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보기의 그래그래] '이'도 '잉'도 아닌 게 情은 깊어라
2018-03-02 06:00
"가시내야/너의 가슴 그늘진 숲속을 기어간 오솔길을 나는 헤매이자/술을 부어 남실남실 술을 따르어/가난한 이야기에 고히 잠거다오(···) 부서지는 파도소리에 취한 듯/때로 싸늘한 웃음이 소리 없이 새기는 보조개/가시내야/울 듯 울 듯 울지 않는 전라도 가시내야/두어 마디 너의 사투리로 때아닌 봄을 불러줄게/손때 수줍은 분홍 댕기 휘 휘 날리며/잠깐 너의 나라로 돌아가거라"(이용악 시(詩) ‘전라도 가시내’ 중)
나라를 일본에 빼앗겨 ‘무쇠다리를 건너 북간도로 온’ 함경도 사내와 ‘전라도 가시내’가 대폿집에서 만났다. 사내는 ‘너의 사투리로 때아닌 봄을 불러’주겠다고 한다. 나는 궁금하다. 휴대폰도, 인터넷도, 심지어 고속도로도 없었던 시대에 함경도 사내는 과연 전라도 사투리를 알고는 있었을까? 함경도 사람이 경상도 사람을 만나면 ‘그게 무엇입니까?’ 질문을 사이에 두고 ‘뭐꼬?’와 ‘무시기?‘를 서로 몰라 ‘뭐꼬가 무시기?’ ‘무시기가 뭐꼬?’를 반복하던 시절에 말이다.
사람도, 경제도, 문화도 서울이 중심이자 일등인 나라에서 사투리는 원래 서울말과 ‘다른 말’일 뿐이었건만 이제는 ‘틀린 말’이 된 지 오래다. 경상도, 전라도, 충청도 불문하고 ‘구수한 남도 사투리’는 듣기 좋으라 하는 말일 뿐, 실상은 개그 프로그램의 ‘웃기는 말’로나 쓰인다. 서울 번화가 으리으리한 식당에서 종업원에게 자신의 고향사투리로 투박하게 주문을 하는 사람은 뒤돌아선 종업원의 얼굴에 번지는 서 푼짜리 미소를 각오해야 한다. 좀 서툴더라도 ‘알흠다운 서울말’을 흉내내는 것이 필요하다. 신기술 농법으로 성공한 두메산골 농사꾼도 방송국 기자와 인터뷰를 할작시면 “갖은 어려움을 이겨낸 결과 오늘날의 성공을 거두게 되었습니다”라고 어색한 문어체 서울말을 해야 보다 세련된 농사꾼이다.
전라도 사람들의 ‘~합시다, ~하세, ~해라’ 등 청유형이나 명령형 문장의 끝에는 어김없이 ‘잉’이 붙는다. “모다 항꾸네 할라믄(모두 함께 하려면) 탁구 말고 야구로 합시다잉. 우리 가찹게(친하게) 지내세잉. 밥은 묵고 댕개라(다녀라)잉. 잘 가라잉. 아따, 거시기하요잉” 식이다(대부분 전라도 사투리로 알고 있는 ‘거시기’는 표준말이다). 이때의 ‘잉’은 말하는 이와 듣는 이의 맥락에 따라 부탁, 명령, 애정, 염려, 위로 등 다양한 뜻을 담는다.
‘잉’은 또 말하는 이의 진의(眞意)에 따라 억양도 살짝 달라진다. 위로의 뜻일 때는 낮고 길게 이어지나 위협이나 경고의 뜻일 때는 강하면서 끝이 올라가는 식이다. 이와 비슷한 어휘로 ‘~해라와’의 ‘와’가 있는데 가까운 사이(혈육)에 염려하는 뜻이 ‘잉’보다 더 강한 경우가 많다. 문장 끝 한 개의 어휘로 말하는 이의 말로 할 수 없는 수많은 감정까지 전달하는 기능이 사투리란 이유로 외면되기엔 그 가성비가 너무 아깝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