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석규의 대몽골 시간여행-105] 누가 최대의 피해자인가?
2017-12-06 09:26
눈에 띠는 특이한 일이라면 부처님의 가호로 몽골군을 물리치기 위해 대장경 조판작업에 착수한 것인데 결과적으로 귀한 문화재를 남겨 놓기는 했지만 전황과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소극적인 고려조정과는 달리 고려의 민중부대는 곳곳에서 유격전을 펼치며 몽골군을 괴롭혀 몽골군 진영에서도 전쟁을 빨리 끝내고 싶어 하는 분위기가 높아졌다. 이 점을 간파한 고려조정은 사신 김보정(金寶鼎)과 어사 송언기(宋彦琦)를 몽골에 보내 조공을 바칠 테니 전쟁을 끝내 달라고 호소했다.
그렇지 않아도 장기간에 걸친 어려운 싸움에 지쳐 있던 몽골은 얼른 이 제의를 받아 들였다. 그래서 고려왕이 몽골에 입조해야 한다는 등의 조건을 내건 채 서둘러 철수했다. 고려는 왕족인 영녕공(永寧公) 준(繜)과 귀족의 자제 10여명을 인질로 보내면서 일단 분쟁을 마무리 지었다.
▶ 구육 사망으로 몽골군 철수
1246년 구육이 대칸에 취임하면서 몽골은 다시 전쟁 준비에 나섰다. 이듬해 7월 다시 고려를 침공한 몽골군은 황해도까지 진출했다. 하지만 바투와의 갈등 때문에 서방원정길에 나섰던 구육이 갑자기 숨지자 몽골군은 곧바로 퇴각했다. 1251년 뭉케가 대칸의 자리에 오르면서 몽골은 대대적인 고려정벌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 전국으로 확대된 전란
1253년, 예구(也窟)를 사령관으로, 아모간과 홍복원을 부장으로 하는 몽골군이 다시 고려로 밀어 닥쳤다. 5차 침공이었다. 몽골군은 동진군과 서진군으로 나뉘어 전 국토를 유린하기 시작했다. 그 동안 상대적으로 피해가 덜했던 강원도 지역까지 전화에 휩싸였다.
▶ 신분 제약 철폐 약속으로 사기 높여
오랜 포위 속에서 군량미가 거의 바닥이 나고 병사들이 지치게 되자 김윤후는 과거 1차 몽골 침공 때 충주성을 지켜 낸 노비군과 잡류군의 승리를 상기시키면서 그들의 사기를 북돋우는 조치를 취했다. "만일 능히 힘을 내어 싸워 이긴다면 귀하고 천한 신분을 막론하고 모든 관직을 제수케 하리라"고 약속했다. 그러나 병사들은 그 말에 반신반의하면서 별 반응을 보이지 않자 관노들의 호적을 들고 나와 보는 앞에서 직접 불살라버렸다. 또 적에게서 뺏은 소와 말을 나누어주기까지 했다. 자유를 꿈꿔왔던 관노들은 감격한 것은 물론 사기가 백배로 올라 몽골군에 대항해 결사적으로 맞섰다.
▶ 자유를 갈망하는 민중의 승리
강력한 항전의 벽에 부딪친 몽골군은 마침내 충주성을 포기하고 충주 이남지역에 대한 공격도 단념한 채 퇴각 길에 오르게 된다. 충주성의 항전은 군사적인 의미도 의미지만 자유를 갈망하는 민중들의 승리라는 점에서 더 큰 뜻을 찾을 수 있다. 몽골군을 격퇴한 이 전투로 김윤후는 감문위(監門衛)상장군으로 승진됐다. 관노와 백정 등 병사들은 그 공에 따라 차등으로 관직이 주어졌다. 이와 함께 충주는 국원경(國原京)으로 승격됐다. 충주성은 이후 충렬왕 때 성을 개축하면서 성벽 일부에 연화문을 새겨 넣어 예성(藝城)이라는 이름을 얻기도 했다.
별다른 전과를 올리지 못한 채 퇴각하는 명분을 얻기 위해 몽골은 고려조정과 화의를 위한 회담을 제의했다. 최항의 반대 속에 고종은 몽골의 요구를 일부 받아들여 육지로 나와 몽골의 사신을 맞이했다. 몽골은 왕의 입조와 함께 개경으로 천도할 것을 다시 한 번 요구하며 그들로서도 지긋지긋한 충주성의 포위를 풀고 물러갔다. 고려는 몽골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은 것은 물론 몽골군에 협력하거나 항복한 장군과 관리들의 목을 베거나 귀향을 보내는 식으로 강경 대응했다.
▶ 고려인 포로 20만 명 넘어
▶ 한고비 넘어선 여몽전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