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대근의 차이나 무비⑨] 중국판 로미오와 줄리엣 ‘양산백과 축영대’… 홍콩영화계에 사극붐
2018-04-18 13:15
대륙과 대만영화계 이데올로기 함몰
이념 자유로운 홍콩 독자적 영화개척
리한샹 감독 전통사극 연출로 불세출
이념 자유로운 홍콩 독자적 영화개척
리한샹 감독 전통사극 연출로 불세출
대륙에 사회주의가 들어선 뒤, 중국 영화계는 삼분됐다. 영화는 대륙과 홍콩, 대만으로 나눠져 제작됐다. 대륙은 반제·반봉건이라는 교조에 매몰되고 대만은 반공이라는 이념에 함몰됐다.
그 사이에서 독자적인 영화 공간을 개척한 곳은 홍콩이었다. 홍콩영화는 1950년대부터 약 30여년간 중국영화를 대표했다. 2차 대전 이후 홍콩영화에서 빼놓을 수 없는 감독 중 하나가 바로 리한샹(李翰祥)이다.
중국 동북 지역에서 태어난 그는 어려서부터 예술에 뜻을 뒀다. 그림과 연극 공부를 하던 중 스물 남짓한 나이에 영화와 인연을 맺게 된다. 베이징(北京)과 상하이(上海)를 거쳐 홍콩으로 건너가면서 본격적인 영화 활동에 뛰어든다. 그는 1996년 70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반세기 가까운 세월을 영화에 몰두했다. 그가 남겨놓은 필모그래피는 100줄을 훌쩍 넘어선다.
리한샹 감독은 정통 사극 연출에 능했다. 그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영화는 역시 1963년 작 ‘양산백과 축영대(梁山伯與祝英台)’다.
이 영화는 동진(東晉) 시대를 배경으로 한 민담을 원작으로 한다. 민담은 나중에 황매조(黃梅調), 그러니까 안후이(安徽) 지역에서 유행한 전통 지방극이 됐다.
영화는 바로 그 연극을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중국 전통극은 노래를 부르는 방식으로 연출됐기 때문에 영화에도 가창(歌唱)이 삽입됐다. 일종의 중국식 뮤지컬 영화가 태어난 것이다.
축(祝)씨 집안 외동딸 영대는 출중한 미모에 학구열까지 남달랐다. 그러나 ‘독서’의 기회는 여자라는 이유로 좀처럼 찾아오지 않았다. 당시 서원은 남학생에게만 입학을 허락했기 때문이다.
영대는 끈질기게 부모를 설득해 남자로 변장을 하고 서원에 들어간다. 거기서 양산백을 만나게 되고 의기가 투합한 둘은 의형제를 맺는다. 3년 동안 함께 동고동락한 둘의 우정은 깊어간다. 그러나 산백은 영대가 여자일 줄은 꿈에도 알지 못한다. 영대는 어느 사이 산백을 깊이 사랑하기에 이른다.
중국에서 여장 남자에 관한 가장 대표적인 것은 ‘목란(木蘭) 이야기’다. 디즈니에서 애니메이션 ‘뮬란’으로 제작돼 유명세를 타기도 한 바로 그 이야기다. ‘목란’은 위진남북조 시대 연로한 아버지를 대신해 전쟁에 나선 딸 목란을 묘사한다.
전쟁이라는 남성성을 대신 수행하는 여성의 모습을 그렸기 때문에 오늘날 시각으로 보면 ‘여성의 남성화’라는 남성 우월주의의 관점이 아직 남아 있다.
그러나 ‘양산백과 축영대’ 이야기에서 영대는 비록 남장을 하지만 여전히 자신만의 여성성을 지키는 캐릭터로 묘사된다. 남장은 어쩔 수 없는 시대 상황에 대한 대응이지만, 자신의 정체성을 완전히 바꾸는 캐릭터가 아니라는 점에서 목란과 다르다.
다른 한편, 양산백에 대한 축영대의 사랑이 깊어진다는 설정도 마찬가지다. 둘 사이를 애정 관계로 설정하는 줄거리는 겉으로 보기에는 동성 간의 사랑을 다루는 퀴어물이지만, 결국엔 이성애 중심주의를 내포하고 있다는 측면에서는 시대적 한계를 보여준다.
영대의 부모는 딸이 공부를 핑계로 3년이 넘도록 집에 돌아오지 않자 초조해진다. 이에 거듭 편지를 보내 집으로 돌아올 것을 권하기에 이른다. 아버지의 재촉이 갈수록 심해지자 영대도 하는 수 없이 공부를 그만두고 집으로 돌아간다.
영대를 기다리고 있던 건 태수의 아들과 혼례를 치르라는 아버지의 명령이었다. 뒤늦게 사실을 알게 된 산백은 서둘러 영대의 집까지 찾아간다.
부모의 반대로 사랑을 이루지 못한다는 설정은 동서고금에 늘 있던 이야기다. 이 이야기를 중국판 ‘로미오와 줄리엣’이라고 부르기도 하는 까닭이다. 이야기는 꽤 단순하지만 영화는 다양한 볼거리를 섞어서 130분이라는 러닝타임을 만들어간다.
영대의 발랄한 성격과 남장 과정, 서원에서의 즐거운 공부, 산백과 영대 사이에 벌어지는 애틋한 에피소드 등이 전통 중국의 곡조와 함께 관객을 끌어들인다.
원치 않는 혼사를 치르러 가야만 하는 길에서 영대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듣는다. 영대를 향한 산백의 상사병이 결국 그를 죽음에 이르게 하고 말았던 것이다.
뜻밖의 소식에 가슴을 치며 애통해하던 영대는 꽃가마가 길을 나서자 예복을 벗어던지고 산백의 무덤 앞에 이르러 통곡한다. 그 순간 하늘과 땅이 갑자기 변고를 일으키더니 엄청난 회오리가 몰아치고 무덤이 열린다. 영대는 무덤에 몸을 던져 죽음으로 사랑을 이룬다. 무덤에서는 아리따운 나비 한 쌍이 하늘로 날아오른다.
이생에서 이룰 수 없는 사랑을 죽음으로써 완성하고, 한 쌍의 나비가 된다는 설정은 현실이 허락하지 않는 비극을 해피엔딩으로 극복하기 위한 상징이다. 원작의 이야기를 영화 역시 그대로 따라감으로써 새로운 해석을 가하기보다는 관객의 기대를 배반하지 않는 안정적 구조를 취한다.
우리가 마치 ‘춘향전’의 결말을 익히 알고 있으면서도 여러 번 읽고 듣고 보는 것처럼 ‘양산백과 축영대’ 또한 중국인에게는 변형될 수 없는 이야기인 것이다.
이 이야기는 이후에도 수십 편의 영화와 TV드라마로 재탄생했다. 그럼에도 이 영화가 리한샹 감독의 명작으로 남을 수 있었던 까닭은 바로 옛 이야기의 전통을 지키면서도 홍콩영화의 사극 붐을 불러왔기 때문이다.
홍콩 쇼브라더스가 제작한 영화는 당시 대만에서도 상영됐는데, 70만명이 넘는 관객을 모았다고 한다. 제2회 금마장에서는 최우수영화상을 비롯, 감독상, 여우주연상 등 6개 부문을 휩쓸기도 했다. 1960년대 홍콩과 대만 영화가 제작과 상영의 역할을 분담했던 중요한 사례이기도 한 것이다.
그 사이에서 독자적인 영화 공간을 개척한 곳은 홍콩이었다. 홍콩영화는 1950년대부터 약 30여년간 중국영화를 대표했다. 2차 대전 이후 홍콩영화에서 빼놓을 수 없는 감독 중 하나가 바로 리한샹(李翰祥)이다.
중국 동북 지역에서 태어난 그는 어려서부터 예술에 뜻을 뒀다. 그림과 연극 공부를 하던 중 스물 남짓한 나이에 영화와 인연을 맺게 된다. 베이징(北京)과 상하이(上海)를 거쳐 홍콩으로 건너가면서 본격적인 영화 활동에 뛰어든다. 그는 1996년 70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반세기 가까운 세월을 영화에 몰두했다. 그가 남겨놓은 필모그래피는 100줄을 훌쩍 넘어선다.
리한샹 감독은 정통 사극 연출에 능했다. 그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영화는 역시 1963년 작 ‘양산백과 축영대(梁山伯與祝英台)’다.
이 영화는 동진(東晉) 시대를 배경으로 한 민담을 원작으로 한다. 민담은 나중에 황매조(黃梅調), 그러니까 안후이(安徽) 지역에서 유행한 전통 지방극이 됐다.
영화는 바로 그 연극을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중국 전통극은 노래를 부르는 방식으로 연출됐기 때문에 영화에도 가창(歌唱)이 삽입됐다. 일종의 중국식 뮤지컬 영화가 태어난 것이다.
축(祝)씨 집안 외동딸 영대는 출중한 미모에 학구열까지 남달랐다. 그러나 ‘독서’의 기회는 여자라는 이유로 좀처럼 찾아오지 않았다. 당시 서원은 남학생에게만 입학을 허락했기 때문이다.
영대는 끈질기게 부모를 설득해 남자로 변장을 하고 서원에 들어간다. 거기서 양산백을 만나게 되고 의기가 투합한 둘은 의형제를 맺는다. 3년 동안 함께 동고동락한 둘의 우정은 깊어간다. 그러나 산백은 영대가 여자일 줄은 꿈에도 알지 못한다. 영대는 어느 사이 산백을 깊이 사랑하기에 이른다.
중국에서 여장 남자에 관한 가장 대표적인 것은 ‘목란(木蘭) 이야기’다. 디즈니에서 애니메이션 ‘뮬란’으로 제작돼 유명세를 타기도 한 바로 그 이야기다. ‘목란’은 위진남북조 시대 연로한 아버지를 대신해 전쟁에 나선 딸 목란을 묘사한다.
전쟁이라는 남성성을 대신 수행하는 여성의 모습을 그렸기 때문에 오늘날 시각으로 보면 ‘여성의 남성화’라는 남성 우월주의의 관점이 아직 남아 있다.
그러나 ‘양산백과 축영대’ 이야기에서 영대는 비록 남장을 하지만 여전히 자신만의 여성성을 지키는 캐릭터로 묘사된다. 남장은 어쩔 수 없는 시대 상황에 대한 대응이지만, 자신의 정체성을 완전히 바꾸는 캐릭터가 아니라는 점에서 목란과 다르다.
다른 한편, 양산백에 대한 축영대의 사랑이 깊어진다는 설정도 마찬가지다. 둘 사이를 애정 관계로 설정하는 줄거리는 겉으로 보기에는 동성 간의 사랑을 다루는 퀴어물이지만, 결국엔 이성애 중심주의를 내포하고 있다는 측면에서는 시대적 한계를 보여준다.
영대의 부모는 딸이 공부를 핑계로 3년이 넘도록 집에 돌아오지 않자 초조해진다. 이에 거듭 편지를 보내 집으로 돌아올 것을 권하기에 이른다. 아버지의 재촉이 갈수록 심해지자 영대도 하는 수 없이 공부를 그만두고 집으로 돌아간다.
영대를 기다리고 있던 건 태수의 아들과 혼례를 치르라는 아버지의 명령이었다. 뒤늦게 사실을 알게 된 산백은 서둘러 영대의 집까지 찾아간다.
부모의 반대로 사랑을 이루지 못한다는 설정은 동서고금에 늘 있던 이야기다. 이 이야기를 중국판 ‘로미오와 줄리엣’이라고 부르기도 하는 까닭이다. 이야기는 꽤 단순하지만 영화는 다양한 볼거리를 섞어서 130분이라는 러닝타임을 만들어간다.
영대의 발랄한 성격과 남장 과정, 서원에서의 즐거운 공부, 산백과 영대 사이에 벌어지는 애틋한 에피소드 등이 전통 중국의 곡조와 함께 관객을 끌어들인다.
원치 않는 혼사를 치르러 가야만 하는 길에서 영대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듣는다. 영대를 향한 산백의 상사병이 결국 그를 죽음에 이르게 하고 말았던 것이다.
뜻밖의 소식에 가슴을 치며 애통해하던 영대는 꽃가마가 길을 나서자 예복을 벗어던지고 산백의 무덤 앞에 이르러 통곡한다. 그 순간 하늘과 땅이 갑자기 변고를 일으키더니 엄청난 회오리가 몰아치고 무덤이 열린다. 영대는 무덤에 몸을 던져 죽음으로 사랑을 이룬다. 무덤에서는 아리따운 나비 한 쌍이 하늘로 날아오른다.
이생에서 이룰 수 없는 사랑을 죽음으로써 완성하고, 한 쌍의 나비가 된다는 설정은 현실이 허락하지 않는 비극을 해피엔딩으로 극복하기 위한 상징이다. 원작의 이야기를 영화 역시 그대로 따라감으로써 새로운 해석을 가하기보다는 관객의 기대를 배반하지 않는 안정적 구조를 취한다.
우리가 마치 ‘춘향전’의 결말을 익히 알고 있으면서도 여러 번 읽고 듣고 보는 것처럼 ‘양산백과 축영대’ 또한 중국인에게는 변형될 수 없는 이야기인 것이다.
이 이야기는 이후에도 수십 편의 영화와 TV드라마로 재탄생했다. 그럼에도 이 영화가 리한샹 감독의 명작으로 남을 수 있었던 까닭은 바로 옛 이야기의 전통을 지키면서도 홍콩영화의 사극 붐을 불러왔기 때문이다.
홍콩 쇼브라더스가 제작한 영화는 당시 대만에서도 상영됐는데, 70만명이 넘는 관객을 모았다고 한다. 제2회 금마장에서는 최우수영화상을 비롯, 감독상, 여우주연상 등 6개 부문을 휩쓸기도 했다. 1960년대 홍콩과 대만 영화가 제작과 상영의 역할을 분담했던 중요한 사례이기도 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