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석규의 대몽골 시간여행-206] 몽골의 ‘스탈린’은 누구인가?
2018-04-03 07:57
1,930년대가 시작되면서 소련이 사회주의 개혁을 몽골에 강압하는 과정에 두 가지 사실이 눈길을 끈다. 하나는 그 때까지 몽골의 사회주의화를 유도해온 코민테른의 역할이 크게 줄어든 점이다. 중국에서의 공산혁명 실패로 코민테른의 지도방침이 흔들리게 됐다는 의미가 될 것이다.
몽골이야 이미 안정적으로 영향권 내로 들어왔다고 소련이 판단했다면 굳이 코민테른이 나설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을 수 있다. 그래서 몽골에 대한 정치지도 역할이 소련 공산당으로 이전됐다. 말하자면 직할통제체제로 들어갔다는 얘기다.
▶급진개혁의 대리인 초이발산
이후 군 지휘관으로 임명됐던 그는 1,930년대 중반에는 몽골인민정부의회로부터 최고 장관인 동시에 외무부장관으로 임명됐다. 그의 이력을 보면 누구보다 소련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 인물이라는 점을 알 수 있다.
▶스탈린, 강압적 집단화 추진
소련의 스탈린은 자신의 권력 기반이 굳어지면서 레닌이 내세웠던 新경제정책 NEP(New Economic Policy)를 중단하고 농업의 집단화를 실시했다. 1차 경제개발 5개년에 의한 공업화 정책도 함께 추진했다. ‘자본주의로의 전략적 후퇴’라는 비판을 불러왔던 레닌의 신(新)경제정책을 접고 좌파가 주장하는 사회주의 공세에 나선 것이다.
▶집단화에 이어진 대숙청
집단화를 반대하다 처형되거나 강제 노역장에서 숨진 농민이 천만 명에 이르렀으니 그들 운명 역시 도살된 가축이나 다름없었다. 농민 뿐 아니라 당내 반발까지 이어지자 스탈린은 이를 계기로 당내에서 피비린내 나는 대숙청 치스뜨까(chistka:чистка)를 단행하게 된다.
청소한다는 치스찌지(chistiti:чиститъ)라는 말에서 따온 의미 그대로 치스뜨까를 통해 스탈린은 반대파를 말끔히 청소해 버린 것이다.
▶몽골 집단화추진에 거센 반발
집단화를 시도한 집권층은 이동하지 않으면서 생산성을 증대시키는 것에 초점을 맞추었다. 여기에 또 하나의 노림수로 정치적 통제를 수월하게 하려는 의도도 있었다. 생산성 측면에서 본다면 집단화 또는 정주화를 통한 유목은 효율성을 더 높일 수 있는 측면도 있었을 것이다.
▶초기 집단화추진 실패
엄격히 말하면 이동성이 차단된 목축은 유목이 아니었다. 특히 당시 몽골 전체 가축의 17% 가량이 티베트 불교 사원의 소유였다. 목축의 집단화와 종교에 대한 탄압을 동시에 추진했던 좌파 정권의 주요 목표물이 된 곳은 당연히 불교 집단이었다. 재산 몰수와 탄압에 직면한 이들은 유목민들과 합세해 생사를 건 저항에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