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석규의 대몽골 시간여행-134] 몽골제국은 어떻게 하나가 되나?

2018-01-05 08:18

[사진 = 배석규 칼럼니스트]

▶ 새 대칸 테무르 즉위

[사진 = 테무르(成宗)]

1,294년 여름, 여름수도 상도에서 대칸을 선출하는 쿠릴타이가 열렸다. 후보자는 두 명이었다. 황태자였던 칭킴이 1,285년 급사하면서 남긴 두 아들이 그들이었다. 그들의 어머니인 코코친 카툰은 이들에게 칭기스칸의 성훈(聖訓), 즉 빌리크를 암송하게 했다.

"세첸 칸(쿠빌라이)은 누구라도 칭기스칸의 빌리크를 가장 잘 지키는 자가 대칸의 자리를 물려받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이같이 말하면서 코코친 카툰은 빌리크를 낭낭하게 암송하는 테무르에게 옥쇄를 넘겨주었다. 물론 그 때문에 테무르에게 대칸의 자리를 넘겨준 것은 아니었다. 이미 테무르는 지지세력 등에서 대칸에 자리에 오를만한 여건을 갖추고 있었다.

남송정벌군 사령관이었던 바얀(伯顔)이 테무르를 지지하고 있던 것도 유리한 상황이었다. 게다가 테무르의 형인 진왕 카말라(晉王 甘麻刺)는 제위에 그다지 집착하지 않아 동생에게 대칸의 자리를 양보했다. 그래서 대칸의 자리에 오른 테무르는 ‘울제이투 칸’ 즉 ‘행복한 칸’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중국식 묘호는 성종(成宗)이었다.

▶ 카이두의 도박

[사진 = 쿠빌라이]


쿠빌라이가 사라진 대원제국은 가장 먼저 카이두의 표적이 됐다. 두려워하던 쿠빌라이가 이미 죽었으니 오래 동안 기다렸던 카이두로서는 일전을 겨룰 만하다고 여겼을 것이다. 더욱이 테무르는 할아버지 쿠빌라이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허약해 보였다.

카이두로서는 공격만 하면 무너뜨릴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는지도 모른다. 여기에 전쟁을 서두르지 않으면 안 될 뜻하지 않았던 사태까지 벌어졌다. 쿠빌라이가 살아있는 동안 그 체제 속에 동화되지 못하고 따돌림 받았던 사람들에게 카이두는 적절한 피난처였다. 말하자면 쿠빌라이 덕분에 카이두는 세(勢)를 불릴 수도 있었다는 얘기가 된다.

그런데 이제 쿠빌라이가 없는 상황에서 굳이 그 사람들은 카이두에게 몸을 위탁할 필요성이 없어진 것이다. 더욱이 쿠빌라이 체제아래서 도시생활의 단 맛을 봤던 그들로서는 유목생활이 지겨웠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1,297년, 뭉케의 손자, 울루스부카와 아릭부케의 아들 요부쿠르를 비롯한 세 명의 유력자가 만 명이 넘는 기병을 이끌고 대칸 테무르에게 투항해왔다.

테무르는 이들을 환영한 것은 물론 너무도 기쁜 나머지 연호까지 고쳤다. 하지만 카이두에게는 충격이었다. 그대로 두면 오히려 내부가 무너지면서 중앙아시아 왕국이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휩싸였다.

▶ 모든 것을 잃은 카이두

[사진 = 몽골군 출병]

선택은 전쟁밖에 없었다. 카이두는 차가타이한국의 칸 두아와 아릭부케의 차남 멜릭 테무르 등 중앙아시아의 모든 세력을 규합해 칼을 뽑아 들었다. 1300년부터 다음해까지 몽골 고원의 서부에서 알타이에 이르는 초원지대에서 대규모의 전투가 벌어졌다. 몽골 기마병들 간의 치열한 싸움이었다. 전선이 넓어서 초원 곳곳에서 전투가 벌어졌다.
 

[사진 = 몽골군 전투]

전쟁 초기에는 카이두의 군대가 우세했다. 테무르 대칸의 형인 진왕 카말라와 나중에 대칸이 되는 그의 아들 이순 테무르는 초기 카이두의 공격에 고전했다. 이에 테무르는 쿠빌라이의 셋째아들 망가라(忙哥刺)의 차남으로 안서왕(安西王)으로 봉해진 아난다(阿難達)와 조카 카이샨(海山)을 구원군으로 보냈다.

테무르의 형으로 일찍 죽은 다르마발라(答刺麻八刺) 아들인 카이샨은 군사적 재능이 뛰어나 전투에서 큰 위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이 카이샨은 나중에 대칸이 되는 무종(武宗)이다. 자연히 전세가 이내 역전되기 시작했다. 비록 쿠빌라이가 사라지고 없었지만 그가 오래 동안 기반을 다져 남겨 놓은 군의 조직은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

대원제국의 3대 왕가가 모두 이 전투에 참가했다. 게다가 나얀의 반란 때 위력을 떨쳤던 투르크인 친위부대가 최전선에서 이번에도 괴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여기에 동방 3왕가까지 대규모 부대를 이끌고 참가했으니 가히 초대형 진용이라고 할 만 했다. 카이두는 처음 몇 곳의 전투에서 승리를 했지만 결국 대원제국의 대 군단에게 당할 수가 없었다.
 

[사진 = 카라코룸 근처 초원]

1,301년 카라코룸과 타미르강 사이에 있는 평원에서 대전투가 벌어졌다. 이 전투에서 카이두는 상처를 입고 후퇴하던 중 사망했다. 중앙아시아의 영웅 카이두는 결국 한판의 도박으로 자신의 목숨을 포함한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 하나가 된 대몽골제국

[사진 = 대몽골 제국]

이 전투는 대몽골제국이 팍스 몽골리카(Pax Mongolica)로 가는 분기점이었다. 카이두 아래서 2인자로 만족해야했던 차가다이家의 두아는 이제는 자신이 중앙아시아 제 1인자라는 것을 천명했다. 오고타이家는 카이두의 아들 차파르가 후계자 자리를 이어 받았다.

대원제국에 대항하는 전쟁에 염증을 느낀 두아는 차파르를 설득해 대칸 테무르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오랜 분쟁 지역이었던 중앙아시아가 드디어 대원제국의 체제 안으로 들어선 것이다.

▶ 종착점으로 가는 팍스몽골리카

[사진 = 팍스 몽골리카]

1,304년, 제국 전체의 화평을 알리는 사절단이 킵차크한국을 거쳐 일한국에 도착했다. 종족들 간의 대립이 해소된 상황을 누가 환영하지 않았겠는가? 중앙아시아 지역에는 대원제국의 우산아래 있는 또 하나의 연합체 차가타이한국이 정식으로 출범했다. 이와 동시에 진정한 팍스 몽골리카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쿠빌라이가 기반을 다져 놓은 대몽골제국은 다음 대에 와서야 비로소 전 몽골이 하나가 되는 시대를 만들어낸 것이다. 대원제국을 종주국으로 일한국과 킵차크한국, 차가타이한국이 연합하는 이 체제는 이때부터 60년가량 이어진다.
 

[사진 = 중앙아시아 실크로드]

이 때 대원제국의 수도 대도는 전 몽골제국의 명실상부한 정치 경제의 중심지가 됐다. 마르코 폴로에 의해 칸발릭으로 소개됐던 대도에는 서방 유럽의 여행자의 방문이 잦아졌다. 강남 해안 도시는 해상 무역으로 전성기를 맞았다. 그러나 정점은 곧 내리막길을 의미한다고 언급한 대로 이 시대를 거치면서 몽골은 서서히 무너져 내리기 시작한다. 그리고 중국 땅에서의 마지막 대칸 토곤 테무르가 초원으로 밀려나는 시점이 바로 팍스 몽골리카의 종착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