시위(2016년 10월 29일) 직후인 11월 초부터 계엄령을 선포하고 무력 진압방안을 검토했음을 보여주는 문건도 민주당 이철희 의원이 공개한 바 있다. ‘보고되고 만 문건’에 불과한데 문재인 대통령 정부가 과잉대응을 한다는 시각도 있지만, 헌정을 유린하는 내란(군사반란)은 미수죄는 물론 예비·음모·선전·선동 행위까지도 중하게 처벌한다(형법 89, 90조). 이런 구상을 누가 시작했고, 박근혜 대통령은 어디까지 알고 있었는지, 평화로운 집회에 공수부대와 탱크를 투입하는 것이 온당한 발상인지, 진상을 한 점도 남김 없이 규명해야 한다.
특히 ‘전시계엄 및 합수업무 수행방안’ 문건에는 촛불시위 진압에 특전사(공수부대) 병력을 동원하는 계획이 들어가 있다. 공수부대는 전시에 적지에 투입돼 적의 지휘부를 타격하고 게릴라 활동을 벌이는 부대다. 1980년 5·18 때 보안사 정보처장인 권정달 전 의원은 1996년 검찰 조사에서 “전두환 사령관 지시로 집권을 위한 여러 계획을 세웠고, 그에 따라 초기에 과도하게 진압할 목적으로 공수부대를 투입한 게 광주 비극의 원인이었다”고 진술한 바 있다.
전두환씨는 1980년 5·18의 발포가 현장에 있는 계엄군의 정당한 자위권(自衛權) 발동이라고 아직도 억지를 부린다. 이번 기무사 문건에서는 서울지역 위수령 발령 시 군병력의 ‘발포 가능시기’를 ①폭행을 받아 부득이한 때 ②다수 인원이 폭행해 진압할 수단 부재 시 등으로 규정해놓고 있다. 2016년 촛불시위가 일어난 서울에서 1980년 광주와 같은 ‘자위권 발동 상황’을 가정해놓은 것이다. 비상계엄을 선포해 국회를 무력화하고, 언론을 장악하는 문건을 기무사가 성안하면서 어떤 식으로든 박근혜 청와대와 의견 교환이 있었으리라고 보는 것이 합리적 추정이다.
기무사에는 아직도 비상계엄 하에서 정권을 창출한 ‘전두환 보안사’의 잔영(殘影)이 남아 있다. 소요사태 발생 시 계엄을 검토할 필요가 있었다면 계엄과가 있는 합참이 하는 게 맞고 기무사가 나설 일이 아니다. 기무사는 세월호 참사 시 민간인을 사찰하고 선거에 영향을 미치는 댓글부대를 운영한 불법행위도 저질렀다.
그러나 보안과 방첩활동을 하는 기무사를 해체하라는 것은 국가안보를 경시한 주장이다. 정치적 논란을 부르는 법 적용을 자제하면서 공정한 수사로 사실을 규명하고, 그 결과에 따라 기무사를 강도 높게 개혁하는 것이 정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