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석규의 대몽골 시간여행-157] 오이라트는 어떻게 등장했나?

2018-01-29 09:31

[사진 = 배석규 칼럼니스트]

▶124년 만에 역사에 재등장

[사진 = 투구스 테무르 칸]

북원제국은 기황후의 아들 아유시리다라에 이어 대칸의 자리에 오른 투구스 테무르가 살해되면서 사실상 무너져 버렸다. 이후의 시대를 통칭해서 북원시대라고 부르기도 하지만 쿠빌라이 왕조가 일단 무너졌다는 점에서 그렇게 부르는 데는 무리가 있어 보인다.

북원의 마지막 대칸을 살해하고 칸의 자리에 오른 인물은 쿠빌라이와의 대권 다툼에서 패했던 아릭 부케 가문 출신이다. 이수데르라 부르는 이 인물은 오이라트의 지지를 등에 업고 칸의 자리에 올랐다. 이때가 1388년으로 아릭 부케가 형 쿠빌라이에게 항복한 지 124년만의 일이었다.

동시에 아릭 부케를 지지하며 형제간의 전쟁에 참여한 후 백여 년 동안 사라졌던 오이라트도 이 때 역사무대에 다시 등장하게 된다.

▶나이만 진영에 가담 첫 등장

[사진 = 몽골 서부지역 초원과 산림]

오이라트라는 부족이 역사에 처음으로 등장하는 것은 1202년이었다. 몽골 통일전쟁 과정에 등장한 오이라트는 이 때 테무진, 즉 칭기스칸 진영과 대립관계에 있던 나이만 편에 가담했다. 지역적으로 오이라트는 몽골 서부에 자리 잡은 나이만에 인접해 있었으니 反테무진 진영에 가담하는 것이 자연스러웠을 것이다.
 

[사진 = 삼림지대 몽골인]

하지만 나이만이 무너지고 칭기스칸이 잔당 소탕에 나서면서 1208년 오이라트왕 쿠투카 베키는 칭기스칸에게 항복한 뒤 그의 향도노릇을 하면서 칭기스칸 진영에 합류하게 된다. 이 때 칭기스칸은 오이라트에 4개의 천 호를 하사했다.

▶칭기스칸 가문과 혼인 인연

[사진 = 몽골 장군상]

이후 오이라트는 칭기스칸 가문과 혼인을 통해 깊은 인연을 맺게 된다. 칭기스칸의 네 아들은 물론 손자 대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두 오이라트 출신 여인을 부인으로 맞게 된다. 오이라트의 여성이 미모를 갖춘 탓도 있겠지만 오이라트가 자리한 몽골의 서북지역이 칭기스칸이 아들들에게 나눠준 영지의 접점에 위치하는 전략적인 요충지라는 점도 크게 작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오이라트의 서북쪽은 주치家, 동남쪽은 툴루이家, 서남쪽은 오고타이家와 차가타이家가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역사에 등장하는 오이라트 여인 가운데 대표적인 인물이 오굴 카이미슈다. 그녀는 오이라트의 왕이었던 쿠투카 베키의 딸이었다.

세 번째 대칸 구육의 부인으로서 구육이 갑자기 죽자 섭정 노릇을 하면서 툴루이家의 등장을 막으려 했던 여인이다. 하지만 바투의 도움으로 대칸에 오른 뭉케는 그녀를 잔인하게 처벌한다. 뭉케는 그녀를 ‘암캐보다 천한 여자’라고 비난하면서 옷을 벗겨 자루에 넣은 뒤 물에 빠뜨려 죽였다.

▶아릭 부케 진영에 가담
오이라트는 이후 쿠빌라이와 아릭 부케 형제사이의 대권다툼 때 아릭 부케 편에 서서 전투에 참여했다. 이 때 역시 오이라트 지역이 아릭 부케의 영지에 포함돼 있었기 때문에 불가피한 선택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쿠빌라이 시대가 들어서면서 오이라트는 거의 역사 속에서 사라져 버린다.

원사(元史)에 남긴 기록이라고는 쿠빌라이에게 반기를 들었던 카이두의 진영에 가담해 쿠빌라이 군대와 싸웠다는 정도이다. 쿠빌라이 시대들어 거의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하던 오이라트가 이제 역사 무대의 전면에 다시 나타난 것이다.

▶東西몽골 대립 시작
쿠빌라이 가문이 몰락한 이 시기에 동몽골 지역도 오이라트도 각자 내부에서 권력 이양을 위한 변화가 급속히 진행되고 있었다. 그 과정에서 1399년에는 오이라트의 수령 우게치가 쿠빌라이 계통의 칸을 제거함으로써 동서몽골의 대립도 시작됐다.

짧은 기간에 권력이 시계추처럼 왔다 갔다 하는 혼란의 시기가 10여 년 간 이어진다. 하지만 동서 몽골의 사정에는 차이가 있었다. 서몽골의 오이라트는 때로는 동몽골에 대항하기 위해 중국의 명나라와 손을 잡기도 하고 때로는 명나라와 맞서기도 하면서 자체 세력을 다져 나갔다.
 

[사진 = 울제이 테무르 칸]

이에 비해 동몽골은 상대적으로 훨씬 더 혼란한 상태에 놓여 있었다. 동몽골에는 울제이 테무르라는 칸이 등장해 한 때 칭기스칸 가문을 다시 부흥시키기도 했다. 하지만 1412년 오이라트의 수령 마흐무드가 그를 공격해 패배시키고 주도권을 장악하면서 좌절되고 만다.

그러나 칸의 자리는 여전히 칭기스칸 가문의 인물로 이어졌다. 오이라트의 수령들이 연합해 적당한 인물을 추대했기 때문이다.

▶오이라트인 칸에 오르지 못해
오이라트의 지도자는 칸이라는 직위대신 타이시(taishi), 즉 태사(太師)라는 호칭을 사용했다. 이 호칭은 몽골제국 시대 국군총사령관을 부르는 이름에서 기인한다. 비록 권력을 장악했다하더라도 오이라트인은 칭기스칸의 직계 자손이 아니기 때문에 칸의 자리에 오를 수 없었다. 설령 스스로 칸의 자리에 오른다고 해도 몽골의 유목민들은 그를 칸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이를 칭기스 통원칙(統原則: Chinggisid Principle)이라 부른다. 1416년 오이라트의 지도자 마흐무드가 죽었다. 그리고 그 자리는 아들인 토곤이 이어 받았다. 토곤 태사(太師)의 등장으로 오이라트는 몽골 고원의 주도권을 완전하게 장악하게 된다.
 

[사진 = 톡토아 부카(타이슨 칸)]

토곤은 오이라트 내부 단합을 이룬 뒤 1434년 동몽골의 이룩타이를 공격해 죽이고 동서몽골의 통합을 이루었다. 토곤은 칭기스칸의 후손 가운데 한 사람인 톡토아 부카라는 인물을 형식상의 칸으로 내세우고 동서몽골의 전권을 장악했다.

▶明, 칭기스칸 후예의 부활 견제

[사진 = 칭기스칸 사당]

여기까지 오는 동안 몽골의 사정을 복잡하게 만드는 데는 명나라도 크게 한 몫을 했다. 명나라는 칭기스칸 일족이 다시 일어나 복수를 위해 언제 고비사막을 넘어올 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을 항상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명나라는 칭기스칸 가문의 부활을 막기 위해 틈틈이 오이라트를 도아 왔다. 특히 영락제는 동몽골을 공격하기 위해 오이라트의 세 수령, 즉 토곤의 아버지인 마흐무드와 타이핑, 바투 볼라드라는 세 인물에게 왕작을 내리기도 했다.
 

[사진 = 영락제]

하지만 줄타기 하던 오이라트가 때로는 등을 돌리기도 해 당시 명나라 황제 영락제(永樂帝)는 자신이 직접 몽골 정벌에 나서기도 했다. 이 시기에 단행된 영락제의 몽골 원정은 다섯 차례에 이른다. 여기에는 원정에 나서야 했던 영락제의 개인적인 이유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