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석규의 대몽골 시간여행-127] 몽골의 西進은 어디서 멈췄나? ②

2017-12-29 10:30

[사진 = 배석규 칼럼니스트]

◀일한국 탄생의 분기점

[사진 = 훌레구와 부인]

대칸 뭉케가 갑자기 죽었다는 소식을 접한 훌레구는 본대(本隊)의 머리를 몽골 쪽으로 돌렸다. 훌레구는 키트부카에게 일부 선발대 병력을 주어 뒷일을 처리하도록 부탁하고 남은 전 병력을 이끌고 아제르바이잔 방면으로 떠났다. 19년 전 오고타이의 갑작스런 죽음이 몽골군의 침입을 눈앞에 둔 서유럽을 파멸로부터 구했듯이 뭉케의 죽음은 맘루크왕조와 이슬람 세계의 서쪽을 위기에서 벗어나게 했다.

훌레구의 부대가 타부리즈에 도착했을 때 대칸의 자리를 놓고 형 쿠빌라이와 동생 아릭 부케가 각각 대칸에 취임해 한판 대결에 들어갔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훌레구는 당연히 형과 동생이 다투는 당시 상황에 자신이 끼어들 여지가 있는지를 검토했을 것이다. 결론은 부정적으로 내려졌음이 틀림없다.

일단 이슬람 땅에 남아 독자 세력을 구축한 뒤 상황이 돌아가는 것을 봐가며 기회를 노려보자는 쪽으로 결론이 내려졌을 것이 분명하다. 바로 이 시점이 훌레구 울루스(나라), 즉 일한국이 탄생하는 분기점이 됐다. 훌레구는 타브리즈를 제국의 중심지로 삼아 자신의 터전을 굳히는 작업에 들어갔다. 지금은 이란의 동아제르바이잔주의 주도인 타브리즈는 해발 1,360m 전후의 고산지대에 위치한 도시로 16세기 들어 이란의 영토로 편입됐다.

◀맘루크군과 한판 승부
훌레구의 본대가 동쪽으로 떠난 후 시리아에 남아 있던 키트부카는 이집트의 맘루크왕조에게 항복을 권고하는 사절단을 보냈다. 맘루크왕조는 이 사절단을 모두 처형하고 시리아 쪽으로 진격할 태세를 보였다. 몽골군과 대적하겠다는 뜻을 분명히 한 것이다.
 

[사진 = 맘루크 병사]

본대가 떠난 뒤 남은 몽골군의 선발대는 만 2천명, 키트부카는 이 병력만으로도 충분히 맘루크 왕조를 제압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던 것 같다. 그래서 이집트 쪽으로 남하하기 시작했고 술탄 쿠투즈(Qutuz)가 이끄는 맘루크군도 한판 승부를 겨루기 위해 북쪽으로 올라오고 있었다. 두 부대의 충돌은 불가피한 상황이었다. 당시 맘루크왕조는 출범한지 10년밖에 되지 않았다.

이 왕조는 아이유브(Ayyubids) 왕조의 군사령관을 지냈던 투르크 계통의 노예용병 아이베크(Aybek)가 아이유브 왕조에 반기를 들고 이집트에서 일어선 신생왕조였다. 맘루크라는 말 자체도 백인 노예를 의미하는 아랍어다. 객관적으로 봐서 맘루크의 군대가 공포의 무적군대인 몽골군과 맞붙어 이길 가능성은 희박해 보였다. 그래서 이집트는 피난길에 나선 사람들로 혼란한 상황이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런데도 맘루크왕조가 북벌에 나선 것을 보면 이미 훌레구의 본대가 동쪽으로 떠나고 남은 몽골군의 병력이 비교적 소규모였다는 정보를 사전에 입수하고 승리할 수 있을 것으로 판단했을 가능성이 높다.

◀아인 잘루트(Ain Jalut) 전투의 참패

[사진 = 아인 잘루트]

맘루크군의 병력이 알려진 대로 12만 명이었다면 수적으로 몽골군의 열 배다.
그 정도의 전력이면 충분히 이길 수 있다고 여길만했다. 북상하던 맘루크군과 남하하던 몽골군은 팔레스타인에서 마주쳤다. 여기서 맘루크의 쿠투즈는 몽골군을 아인 잘루트(Ain Jalut)로 유인했다. 수적인 우세로 근접전을 펼쳐 적을 격파할 수 있는 승산이 가장 높은 곳이 바로 아인 잘루트라고 판단한 것이다.
 

[사진 = 맘루크 병사의 전투]

또한 맘루크 병력의 주력이 보병인데 비해 몽골군은 기동력을 자랑하는 기병이라는 점도 고려됐다. ‘아인 잘루트’는 바로 ‘골리앗의 샘’으로 기록된 곳이다. 구약성서에 이스라엘 민족과 블레셋(페레시테인)민족 사이에 전쟁이 벌어졌던 곳으로 기록된 곳이다. 이 아인 잘루트의 엘라 골짜기에서 두 세력이 충돌했다.
 

[사진 = ‘다윗과 골리앗’ 영화 포스터]

그 곳은 양치기 소년 다윗(David)이 돌멩이를 던져 골리앗(Goliath)의 이마를 명중시킴으로써 거인을 쓰러뜨렸다는 곳이다. 여기에서 맞붙은 전투는 10배의 병력을 지닌 맘루크군의 압승으로 끝났다. 몽골군은 산산조각이 나 뿔뿔이 흩어졌고 키트부카는 전사했다고도 하고 포로로 잡힌 뒤 처형됐다고도 전해진다. 10배의 병력과 대적한 몽골군에게 거인 골리앗을 쓰러뜨린 소년 다윗에게서 나타났던 것과 같은 기적은 다시 일어나지 않은 것이다.

◀무적의 신화 깨진 몽골군

[사진 = 몽골군 중동 원정]

맘루크 왕조는 기세를 몰아 몽골이 장악했던 시리아의 거점을 되찾았다. 하지만 이란 땅까지 진출해 훌레구의 본대와 충돌하는 모험을 감행하지는 않았다.
무적의 신화가 깨진 몽골의 위신은 크게 추락됐다. 또 서쪽으로의 원정도 더 이상 나가지 못한 채 여기서 멈췄다. 반면 오래가지 못할 것으로 보였던 맘루크왕조는 몽골군에 대한 승전을 계기로 이집트인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으며 확실한 기반을 굳혔다.

더욱이 지중해 연안의 유럽 국가들은 맘루크왕조가 몽골의 서진을 멈추게 한 것을 다행스럽게 여기며 군수물자 등을 제공해줬다. 이 때문에 맘루크왕조의 기반은 더욱 공고해졌다. 맘루크가 북방 노예 출신이라며 야만시 했던 무슬림 세계에서도 맘루크를 보는 눈이 달라졌다. 맘루크의 수도 카이로는 무슬림 세계의 중심지로서 과거 바그다드의 역할을 대신하게 됐다. 맘루크는 1517년 오스만터키에게 멸망할 때까지 250년 이상동안 이어지는 장기 왕조가 됐다.

◀서쪽에서 멈춘 원정

[사진 = 맘루크군 모형]

이제 이슬람 지역은 동에는 몽골, 서에는 맘루크가 버티는 상황이 됐다. 만일 뭉케의 죽음이 없었다면 훌레구의 주력부대가 철수하지 않았을 것이고 맘루크군과의 전투도 승리로 마무리됐을 가능성이 높다. 이슬람 지역을 모두 정벌한 뒤에 훌레구의 원정은 그 곳에서 멈췄을까? 아마도 아닐 것이다.
 

[사진 = 마그레브 지역]

맘루크왕조를 장악해 지중해 마그레브 지역을 손에 넣는다면 몽골은 아마 거기서 멈추지 않고 지중해를 통한 유럽 공략에 나섰을 것이다.

바다를 통한 유럽 정벌도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그렇게 됐다면 역사는 또 다른 방향으로 흥미롭게 흘러갔을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대칸 뭉케의 죽음이 원정군의 발목을 잡았다. 때문에 이러한 가정(假定)은 가정 그 자체로만 남고 말았다. 비록 서진은 멈췄지만 훌레구가 터전을 잡은 몽골의 일한국은 150년 동안 이슬람지역에서 뿌리를 내렸다.

일한국은 위쪽에 있는 킵차크한국과 충돌하기도 했지만 그 것은 크게 봐서 몽골 제국 내부의 문제였다. 또 쿠빌라이의 대원제국을 지지하면서 여러 방면에서 협조했다. 그들은 비록 이슬람 지역에 있지만 철저한 몽골인으로 행동했다. 일한국의 군주는 필요에 따라 이슬람교로 개종하기도 했고 무슬림의 관습을 따르기도 했다. 하지만 몽골의 기본 정신을 지키면서 현지의 종교나 전통과 충돌을 빚지 않는 것이 몽골의 특징이기도 했다.

일한국의 서쪽 진출이 멈추면서 대몽골제국의 서쪽 경계선이 정해졌다. 그 경계선의 동쪽은 팍스 몽골리카라는 새로운 시대가 찾아온 것이다. 새로운 시대는 몽골 제국 안에서뿐만 아니라 그 바깥 세계에도 새로운 바람과 변화를 불러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