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그것만이 내 세상' 윤여정 "타고난 이병헌, 부럽지만 질투할 나이 아냐"
2018-01-18 00:00
배우 윤여정(71)의 말(言)은 가감이 없다. 오죽하면 인터뷰를 진행한 기자가 ‘이 말을 그대로 기사화해도 될까?’하고 고민했을까. 거침없고 솔직한 대화에 간이 콩알만해졌다가도 그가 쏟아놓은 직설적 말을 곱씹으며 감탄하기도 한다. 윤여정의 언어는 그런 마법 같은 힘을 가지고 있다. 이는 요즘 세대가 그에게 열광하는 이유기도 하다. 무심하게 던져놓은 말에 묻어나는 지혜는 오랜 기간 윤여정이 고민하고 또 어렵게 가꾼 하나의 정원(庭園)과 같았으니까.
최근 아주경제는 영화 ‘그것만이 내 세상’(감독 최성현) 개봉을 앞둔 배우 윤여정과 인터뷰를 했다. 영화는 주먹만 믿고 살아온 한물간 전직 복서 ‘조하’(이병헌 분)와 서번트증후군을 가진 동생 ‘진태’(박정민 분)의 이야기를 담았다. 살아온 곳도, 잘하는 일도, 좋아하는 것도 다른 두 형제가 가족이 되어가는 과정을 그린 작품이다.
“완성본을 보니까 시나리오보다 더 잘 나왔어요. 영화는 종합예술이니까. 힘을 합쳐야 하잖아요? 연출과 편집, 배우들 연기까지 더해지면서 인물이 잘 살았던 것 같아요. 사실 이병헌과 박정민이 (연기를) 다 해줬지. 나는 잘 못 했어요. 작전 실패야. 하하하.”
지난 언론시사회를 비롯해 윤여정은 여러 차례 ‘그것만이 내 세상’ 속, 자신의 연기를 혹평해왔다. 다른 엄마 역할과 차별화를 두기 위해서 데뷔 50년 만에 처음으로 사투리 연기에 도전했지만 만족할 만한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는 것이다.
“사투리 연기가 참 힘든 거더군요. 아무나 하는 게 아니었어. 사실 최성현 감독이 내게 ‘사투리가 힘들면 안 써도 된다’고 했었어요. 그런데 나 혼자 생각하기에 ‘인숙이 사투리를 쓴다면 더 투박해 보이지 않을까?’ 싶었던 거죠. 내 욕심에 기존 역할들과 차별화를 두고 싶어서···. 안 믿으시겠지만, 그만큼 한 것도 사투리 선생님하고 석 달간 합숙을 하면서 얻은 결과예요. 그렇게 미련하게 했는데 영화를 보니까 만족스럽지 못했던 거죠. ‘저 부분은 끝을 더 올렸어야 했는데’ 싶기도 하고. 흉내 낸다고 되는 게 아니더라고요.”
윤여정은 짧은 속풀이(?) 끝에 연기는 오래 한다고 느는 게 아니라고 정리했다. '하면 할수록 매너리즘에 빠지기만 한다'는 것이 연기 경력 50년째인 여배우의 속사정이었다.
“예컨대 떡을 몇십 년간 만든다고 생각해보세요. 그럼 떡 장인이 되는 거잖아요? 그렇지만 연기는 안 그래. (연기를) 처음 해보는 신인이 가장 잘 할 때가 있어. 그게 정말 무서운 거죠. 우리는 신인이 아니기 때문에 연기를 바꿀 수가 없어요. 남이 신던 신발에 내 발을 욱여넣을 수도 없는 거죠. 막 시작했는데 연기를 잘 하는 아이들을 보면 참 부러워요. ‘내게도 저런 시절이 있었을까?’ 싶기도 하고요. 우리는 하면 할수록 매너리즘에 빠지는 일밖에 없는데···. 그러니까 제 나름대로 사투리도 해보고 이렇게 애를 쓰는 거랍니다. 하하하.”
그럼에도 윤여정은 “타고난 아이들에게 질투를 느낄 필요가 없다”며 여유로운 태도를 보이기도 했다. “늙어서 좋은 건 박수를 쳐주고 즐길 수 있다는 점”이라면서.
“이병헌 같은 애들은 가진 게 많잖아. 눈도 좋고, 목소리도 좋고 그야말로 타고났죠. 사실 그런 걸 보면 아주 부러워요. 하지만 다행인 건 내가 질투할 나이가 아니라는 거예요. 늙어서 좋은 점은 그런 거 같아요. 박수쳐주고 즐길 수 있다는 거.”
약 한 시간가량의 대화 속, 윤여정이 풀고 지운 수많은 문제와 고민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가 가꾼 ‘언어의 정원’ 속엔 질투와 좌절을 넘어선 객관적인 시선과 미래를 향해 나아갈 힘이 담겨 있었다.
“저는 연기를 즐기면서 하질 못해요. 보통 사람들이 ‘좋아하는 일이니까 즐겁게 하라’고 하잖아요? 그런데 그게 참 어려운 일이더라고요. 난 예능도 즐기면서 못하고 악으로 하니까···. 하나도 즐겁지 않은 거야. 그것 때문에 많이 고민했었는데 얼마 전 JTBC ‘썰전’을 보다가 마음에 드는 이야길 들었어요. 유시민 작가가 안철수 국민의당 대표한테 ‘왜 정치를 하세요?’라고 물었는데 안철수 대표가 그런 말을 하대요? ‘좋아하는 일을 즐기면서 하는 건 아마추어다. 싫어하는 일을 하는 건 프로’라고. 그럼 나는 프로인가? 하하하.”
자신을 ‘노력파 배우’라 부르는 윤여정은 연기는 물론 예능프로그램조차 “즐기지 못하고 열심히만 한다”고. 최근 인기리에 방송 중인 tvN ‘윤식당’을 언급하며 “보는 이들에게는 힐링을 주는 프로그램”이라고 칭찬하자, 그는 “하는 사람은 죽을 맛”이라며 손사래를 친다.
“예능프로그램을 하면서 깨달았어요. 유재석, 강호동 같은 사람들은 얼마나 힘들까. 우리는 1시간가량의 방송을 보며 힐링을 얻지만, 방송을 만드는 사람들은 얼마나 고통스럽겠어. ‘윤식당’도 1시간짜리 방송을 위해서 카메라를 24시간 내내 돌려요. 거기다 미션을 해내기 위해 분투하는데 제가 전문 요리사가 아니니까 계속 낑낑거리기만 하는 거예요. 정말 힘들더라고요. 그래도 보는 분들이 ‘힐링’ 받는다니까 참 다행이네요.”
영화, 드라마, 예능프로그램까지. 매 순간 치열하게 살아가는 윤여정에게 휴식과 관련된 질문을 던졌다. 이렇게 열심히 사는 배우에게 ‘휴식’의 순간은 어떨까 궁금했다.
“쉴 땐 정말 아무것도 안 해요. 그냥 가만히 있어. 이따금 책을 읽곤 하는데 또 ‘읽기 시작한 건 끝까지 읽어야 한다’는 강박을 가지고 있어서···. 그것도 참 힘들어요. 하하하. 나이가 드니까 눈이 너무 아프더라고요. 심지어 최근 읽기 시작한 책이 너무 어려운 책이라서 후회하고 있어요. 도스토옙스키(19세기 러시아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 ‘죄와 벌’,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의 저자) 평전인데 영 진도가 안 나가네요.”
휴식조차 ‘열심히’라니. 윤여정의 말에 어딘지 숙연해짐을 느꼈다. 50년째, 그가 흐트러짐이 없었던 건 이 같은 노력과 성실함이 있었기 때문이다. 인터뷰를 마무리하며 윤여정에게 “최근 가장 즐거웠던 일”에 관해 물었다. 조금 더 느슨해진 그를 알고 싶어서였다.
“요즘 며칠 동안 인터뷰를 하느라 진이 빠져있었어요. 몇 시간째 혼자 떠드니까요. 그런데 인터뷰를 마치고 임상수 감독과 설치미술 작가인 배영환씨를 만났는데 너무 재밌더라고. 가끔씩 만나는 친구들인데 내 영화, ‘윤식당’에 관심이 없는 사람들이라서. 하하하. 모여서 쓸데없는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기분이 좋아지더라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