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석규의 대몽골 시간여행-192] 토르구트는 왜 돌아왔나? ②

2018-03-14 07:58

[사진 = 배석규 칼럼니스트]

▶열하일기의 무대 승덕(承德)

[사진 = 박지원]

중국의 승덕(承德)은 열하(熱河)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그 것은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이 쓴 열하일기(熱河日記)라는 기행문 때문이다. 연암은 1780년(정조4년) 건륭제(乾隆帝)의 70세 생신(七旬宴)을 축하하기 위해 사신으로 가는 팔촌형 박명원(朴明源)을 따라가 중국을 다녀왔다.
 

[사진 = 열하일기]

그는 열하와 요동, 북경 등을 다니면서 그 곳에서 보고 듣고 느낀 것을 기록한 견문기를 내놓았다. 청나라의 문물제도와 생활풍습을 소개하면서 그 것을 바탕으로 조선을 개혁해보자는 뜻에서 스물여섯 편의 글을 일기 형식으로 남긴 것이다. 그 것이 바로 열하일기다.

▶겨울에도 얼지 않는 열하(熱河)

[사진 = 열하 피서산장]

열하는 여름에는 시원하고 주변에 온천이 많아 겨울에도 냇물이 얼지 않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기후가 그런 만큼 주변 산수도 뛰어나 강희제 이후 역대 청나라 황제들은 매년 4월에서 9월까지 그 곳에서 머물렀다.

황제가 묵었던 피서산장(避暑山莊)은 1703년 강희제 때부터 짓기 시작해 몇 대의 왕조에 거쳐 증축되면서 지금의 모습을 갖췄다. 황제가 피서산장에 머무는 동안 중신들도 함께 따라가 그 곳에서 업무를 보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고 각 국의 사신들도 그 곳에서 황제를 알현해야했다.

사신을 따라온 박지원이 열하에 들린 것은 이런 연유 때문이었다. 그들은 열하를 방문한 최초의 조선 사절단이었다. 연암이 열하에 들렀을 당시는 건륭제 45년으로 건륭제가 7순을 눈앞에 둔 시점이었다.

▶환갑 때 세운 토르구트 기념비

[사진 = 건륭제 집무실(열하)]

연암이 열하에 들리기 9년 전인 1,771년, 건륭제는 열하에서 6순을 맞았다. 건륭제가 6순을 맞은 때에 맞춰 러시아 볼가강변에 있던 토르구트가 옛 조상의 땅 일리로 돌아왔다. 토르구트인이 일리에 도착했을 때는 당초 17만 명이었던 수가 7만 명으로 줄었고 그 지역에 창궐하던 천연두 전염병으로 도착한 뒤에도 상당수의 사람들이 희생됐지만 그런 것은 건륭제에게 별 문제가 아니었다.

토르구트가 먼 러시아 땅에서 자신의 지배 아래로 들어온 그 자체가 건륭제에게는 큰 기쁨이었다. 그 것은 환갑을 맞은 건륭제에게 큰 선물이었다. 그래서 그들의 귀환을 기념하고 자신의 통치가 그들에게 미치게 된 것을 자축하는 기념비를 열하에다 세웠다.

▶관광도시가 된 승덕

[사진 = 토르구트 귀환로]

과거 열하로 불리던 도시의 이름이 지금은 승덕(承德)으로 바뀌었다. 북경에서 동북쪽으로 250Km 떨어진 곳에 있다. 오후에 북경을 떠나 저녁 무렵에 승덕에 도착한 필자는 그 곳 설산(雪山)호텔에 들었다.
 

[사진 = 토르구트 전부 귀순비]

호텔 안은 많은 관광객들로 붐비고 있어 이곳이 관광도시임을 실감나게 만들어줬다. 피서산장이 있는 승덕은 북경에서 비교적 가까운 곳에 있기 때문에 항상 많은 관광객들이 몰린다는 것이 안내인의 설명이었다. 승덕에 들린 것은 순전히 건륭제가 세웠다는 토르구트 전부귀순기비(全部歸順記碑), 즉 토르구트 부족 모두가 귀순한 것을 기념하는 비석을 찾아보기 위해서였다.

▶불교 사원에 세워진 기념비

[사진 = 열하 티베트 불교 사원]

토르구트 귀순 기념 비석은 피서산장 뒤쪽에 있는 보타종승지묘(普陀宗乘之廟)입구에 서있었다. 티베트 라싸에 있는 포탈라궁을 본 따 지었다고 해서 소포탈라궁이라고도 불리는 티베트 불교 사원이었다. 사원 입구의 중앙에는 티베트 불교 사원에서 자주 보아온 사슴 한 쌍이 마주보고 있는 것이 눈에 들어 왔다.
 

[사진 = 보타종승지묘 관관객]

건륭제가 세웠다는 비석은 매표구를 지나자마자 첫 번째 마주치는 곳에 세워져 있었다.
 

[사진 = 토르구트 전부 귀순기]

나란히 서 있는 세 개의 대형 비석 가운데 중앙에 있는 것은 피서산장 건립 기념비였고 양편에 서있는 것이 토르구트 귀순기념비였다.

▶귀환 칭송․덕치 자축
이 기념비는 원래 피서산장에 있던 것을 이곳으로 옮겨 놓은 것이었다. 피서산장 기념비는 비교적 글씨가 또렷했으나 토르구트 비문은 군데군데 흐릿해진 부분이 많았다. 높이 6미터 폭 1미터 가량의 비석에는 한자어와 고대 몽골어로 토르구트족이 귀환한 것을 칭송하고 덕치(德治)가 그들에게까지 미쳤다는 것을 자축하고 있었다.

"토르구트가 러시아를 등지고 볼가강에서 항복해 왔다. 회유한 것도 아닌데 황제의 덕화(德化)를 흠모해 왔으니 은혜와 자비가 널리 미친 것이다. 러시아로서도 무슨 할 말이 있겠는가? 이들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적이 될까 염려되나 안도시키니 모두 나의 백성이 되었네. 이로부터 남아 있는 모든 몽골 부족은 하나로 돼 신복(臣僕)하지 않는 것이 없게 되었네."

▶예속의 세월 알리는 弔文

[사진 = 만수탑(萬壽塔) 주변의 여름(열하)]

이 비문은 몽골이 청나라의 품으로 완전히 들어왔다는 것을 알리면서 건륭제의 치적을 선전하고 있다.

하지만 몽골인들에게 이 기념비는 한 때 세계를 정복하고 세계를 떨게 만들었던 자신들이 이제 정복자 자리에서 비켜나 남의 지배를 받고 살아가는 처지로 전락했다는 것을 알리는 조문(弔文)이나 마찬가지였다. 실제로 이때부터 시작된 예속의 세월은 길고도 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