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련, 파탄잘리의 요가수트라] 몽자각夢自覺

2018-03-12 06:00
요가수트라 I.10

[사진=배철현 서울대 교수(종교학)]
 

나는 지금 이곳에서 이전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나를 발굴하고, 그런 나를 위해 살고 싶다. ‘지금의 나’를 찾고 발견하기 위해 가장 먼저 제거해야 할 것이 있다. 나의 말과 행동을 장악하는 무의식적인 습관이다. 이것이 바로 굳어진 ‘과거의 나’다. 적폐의 유일한 대상은 그것을 인식하지 못하는 내 자신이며, 그 존재를 제거해야 할 당위성과 시급함을 인정하지 못하는 나다. 자신을 깊이 살펴보지 않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을 손가락질하는데 총력을 기울인다. 그런 개인이 모인 후진 사회는 남들의 행복을 부러워하고 남들의 불행을 비난한다.

그들은 ‘지금’을 살지 못하고 과거를 기준삼아 산다. 참신한 지금과 미래를 진부한 과거로 뒤덮는다. 그런 사람이나 사회엔 신명도 없고 창의성도 없다.

‘지금’을 인식하고 ‘지금’을 살기 위해 나는 과거에 사로잡혀 어영부영 세월을 보내는 나를 깨워야 한다. 나는 지금 과거가 정해준 꿈을 꾸고, 그것을 살고 있는가? 아니면 꿈이 아닌 지금을 인식한 현실에서, 자각(自覺)의 삶을 살고 있는가? 나는 육체를 지니고 오감을 지닌 동물인가? 아니면 컴퓨터나 핸드폰 안에 존재하며 그 기계 안에 존재하는 다른 존재들과 소통하는 기호인가? 나는 누구이며, 지금 글을 쓰고 있는 내가 나라는 증거는 무엇인가?

파탄잘리는 인간의 생각의 유형을 다섯 가지로 구분했고, 그 유형들 가운데 경험에 의존하지 않은 두 가지 생각을 다시 소개했다. 하나는 자신이 어떤 것을 오감으로 경험한 적이 없는데, 자신이 경험했다고 실재로 생각하는 ‘착각’(요가 수트라 I.9)과 인간 삶 중 3분의1을 차지하는 수면에서 경험한 것을 실재로 생각하는 ‘몽자각’(요가 수트라 I.10)이다. ‘자각몽’이란 용어가 ‘꿈’에 초점이 맞추어 있어, 필자는 다른 용어를 사용할 것이다. 내가 꿈을 꾸면서, 그것이 꿈이라고 스스로 생각하는 행위를 ‘몽자각(夢自覺)’이라고 부르고 싶다.

19세기말 프로이트는 ‘꿈의 해석’에서 ‘의식’이란 인간 마음 속 깊은 곳에 존재하는 거대한 빙산(氷山)과 같은 ‘무의식’의 세계의 한 모퉁이인 일각(一角)이라고 주장했다. 꿈을 의미하는 한자 ‘몽(夢)’의 의미는 부정적이다. 저녁(夕)이 되어 어느 것도 확실하게 볼 수 없는 상태가 ‘꿈’이다. ‘꿈’이란 개념의 부정적인 의미는 서양에서도 발견된다. ‘꿈’에 해당하는 영어단어 ‘드림(dream)’이나 독일어 단어 ‘트라움(Traum)’은 영어와 독일어가 속하는 게르만어족의 어원 ‘드라우(*drau-)’에서 모두 유래했다. ‘드라우’의 본래 의미는 ‘속임: 환상’이다. ‘속이다’라는 독일어 동사 ‘트뤼겐(trügen)’도 이 어원에서 유래했다.

드루즈(druj)와 니드라(ni-drā)
‘꿈’이 영어나 독일어에서 ‘속이다’라는 의미를 지닌 이유를 역사적으로 더 거슬러 올라가면 인도의 산스크리트어와 이란의 아베스타어에서 찾을 수 있다. 영어나 독일어가 속한 게르만어가 등장한 시기가 기껏해야 기원후 7세기라면, 산스크리트어와 이란에 속한 인도-이란어는, 그보다 거의 2000년 앞선 기원전 12세기에 등장했다.

이란에서 사용된 가장 오래된 언어인 아베스타어는 기원전 7세기 ‘자라투스트라’라는 예언자가 집대성해 창시한 조로아스터교의 경전 언어다. 영어단어 ‘드림’과 같은 어원에서 나온 단어인 아베스타어 ‘드루즈(druj)’는 한자 몽(夢)처럼 ‘어둡다’라는 의미다. 조로아스터교 창조신화는 태초에 두 신이 경쟁했다고 전한다. 밝음, 따뜻함, 그리고 생명을 의미하는 질서의 신인 ‘아후라 마즈다(Ahura Mazda)’신과 어둠, 차가움, 그리고 죽음을 의미하는 혼돈의 신인 ‘앙그라 마인유(Angra Mainyu)’신이 우주의 패권을 놓고 용호상박한다. 선신인 아후라 마즈다는 ‘진리’인 ‘아샤(aṧa)’를 상징하고 악신인 앙그라 마인유는 ‘거짓’인 ‘두르즈’를 상징한다. ‘아샤’는 우주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며 ‘두르즈’는 그 모습에 대한 허상이다. ‘드루즈’는 ‘어둠’이자 ‘거짓’이다.

‘니드라(nidrā)’는 산스크리트어로 ‘수면: 숙면’이란 의미로 ‘드루즈’와 같은 어원인 ‘드르(dr-)’에서 왔다. ‘니드라’는 ‘앞으로 깊숙이’라는 의미를 지닌 접두사 ‘니(ni)’와 ‘잠자다’라는 의미를 지닌 ‘드라(drā)’의 합성어다. 파탄잘리는 자신을 자신답게 볼 수 없도록 방해하는 네 번째 요소를 ‘니드라’ 즉 ‘잠으로 깊숙이 들어가 자신이 오감으로 경험한 세계를 실재라고 착각하는 꿈’을 설명한다. 인도신화에서 우주의 원칙은 아베스타어 ‘아샤’와 같은 어원에서 유래한 산스크리트어로 ‘르타(ṛtá)’다. ‘르타’는 흔히 ‘우주의 질서’ 혹은 ‘진리’로 번역된다. ‘니드라’는 신화적으로 우주의 질서를 희미하게 만들고 거짓을 진실처럼 보이게 하는 허상이다.

 

네덜란드 정신과의사 '프데데릭 반 에덴'. [배철현 교수 제공 ]


자각몽(自覺夢)
네덜란드의 정신과의사 프데데릭 반 에덴(Frederik van Eeden)은 '꿈에 대한 연구'(1913)라는 논문에서 잠자는 사람이 자신이 꿈을 꾸고 있는 사실을 알고 있는 신기한 현상에 대한 논문을 발표한다. 그는 이 논문에서 자신이 연구한 352개 꿈 사례에서 이 특별한 형태의 꿈을 구별하여 ‘루시드 드림(lucid dream)’이라고 불렀다.

그는 영어단어 ‘루시드(lucid)’를 사용해 꿈을 설명한다. ‘루시드’는 라틴어에서 ‘빛’을 의미하는 ‘룩스(lux)’에서 파생된 단어로 ‘밝은, 선명한’이란 의미다. 그러므로 ‘어둠’ 혹은 ‘불투명’이란 의미를 지닌 ‘드림’과 연결하여 만들어낸 ‘루시드 드림’이란 표현은 형용모순이지만, 그 꿈으로 특징을 가장 잘 드러낸 용어다.

‘루시드 드림’은 동양에서 ‘자각몽’이라고 번역됐다. 자각몽은 자신이 꿈을 꾸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는 꿈과는 다르다. 자신이 꿈을 꾸고 있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꿈의 내용이 일정하다. 자각몽은 깨어 있는 상태와 거의 유사해 자신이 깨어 있는지 혹은 잠속에서 꿈을 꾸고 있는지 구별하기 힘들다. 장자가 꿈에서 보았다는 자신이 나비가 되어 훨훨 날아다니면서, 자신을 실제로 나비로 혼동했다는 ‘호접몽(胡蝶夢)’과 유사하다.

경전에 등장하는 성인들의 경험은 거의 ‘자각몽’이다. 모세가 호렙산에서 보았다는 ‘불타는 가시덤불’, 무함마드가 부르크라는 말을 타고 하늘로 올라갔다는 경험의 시간인 ‘권능의 밤’ 경험이 그런 것들이다. 혹은 오거스틴이 자신이 영적인 눈으로 보았다는 천상의 예루살렘으로 가는 순례를 적은 ‘신의 도성’ 혹은 단테가 베르길리우스와 함께 보았다는 지옥을 묘사한 ‘신곡’이 모두 자각몽의 기록들이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도 ‘자각몽’에 대해 말한다. “사람이 잠에 들 때, 꿈을 꾸면서 자신에게 펼쳐진 세계가 꿈이란 사실을 아는 특별한 인식이 있다.”

자각몽에 대한 가장 상세한 내용은 오거스틴이 415년에 기록한 한 이야기에 등장한다. 오거스틴은 카르타고의 의사 겐나디우스(Gennadius)를 인용하면서 자각몽을 다음과 같이 소개한다.

겐나디우스가 꿈에서 신비한 소년을 만났다. 그가 “당신의 몸은 지금 어디 있습니까?”라고 묻는다. 겐나디우스는 “내 침대”라고 대답한다. 다시 소년이 “당신의 몸에 있는 눈이 몸에 붙어있고 감겨져있다는 사실을 나는 압니다. 당신은 이 눈으로 아무것도 볼 수 없습니까?” 겐나디우스는 다시 대답한다. “그렇다.” 소년은 다시 장황하게 말한다. “당신 눈이 감겨져 있는데, 어떻게 나를 봅니까?” 겐다니우스는 “내가 어떻게 보는지 모르겠다.” 소년은 이런 식으로 어떻게 듣는지 말하는지 묻자 겐나디우스는 ‘나는 귀로 듣고, 말한다’라고 대답한다. 겐나디우스는 혼동에 빠져 자신이 그럴 수 있는 이유를 소년에게 묻자, 소년이 대답한다. “당신의 오감은 닫혀 있지만, 당신은 말하고, 듣고, 보고 느끼고 냄새를 맡는다.” 잠에서 깨어난 겐나디우스는 자신의 꿈을 깊이 생각하고, 육체의 오감으로는 감지할 수 없지만, 정신적이며 영적인 오감으로 감지할 수 있는 세계를 알게됐다.

몽자각(夢自覺)
파탄잘리는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없도록 만드는 다섯 가지 생각들 중 하나를 ‘요가수트라’ I.8에서 ‘니드라’란 단어를 사용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아바바-프라트야야-아람바나 브르티르-니드라(abhāva-pratyaya-ālambanā vr̥ttir-nidrā)” 이 문장을 직역하면 “깊은 잠(nidrā)은 실재가 없는 것(abhāva)을 기반(ālambanā)으로 표출된(pratyaya) 소용돌이(vr̥ttir)”다. 이 직역에서 문제가 되는 부분은 ‘깊은 잠(nidrā)’이다. ‘깊은 잠’ 자체가 나에게 어떤 허상을 보여주지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깊은 잠에서 내가 실재라고 착각한 어떤 것이 문제다. 그러므로 이 문장은 다음과 같이 해석해야 한다.

“깊은 잠을 통해 자신이 꿈을 꾸는 지도 모르게 깊이 들어가 꿈을 꾸는 자신을 보고 자신이 꿈을 꾸고 있지 않다고 확신하는 순간이 있다. 그 순간에 나는 꿈에서 본 것이기 때문에 당연히 실재가 없고, 그것을 기반으로 만들어진 오감을 자극하는 현상이야말로 허상중에 허상이며, 나의 본성을 찾지 못하도록 나의 시야를 흐리는 소용돌이와 같은 생각이다.”

내가 직접 경험하지 않는 것에 대해 현실에서 상상으로 자신의 편견 안에서 만들어낸 ‘착각’보다 더 심한 ‘착각’이 ‘몽자각’이다.

 

색안경. [배철현 교수 제공]


배움은 자신이 알고 있는 세계를 걷어내고, 지금이란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기 위한 시선을 수련하는 과정이다. 그러나 대부분 사람들에게 배움은 자신이 지닌 편견을 강화하는 수단이다. 내가 붉은 색 색안경을 가지고 있다고 가정하자. 나는 ‘내 자신’이란 과거를 통해 세상을 본다. ‘내 자신이란 과거’가 나의 ‘붉은 색안경’이다. 그러나 이기적인 동기로 배우는 사람들은 배우면 배울수록 그 붉은 색안경이 더 진해지고 두꺼워진다. 배운 사람이 대개는 더 무식하다.

몽지각으로 무장한 사람은 꿈을 꾸고 있는 자신을 보면서, 자신은 그 꿈에서 깨어난 사람으로 착각한다. 자각몽하는 자신도 아직 꿈속에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그런 사람은 스스로 자신은 미몽에서 깨어난 사람이라는 확신에 차있다. 소위 지도자들은 대부분 자각몽이라는 무기로 무장한 자들이다. 이들은 대개 자만으로 가득 차, 남들이 만들어 준 허상 안에서 자신을 돌보기를 게을리 한다. 아, ‘나도 역시(미투!)’ 그런 사람인지 살펴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