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유산'으로 지정된 70년대 만화…꺼벙이를 아십니까
2017-12-22 16:15
2010년 타계한 만화가의 묘비에 적힌 육군하사 길창덕, 그는 화랑무공훈장 받은 군인
꺼벙이가 '서울 미래유산'이 됐습니다. 서울시는 역사적 의미가 담긴 공간이나 물건을 '서울 미래유산'으로 지정하는데요.
21일 서울시는 2017년 서울 미래유산 중에 꺼벙이도 선정됐다고 밝혔습니다. 꺼벙이는 꿩의 새끼를 부르는 꺼병이가 변해서 생긴 말입니다. 어수룩한 사람을 보고 꺼병이에 비유하다가 생겨난 말인데 왜 꺼벙이가 서울 미래유산으로 선정된 걸까요?
1. 70년대 어린이의 절친 꺼벙이
그 시절 꺼벙이의 인기는 요즘 인기 있는 일본 애니메이션 '짱구는 못 말려'의 짱구나 미국의 '심슨 가족'의 바트 심슨 못지않았습니다.
<만화일기 광고에 꺼벙이, 꾸러기, 뚱딴지, 밤토리, 우야꼬, 등 반가운 이름이 나온다.>
꺼벙이의 인기 덕에 만화왕국 이후 소녀중앙에도 연재되고 90년대에는 만화일기로 출판도 됐습니다. 꺼벙이는 70~80년대 중산층의 생활 모습과 시대적 상황을 사실적으로 묘사했습니다. 그 당시 어린 독자들은 사고뭉치에 약간은 부족한 꺼벙이의 모습에 즐거워하고 위안을 얻으며 친밀감을 느꼈습니다. 꺼벙이는 어린 친구들의 절친이었죠.
2. 꺼벙이로 명량만화 개척, 묘비명은 육군하사 길창덕
꺼벙이는 고 길창덕 화백(1930~2010)의 손에서 탄생했습니다. 명량만화 개척자인 길 화백은 생전에 자신의 목표를 "사람들이 즐거워하는 작품을 그리는 것이에요."라고 밝혔던 만큼 50여 년간 왕성한 창작 활동을 보여줬습니다.
그 결과 '꺼벙이', '재동이'. '순악질 여사' 등의 작품이 남았습니다. 길 화백은 문하생을 두지 않고 혼자 원고 작업을 하는 것으로 유명했습니다. 원고량이 많은 시기에는 20개가 넘는 원고를 한달안에 마감하기도 했습니다. 왕성한 활동량을 보이던 길 화백은 1997년 폐암 수술을 받고 나서 작품 활동을 중단합니다.
2010년 1월 30일 길 화백은 81세의 나이로 삶을 마감했습니다. 길 화백의 묘비명에는 '육군하사 길창덕'으로 적혀있는데 이유는 그가 화랑무공훈장까지 받은 군인이기 때문입니다. 길 화백 본인 뜻에 따라 묘비명이 결정됐습니다. 한국전쟁이라는 시대의 소용돌이는 길 화백도 비켜가지 않았습니다.
당시 육군 참전용사가 된 길 화백은 직접 전투에 참여한 것은 아닙니다. 신병 훈련 교재나 유인물들을 그리는 작업을 했다고 합니다. 제대 후 본격적인 만화를 그렸습니다. 지금 길 화백은 지금 세상에 없지만, 그가 만든 평범하고 조금 모자란 주인공들은 아직도 우리곁에 함께 있습니다.
3. 더 이상 우리 꺼벙이를 무시하지 마라!
꺼벙이는 서울미래유산 지정되기 전에도 많은 관심을 받았습니다. 2001년에는 꺼벙이 만화우표 발행과 서울국제만화애니메이션페스티벌(SICAF) 공로상을 받고 1999년에는 부천 만화정보센터 명예의 전당에 올랐습니다.
현 시점의 어린 독자가 많이 보는 네이버 웹툰 '와라! 편의점'의 지강민 작가는 78화에서 꺼벙이를 오마쥬해서 연출했습니다.
하지만 독자의 어린 연령대 때문에 이들은 꺼벙이의 존재를 제대로 알지 못 했습니다. 당시 반응은 "아 ㅋㅋㅋ이 그림 속담책이나 사자성어 같은 만화책에 나오는 그림"이 많았습니다. 한 네티즌은 "모르는 초딩 : 그림체 바뀜, 아는 척하는 초딩 : 이거 뚱딴지임 ㅋ, 아는 초딩 : 꺼벙이네"라며 한줄 정리를 해주기도 했습니다.
또한, 네이버는 지난 2010년 '故 길창덕 화백 추모 웹툰' 페이지를 오픈해 네이버 웹툰 현직 작가들이 릴레이 웹툰을 연재해 길 화백을 추모 했습니다. 당시 최성호 NHN 네이버 서비스본부장은 "국민들의 희로애락을 명랑만화라는 장르 개척을 통해 정서적으로 승화시킨 길창덕 화백의 삶을 기리는 이번 신세대 온라인 만화가들의 추모 릴레이는 감동적이었습니다."라며 "앞으로 신세대 작가들이 길 화백의 뜻을 이어나갔으면 좋겠습니다"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이쯤 되면 꺼벙이가 서울미래유산으로 지정될만하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