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젠 사정권에 왔다.”

호주오픈 4강 신화를 쓰며 한국 테니스의 역사를 바꾼 정현(한국체대)이 더 높은 곳을 바라봤다. 그가 말한 ‘사정권’은 이제 그랜드슬램 우승이다. 겸손했지만 여유와 자신감은 넘쳤고, 세계 최고를 향한 목표는 뚜렷했다.

정현은 2일 반얀트리 클럽 앤 스파 서울 더호텔에서 열린 라코스테와 함께하는 그랜드슬램(GS) 4강 진출 축하 기자간담회를 통해 공식석상에 올랐다. 이날 테니스 유니폼을 벗고 20대 초반의 청년답게 말끔하게 차려입은 정현은 특유의 입담을 과시하며 긍정적인 에너지를 발산했다.

밝은 표정으로 나선 정현은 “한국에 와서 이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나와 반겨줄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며 “더 높은 곳을 향해 가도록 노력하겠다”고 밝혔다.

정현은 지난달 끝난 호주오픈에서 한국 테니스 역사상 처음으로 그랜드슬램 4강 진출의 쾌거를 거뒀다. 정현은 세계랭킹 4위 알렉산더 즈베레프(독일)와 전 세계랭킹 1위 노박 조코비치(세르비아)를 꺾으며 이 대회 최대 이변의 주인공으로 떠올랐다.

4강에서 ‘테니스 황제’ 로저 페더러(스위스)를 상대로 발바닥 물집 부상 투혼을 벌인 정현은 결국 부상 악화로 기권하며 아쉽게 대회를 마무리했다. 하지만 정현은 이 대회에서 개인 최고의 성적을 거두며 이형택의 세계랭킹 36위를 넘어 한국인 역대 최고 랭킹인 29위에 올라 새 역사를 썼다.

특히 정현은 이 대회에서 뛰어난 경기력뿐 아니라 코트를 휘저으며 뛰는 지치지 않는 체력으로 감동을 선사했고, 특유의 재치 있는 입담을 과시한 인터뷰와 세리머니로 화제를 모았다.

이 대회 이후 충분한 휴식을 가진 정현은 현재 부상에서도 어느 정도 회복 단계에 들어섰다. 정현은 다음 주부터 정상적인 훈련이 가능하다는 진단을 받은 상태. 정현은 “다음 주에는 훈련을 시작하면서 다음 대회 출전 일정도 잡을 것”이라며 “갑작스럽게 좋은 성적을 내서 더 높은 목표를 어떻게 설정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이젠 (우승) 사정권에 왔다고 생각한다. 언젠가는 시상대에 오를 것이란 기대감과 욕심이 있다”고 각오를 다졌다.
  다음은 정현과 일문일답.

▲박세리, 김연아, 박태환 등과 비교되며 새로운 스포츠 스타로 주목받고 있다. 국내 인기를 체감하나?
한국에 와서 길거리를 돌아다니지 못해 어느 정도인지 모르겠다. 호주오픈 4강 이후 기대는 했지만, 인천공항에 나왔을 때 정신이 없을 정도로 상상 이상으로 많이 나와 주셔서 깜짝 놀랐다. 내가 ‘정말 큰 대회에서 잘했구나’라고 생각했다.

▲SNS 인스타 팔로워도 화제가 됐다. 목표였던 10만 명을 넘었다. 또 다른 목표를 설정했나.
호주오픈 당시 지인들이 1만 명 정도에서 시작해는데 몇 배로 뛰고 있다고 하더라. 조코비치를 이기면 10만 명은 넘을 것이라고 했는데, 나한테는 긍정적인 마인드를 심어주는 동기부여가 됐다. 10만 명 찍었으니 더 잘하게 되면 100만 명까지 도전하겠다. 갈 때까지 가보겠다.(웃음)

▲5월에 열리는 프랑스오픈 목표가 있나.
지난해 클레이코트에서 좋은 성적을 거둔 기억이 있고, 올해 시작을 좋은 성적으로 했다. 더 높은 곳을 향해 가기 위해 노력하고 욕심을 내고 싶지만, 너무 갑자기 좋은 성적을 내서 목표를 어떻게 잡아야 할지 모르겠다. 목표 설정을 잘해야 할 것 같다. 이젠 (우승) 사정권에 왔다. 언젠가는 시상대에 오를 것이란 기대감과 욕심이 있다. 잘하는 선수들을 보면 클레이코트와 하드코트를 가리지 않고 모든 코트에서 잘해야 한다. 클레이코트 시즌에 준비를 잘해서 잘해야겠다.

▲패션 센스도 뛰어난 것 같다. 자신의 패션 스타일은 어떻다고 보나.
운동복만 입고 지내다보니 사실 패션은 잘 모른다. 라코스테 후원사에서 잘 입혀 주신다. 평소에는 보일 듯 보이지 않게 깔 맞춰 입는 것이 제 패션 철학이다. 지금도 줄무늬가 살짝 보이게 입었다.(웃음) 지금은 옆에서 주는 대로 입으니까 그 안에서 맞춰 입으려고 하고 있다. 다른 액세서리는 신경 쓰지 않는데 시계는 어디가나 꼭 차려고 한다. 안경은 대회장에 갈 때는 혹시 무슨 일이 생길지 몰라 5개 정도 챙겨간다.

▲튼튼한 허벅지도 화제가 됐다. 체력 훈련 어떻게 하고 있나.
일단 경기에 들어가기 직전까진 손에서 물을 놓지 않고 있다. 연습을 실전처럼 하려고 노력한다. 연습과 실전은 너무 차이가 나다보니까 연습할 때도 머리론 실전처럼 해야 한다는 이미지트레이닝을 하면서 하려고 엄청 노력한다.

▲국내 다른 종목 친한 스포츠 선수들이 있나.
친분은 잘 없지만, 스포츠를 즐기는 팬으로 배구 코트를 가본 적이 있다. 그래도 다른 선수들과 친해지려고 노력하는 편이다. 다른 스포츠 선수들은 어떻게 스트레스를 이겨내는지 공유하고 싶어서 알려고 노력하고 있다. 테니스에도 팬들이 많이 오시게 하려면 내가 더 높은 곳으로 가야 할 것 같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될 것 같다.

▲한국에선 테니스 열풍이 불고 있다. 실감하나.
평소 뉴스를 많이 찾아보는 편은 아니다. 이번 호주오픈 기간에는 포털사이트 실시간 검색어에 호주오픈 테니스나 나와 관련된 것이 계속 올라와 찾아봤다.

▲별명이 교수님인데, 테니스를 하지 않았다면 지금 무엇을 하고 있을 것 같나.
IMG로 첫 유학을 갔을 때 나온 별명이다. 안경 쓰고 차분히 경기를 하다 보니 붙은 별명이다. 학생 때는 쉬는 시간 10분만 있어도 나가서 친구들과 공을 차고 들어오고 그랬다. 아마 테니스를 안했다면 친구들과 축구하고 저녁 먹고 술 마시면서 평범하게 지냈을 것 같다.

▲호주오픈 당시 현지 한국 팬들이 굉장히 많았는데, 느낌이 남달랐을 것 같다.
다른 외국 팬들은 영어로 응원한다. 하지만 경기 도중 한국말이 들릴 때나 태극기가 보일 때 뿌듯하고 감사함을 느낀다.

▲테니스 동호인들한테 도움이 되는 팁을 해준다면.
그분들의 스윙을 건드릴 수가 없어서 어렵긴 하다. 다만 자신만의 리듬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온몸에 힘을 뺀 채 스윙을 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중요하다. 나도 그렇게 하려고 노력한다. 테니스는 계속 이어서 10번 이상 랠리를 해야 하기 때문에 리듬을 스스로 맞춰야 가능하다.

▲호주오픈 이후 ‘캡틴, 보고 있나’의 주인공인 김일순 전 삼성증권 감독을 만났나.
어제 저녁에 만나서 맛있는 거 먹으면서 그동안 못했던 이야기를 나누고 왔다. 감독님께서 “우리가 너무 사진 찍은 게 없다. 언제 볼지 모르니까 사진 많이 찍자”고 하셔서 사진을 많이 찍었다.(웃음)

▲이번 조코비치와 경기 영상이 호주오픈 유투브 계정 3위에 올랐다. 자신의 영상을 다시 봤나.
내 경기 영상은 안 보는 게 아니라 못 보는 편이다. 내 스윙이 마음에 안 들기 때문에 오그라들어서 잘 못 보는 편이다. 이겨도 거의 안 보고, 지면 더 못 본다. 다른 선수들의 스윙은 많이 찾아본다.

▲호주오픈에서 결정적 승부처가 된 경기는.
조코비치와 2년 전에 경기를 해봤고, 똑같은 코트에서 다시 만나 승리를 거둔 것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평창에서 열리는 동계올림픽에 평화 올림픽의 메시지를 준다면.
올림픽이 우리나라에서 열리는 건 정말 영광스러운 일이다. 시간 되면 꼭 응원가고 싶다. 국가대표 선수들이 부상 없이 다들 잘 마무리했으면 좋겠다.

▲페더러와 경기에서 부상 투혼이 화제가 됐다. 평소 발 상태에 대해 궁금증이 많다.
발바닥에 굳은살은 매일 경기를 2~3시간씩 치러야 해서 조금씩 갖고 있었지만, 그랜드슬램 같은 5세트를 많이 치른 적이 없어서 내 한계를 넘긴 것 같다. 이제 그 한계를 늘려야 할 것 같다. 부상 없이 시즌을 치를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할 것 같다.

▲당시 기권 상황에 대한 설명을 해 달라. 과거 골프 선수 박세리의 발과 비교 되기도 했다.
페더러와 경기하면서 계속 진통제를 맞고 하다 보니 힘들었다. 아프다는 것을 잊고 경기하고 싶었는데 진통제 효과도 볼 수 없을 정도로 돼서 결국 기권하게 됐다. 다시는 이런 물집으로 인해 기권하는 일이 없도록 노력을 많이 해야겠다. 박세리 같은 훌륭한 선수와 비교해주셔서 정말 영광이고 감사드린다.

▲이번 대회에서 세리머니 중 기억에 남는 것은? 또 상대를 의식하고 하는 세리머니인가.
세리머니를 할 때 상대방을 의식하는 것은 전혀 없다. 분위기를 끌어오고 싶은 이유도 있지만, 그런 포효나 세리머니는 즉흥적으로 나오는 것이다. 큰절 세리머니는 한국인으로서 의미가 있어서 꼭 하고 싶은 것이었다. 스스로 잘했다고 생각하는 세리머니다. 8강전에선 경기가 쉽게 풀려 세리머니를 하지 못해 아쉽다.

▲서브가 예년에 비해 강해진 비결이 무엇인가. 다른 기술을 더 늘리고 싶은 것은 있나.
최근 몇 년 동안 서브로 고생을 해왔다. 새 외국인 코치와 함께 눈에 보이지 않지만 밸런스나 힘을 기르게 하는 운동 등 사소한 것부터 꾸준히 노력한 것이 호주오픈에서 빛을 발한 것 같다. 서브뿐 아니라 정신적인 부분까지 모든 면에서 더 성장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인터뷰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다. 특별한 인터뷰 비법이 있나.
비법은 딱히 없는 것 같다. 같은 질문을 받다 보니 자연스럽게 잘하게 되는 것 같다. 평소 대표팀 생활을 할 때도 내가 장난도 많이 치고 분위기를 이끌려고 노력하는 편이다.

▲어린 시절 페더러와 나달 경기에서 볼키즈로 나선 경험이 있다. 그런 선수와 맞붙었다.
그때만 해도 이런 선수들과 같은 코트에서 경기를 할 수 있게 될 것이란 생각은 하지도 못했다. 은퇴하기 전에 이런 기회가 있어서 영광이었다. 앞으로 그 선수들이 은퇴하기 전에 더 많이 배우고 싶은 마음뿐이다. 당시엔 너무 어려서 뛰어다닐 수 없어 서 있었는데, 1시간은 대단하다는 생각을 했고, 이후 나머지 시간은 집에 가고 싶어서 징징거렸던 기억이 있다.(웃음)

▲정신적인 부분에 있어서 찬사를 받는다. 그래도 무서워하는 게 있나.
테니스 경기는 1년 내내 매주 있다. 졌을 때 빨리 잊고 다시 준비해야 한다. 이겼을 때는 다음 준비를 더 활기차게 하려고 한다. 멘탈적인 부분은 어느 정도인지 모르겠지만 평균 정도라 생각한다. 어릴 때 바퀴벌레를 아무렇지 않게 잡았는데, 지금은 손으로 못 잡아 라켓으로 덮어놓고 어머니 올 때까지 기다리기도 했다. 모기도 손으로 잡는 걸 잘 못해 벽에 앉으면 그때 휴지로 잡는다.

▲‘박세리 키즈’처럼 ‘정현 키즈’가 나올 것 같다. 어린 유망주들에게 조언을 해준다면.
어린 선수들 같은 경우는 배우는 과정에서 흔들릴 수 있기 때문에 자기만의 뚜렷한 생각을 확립시켜야 한다고 생각한다. 누구의 말을 듣고 배울 때 스스로 기준을 정해 걸러내면서 좋은 조언을 새겨야 흔들리지 않을 수 있다. 자기관리는 항상 잘 먹고 잘 자고 기본부터 착실하고 꾸준히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최고의 선수들과 비교를 되는 지금의 관심과 기대가 부담스럽지 않나.
부담스럽기도 하고 감사하기도 하다. 모든 잘하는 선수들은 이런 부담감을 이겨내고 성공한 것이라 생각한다. 어린 시절부터 이런 부담감을 이겨내서 더 좋은 선수가 되도록 하겠다. 박세리, 박지성 등 이런 분들은 정말 높은 곳에 오른 선수들이다. 또 그 자리를 유지하신 분들이다. 나도 그런 분들을 따라가고 싶다.

▲현재 부상 상태와 향후 일정은 어떻게 되나.
호주오픈이 끝난 뒤 매일 병원에서 체크했는데 별 이상이 없었다. 발바닥도 다음 주부터 정상 훈련이 가능하다는 진단을 받았다. 아직 어려서 그런지 회복 속도가 빠르다. 새 살만 잘 나오면 되는 부상이라 오래 가지 않은 것 같다. 다음 주 훈련을 하면서 어떤 대회부터 나갈지 팀과 상의할 계획이다.

▲이번 대회에서 받은 상금은 어떻게 쓸 것인가.
모든 선수들이 상금을 받을 때는 ATP에서 상금통장을 따로 만들라고 한다. 상금통장에 들어오는 돈은 안 건드리고 운동만 열심히 하고 있다. 그 통장은 어머니께서 관리하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