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치산 토벌대장 차일혁의 삶과 꿈] 동북아 비극 시대에 민중의 지팡이가 되다
2018-02-12 14:40
차일혁이 만난 장군과 군인들
물론 그들 중에는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었지만 최소한 차일혁이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했던 상대들은 그런 부류에 가까운 의식있는 사람들이었다.
차일혁이 제18전투경찰대대장을 맡으면서 처음 만났던 사람은 당시 전북지구전투사령관이었던 최석용 대령이었다. 최석용(崔錫鏞) 대령은 항일독립군 시절 동지였다가 광복 후 다시 상하 관계로 만났던 인연이었다. 그는 차일혁의 전투지휘관으로서 능력을 인정하고 군으로 복귀할 것을 권유했으나 차일혁의 반대로 성사되지 못했다. 최석용은 나중에 장군으로 진급하여 사단장과 부군단장을 역임했다. 군에 있을 때는 빨치산 토벌작전에 깊이 관여했다.
차일혁은 경상도를 비롯하여 전라남북도에 대한 빨치산토벌작전을 총지휘했던 최덕신(崔德新) 11사단장과는 업무적으로 자주 만났다. 차일혁이 빨치산 토벌에서 크게 공을 세우면 최덕신 장군이 차일혁 부대를 방문하여 표창장을 수여하고 차일혁과 대원들을 격려했다.
그러나 최덕신은 주민들을 배려하지 못한 무리한 토벌작전으로 대한민국 육군토벌사(陸軍討伐史)에 깊은 오점을 남기기도 했다. 바로 11사단에 의해 자행된 ‘거창양민사건’이었다. 그 사건으로 11사단은 전방으로 가게 되고, 대신 국군8사단이 새로운 빨치산토벌부대로 오게 됐다. 당시 8사단장은 인품이 뛰어나고 덕망까지 두루 갖춘 최영희 준장이었다.
최영희(崔榮喜) 장군과 차일혁은 처음부터 의기투합했다. 차일혁이 보기에 최영희 장군은 이제까지 겪어본 장군들과 여러 면에서 많이 달랐다. 최영희 장군은 영남·호남·충남을 아우르는 삼남(三南)지구토벌사령관이라는 막중한 직책을 수행하면서도 늘 겸손함을 잊지 않았고, 작전에 있어서는 전투경찰들을 배려함이 눈에 역력했다.
그 결과 짧은 기간이었지만 군경(軍警)은 그때만큼 빨치산토벌에서 많은 전과를 거두게 된 적도 없었다. 차일혁과 최영희 장군의 만남은 오래가지 않았다. 최영희 장군의 부대가 얼마 안 돼 전방으로 가게 됐기 때문이다. 최영희 장군은 작전을 마치고 전방으로 떠날 무렵에 차일혁을 찾아와 군에 복귀하여 자신과 같이 함께 전선에서 싸울 것을 권유했다.
하지만 차일혁은 부하들과 목숨을 걸고 약속했던 “절대로 자신의 명리(名利)를 위해 제18전투경찰대대를 떠나지 않겠다.”는 약속을 지키기 위해 단호히 거절했다. 최영희 장군은 차일혁의 전투지휘능력을 높이 평가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런 권유를 했던 것이다. 특히 두 사람은 불심(佛心)이 가득한 불교신자였다. 그러기에 불필요한 살생을 금하면서 주민들을 보살피며 작전을 훌륭하게 수행할 수 있었다.
차일혁과 백선엽 장군은 군의 빨치산토벌지휘관과 경찰의 빨치산토벌대장으로 만났다. 당시 차일혁은 무주경찰서장으로 있으면서 백선엽 장군이 총지휘하는 지리산 일대의 빨치산토벌작전에 참가했다. 이후 차일혁은 서남지구전투사령부 제2연대장 시절, 당시 육군참모총장으로 있던 백선엽 대장의 방문을 받고 기념사진을 찍기도 했다. 차일혁과 백선엽은 1920년 생으로 동갑이기도 하다.
차일혁은 제2연대장 시절 박정희(朴正熙) 대통령과 깊은 인연을 갖고 있던 이용문(李龍文) 장군을 만났다. 당시 이용문 장군은 지리산 일대의 빨치산토벌을 책임지고 있던 남부지구경비사령관이었다. 당시는 전투경찰도 서남지구전투경찰사령부를 설치하여 군과 독자적인 작전을 펼치고 있을 때라, 군의 작전지휘는 받지 않았으나, 작전상 서로 협조관계에 있었기 때문에 자주 만났다. 나이가 비슷했던 차일혁과 이용문은 서로 잘 어울렸다. 박정희 장군이 존경했던 군인이 이용문 장군이었는데, 이용문은 차일혁을 만나면 박정희에 대해 자주 이야기를 했다.
하지만 이용문은 남부지구경비사령관 시절 육군본부가 있는 대구로 출장을 가기 위해 비행기를 탔다가 기상 악화로 타고 가던 비행기가 추락하면서 그만 순직하고 말았다. 아까운 죽음이 아닐 수 없었다. 이용문은 사후(死後) 육군소장으로 추서됐고, 박정희 대통령은 기병장교이던 이용문 장군을 기리기 위해 육군사관학교 승마대회(乘馬大會) 명칭을 ‘용문배(龍文杯)’로 정하고 매년 기념행사를 열었다. 또 아들인 이건개가 사법시험에 합격하자 청와대로 불러 일을 하게 했고, 나중에는 젊은 나이에 서울시경국장으로 발탁하기도 했다. 그 모든 것이 이용문 장군에 대한 존경심 때문이었다.
차일혁이 서전사 2연대장을 하면서 지리산 일대의 빨치산토벌을 위해 국군5사단을 이끌고 내려왔던 박병권(朴炳權) 장군과도 친했다. 당시 박병권 장군이 사단장으로 있던 5사단은 지리산일대의 빨치산을 뿌리 뽑기 위해 토벌부대로 내려왔다.
5사단은 사단장인 박병권 장군의 성을 따서 ‘박전투사령부’로 불렀다. 그러나 박병권 장군이 얼마 되지 않아 영전해 가자, 그 후임에 당시 부사단장이던 한신(韓信) 장군이 지휘권을 인수하게 됐다. 따라서 전투사령부 명칭도 한신 장군의 성을 따서 ‘한전투사령부’로 바뀌게 됐다. 차일혁은 박병권과도 친분이 깊었지만, 한신 장군과도 잘 지낸 사이였다. 두 사람은 전투에 대해서만큼은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명장(名將)’들이었다. 그만큼 전투에 대해서는 일가견이 있었던 인물들이었다.
차일혁과 박병권 장군은 아주 친하게 지냈다. 군인들 사이에 박병권 장군은 ‘면도날’이라는 별명을 들을 정도로 원리원칙을 중시했던 청렴결백한 인물이었다. 그런 점에서 박병권 장군은 차일혁과도 통하는 것이 많았다. “끼리끼리 어울린다.”고 하는 유유상종(類類相從)이라는 말이 전혀 틀리지 않았다. 배포가 큰 사람은 큰 사람끼리, 의리가 있는 사람은 의리가 있는 사람끼리 모이게 마련이다. 반면에 소인들은 소인들끼리 어울리게 된다. 그게 세상사는 사람들의 이치였다.
박병권 장군은 5·16 후 국방부장관을 지내게 됐는데, 박정희 장군의 민정이양(民政移讓) 번복 결정에 반대함으로써 결국 장관직에서 물러나게 됐다. 평소 지론이 군의 정치적 중립이었는데, 그는 이를 무척이나 실천하려고 애썼던 군인이었다. 그러다보니 군 시절 부하들로부터 신망(信望)이 두터웠다. 4·19후 군에 정군(整軍) 운동이 거세게 불었을 때, 군에서는 박정희 장군과 박병권 장군을 차기 육군참모총장 감으로 추천했다고 한다. 그러나 두 사람이 아닌 다른 사람이 육군참모총장으로 기용됐다.
그 정도로 두 사람은 군 장교들로부터 실력을 인정받았고, 신망도 두터웠다. 거기다 두 사람은 청렴결백(淸廉潔白)하기까지 했다. 사실 차일혁도 박병권 장군의 소개로 박정희 장군을 만나 안면을 트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고 보면 차일혁은 박정희에 대해서 여러 사람들로부터 소개를 받은 셈이다. 사람의 인연은 그렇게 맺어지는가 보다.
5·16이전 박정희와 박병권, 두 사람은 다시 군의 간부들로부터 군의 지도자 감으로 주목을 받게 된다. 누구를 혁명의 지도자로 삼을 것인가 하는 논의에서 박정희 장군과 박병권 장군이 물망(物望)에 올랐다고 한다. 그러다 결국 박정희 장군으로 최종 결정이 났다.
차일혁과 인연이 있으면서 친하게 지냈던 두 사람의 인물이 이 나라 지도자감으로 거론된 셈이다. 5·16후 차일혁이 살아 있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재미있는 상상이 아닐 수 없다.
진해경찰서장 시절 차일혁은 육군대학 총장으로 있던 이종찬(李鐘贊) 장군을 만나 깊은 우정을 쌓게 된다. 때로는 잠시 세상을 잊어버리고 마음 편히 세월을 낚는 술친구로서, 때로는 한국정치의 현실을 논하는 서로를 달래고 이해하는 친한 벗으로서, 때로는 시와 음률을 즐기는 풍류객(風流客)으로서, 때로는 서로의 아픔을 달래주는 진정한 친우로서, 때로는 전투를 지휘했던 무인으로서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그 과정에서 해군사관학교 교장으로 있던 이용문 형인 이용운(李龍雲) 제독도 만났고, 당시 진해에 와 있던 공군 고급장교들도 여러 만났다.
특히 진해시 관할의 헌병대장으로 와 있던 이광선(李光善) 중령도 만났다. 이광선 중령은 차일혁이 제18전투경찰대대장을 할 때 그곳 관할 헌병대장이었다. 그때부터 두 사람은 잘 알고 지내던 사이였다. 그때는 소령이었는데, 차일혁이 진해경찰서장으로 와서 보니 중령으로 진급해 있었다. 이광선은 육군사관학교 5기생으로 채명신(蔡命新) 장군과 동기생이었다.
그는 5·16 때 장도영(張都映) 육군참모총장의 명을 받고 쿠데타군의 지휘자이던 박정희 소장을 6관구사령부로 체포하러 갔다가 오히려 그에게 감화되어 쿠데타군에 합류했던 인물이다. 그가 적극적으로 나섰다면 대한민국 역사가 또 어떻게 변했을지 모를 일이었다. 진해에서 차일혁과 관할 헌병대장이던 이광선 중령은 업무적으로 잘 협조하며 친하게 지냈다.
그 결과 두 사람은 경찰서장과 헌병대장의 신분으로 군사도시인 진해에서 서로 부딪히는 일이 없이 잘 지낼 수 있었다. 거기에는 이유가 있었다. 무엇보다 두 사람의 마음이 서로 잘 통했기 때문이다. 이광선 중령은 나중에 준장으로 진급했다. 장군의 반열에 오른 것이다. 그런 그도 오래전에 작고하고 이 세상에 없다.
차일혁은 이외에도 많은 장군들 및 군인들과 친분이 있었다. 6·25전쟁초기 차일혁에게 육군대위 계급장을 부여하고 ‘7사단 구국의용대장’ 직책을 맡겼던 신태영(申泰英) 장군도 그렇고, 광복군 출신의 송호성(宋虎聲) 장군과 박기성(朴基成) 장군들과도 친분이 있었다.
특히 낙동강 전선 때 일찍 전사한 대한민국의 마지막 기마대대장(騎馬大隊長)이었던 광복군 출신의 장철부(張哲夫) 중령과도 친분이 두터웠다. 장철부 중령이 뒤늦게 귀국했을 때 차일혁은 그에게 육군사관학교에 들어갈 것을 권유했다. 그래서 장철부는 육군사관학교 5기로 군에 들어가 대한민국 장교로 진출하게 됐다. 그런 장철부 중령이 전사했다는 말을 나중에 전해 듣고, 차일혁은 깊은 슬픔에 잠기기도 했다.
차일혁이 광복 이후 그리고 빨치산토벌대장과 진해경찰서장으로 있으면서 맺은 군인들과의 인연은 남달랐다. 작전지역에서의 짧은 만남이었지만, 차일혁이 만난 군 지휘관들과 군인들은 차일혁에게 모두 깊은 인상을 받았다. 그리고 그 인상은 차일혁이 죽은 후에도 오래도록 남았다.
그렇게 된 데에는 차일혁의 멸사봉공(滅私奉公) 정신과 주민을 아끼는 측은지심(惻隱之心), 남을 위하는 이타심(利他心)과 배려심(配慮心), 남을 돕고도 전혀 생색을 내지 않는 군자(君子)와 같은 넉넉한 마음이 늘 몸에 베여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같은 무인(武人)으로서 전투지휘를 잘 했다는 것이었다. 그것이 오랫동안 차일혁을 생각하게 하고, 그리워하게 한 까닭들이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