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팩트폭격] 이 땅의 청소년에겐 성이 없다, 콘돔 제공에 화들짝 놀라는 나라
2018-01-02 18:54
학교내에 콘돔 비치한다는 서울시..."성문란만 부를 것" 주장에 외국사례 들여다보니
한국 청소년의 성은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다. 욕구와 충족은 철저한 통제 대상이다. 사회 분위기가 이렇다 보니 많은 청소년이 가장 기본적임 피임 도구인 콘돔을 구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다. 어떨 수 없이 비닐봉지나 비닐랩, 풍선 따위를 대신 사용하기도 한다.
비위생적인 데다 피임 효과를 기대하기 어렵다. 성병에 걸리거나 임신을 하는 사례는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서울시가 올해 초 발표할 예정인 ‘인권정책 기본 계획(2018~2022)’에 학교 내 콘돔을 비치하는 내용을 담은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그러나 시의 정책을 두고 “청소년 보건 사각지대를 개선할 수 있다”는 주장과 “성교육을 늘리면 된다. 세금 낭비에 불과하다.”는 의견이 팽팽히 맞선다. 정말로 청소년들에게 콘돔을 주면 안 되는 걸까.
시 정책을 반대하는 이들은 학교에 콘돔을 두면 청소년들이 문란한 성관계를 맺을 가능성이 크다고 주장한다. 24년 전 학교에 콘돔을 비치하기 시작한 미국에서도 비슷한 논란이 있었다. 결론만 말하면 학교 내 콘돔 비치 전과 후 성관계 비율은 거의 달라지지 않았다.
미국 낙태 연구단체 구트마커연구소가 1992년부터 1993년까지 9~12학년(중3~고3) 2500명을 설문한 결과 학교 콘돔 비치 전과 후 성관계를 맺은 청소년의 비율이 남성 청소년의 경우 55.8%에서 55.0%로 감소했고 여성 청소년은 45.4%에서 46.1%로 소폭 상승하는 데 그쳤다.
‘콘돔 없이 성관계도 없다’는 인식을 가지고 있던 90년대 미국 청소년들도 학교에 콘돔을 비치하기 전에는 이용률이 높지 않았고 학교에 콘돔을 비치한 후에야 이용률이 늘어났다는 점을 고려하면 매우 의미 있는 연구결과다.
2. 효과 없고 세금만 쓴다?
여성가족부의 ‘2014년 청소년 유해환경 접촉 종합실태조사’에 따르면 성관계 경험이 있는 3만5729명 중 피임을 하는 청소년은 39%에 불과했다. 성병에 걸린 적이 있는 청소년은 9.1%였으며 남자 청소년(8.4%)보다 여자 청소년(11.1%)이 더 많았다.
원치 않은 임신으로 임신중절 수술을 해야 했던 여성 청소년은 66%, 학교 밖 여성 청소년은 무려 79.1%에 달했다. 콘돔과 피임에 대해 가르치는 성교육이 부족했다고 보기도 어렵다. 임신중절 수술을 받은 여성 청소년 중 71.6%는 성교육을 받았다고 답했다.
현재 성폭행에 의한 임신과 산모‧배우자에게 유전 질환이 있을 때만 합법적으로 임신중절 수술을 받을 수 있다. 여러 시행착오를 거쳐 불법시술을 받았다고 해도 불임 등 육체적 문제 또는 우울감, 자살 충동 등 심리적 문제가 발생할 위험이 높다.
청소년의 성관계를 완전히 봉쇄할 수 방법은 없다. 이를 인정하든 인정하지 않든 피임에 대한 낮은 인식으로 고통받는 청소년과 부모가 치러야 할 모든 사회적 비용을 고려하면 세금 낭비라는 주장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3. 이미 살 수 있는데 뭐 하러?
청소년 보호법상 콘돔은 성인용품이 아니다. 구매와 사용을 제한받을 이유는 없다. 성적 자기결정권은 온전히 개인의 몫이다. 그런데도 청소년들이 편의점 등에서 콘돔을 사려면 별다른 이유 없이 판매 거부하거나 따가운 시선을 받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성을 금기시하는 해묵은 문화로 인해 성인들도 콘돔에 대해 무지와 오해가 만연하다는 의미다. 사회적 인식이 변화하는 데에는 적잖은 시간이 필요하다. 청소년이 인터넷에서 콘돔을 구할 수 없는 현실도 같은 맥락이다.
국내 양대 포털에서 콘돔을 검색하면 정보통신망 이용 촉진 및 정보 보호 등에 관한 법률 제42조(청소년 유해 매체물의 표시)와 청소년 보호법 제9조(청소년 유해 매체물의 심의 기준)에 의해 성인인증을 받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쇼핑, 블로그, 카페, 질문 기능 등이 차단된다.
외국 포탈을 이용해 콘돔 판매 사이트에 접속해도 성인인증을 받아야 한다. 이와 같은 일련의 과정은 여가부의 청소년 유해물건 고시의 영향이다. 해당 고시가 지정된 2010년 일반 콘돔은 제한을 두지 않았지만 돌출형 콘돔 등 특수콘돔은 안전성에 대한 우려로 제한됐다.
2013년 의료기기법 개정으로 고시 지정 당시 지적된 문제는 해결됐다. ‘3등급’ 의료기기인 콘돔은 식품의약품안전처에서 안전성 심사를 통과해야 한다. 하지만 고시는 아직 개정되지 않았다. 일반 콘돔만 판매하는 사이트도 없다. 청소년의 콘돔에 대한 접근성은 여전히 떨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