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석규의 대몽골 시간여행-104] 총사령관이 살해된 전례가 있나?
2017-12-05 09:32
강화 천도 두 달 후인 1232년 8월, 1차 공격을 지휘했던 사르타크가 군사를 이끌고 고려로 다시 밀어 닥쳤다. 이 때 몽골군의 길잡이는 홍복원(洪福源)이었다. 서경(西京)의 낭장(郎將)이었던 홍복원은 반란을 일으킨 뒤 몽골의 1차 침입당시 몽골군에 투항한 인물로 그의 아들 홍다구(洪茶丘)와 함께 고려에게 골칫거리가 되는 홍씨 일족이었다.
몽골군은 4개부대로 나뉘어 경상도 지역까지 내려가 약탈을 자행했다. 몽골군은 강화도를 직접 공략하지 않고 섬을 고립시켜 항복을 받아 내려는 전술을 구사했지만 별다른 효과를 보지 못했다. 오히려 총 사령관 사르타크가 민중부대가 쏜 화살에 맞아 숨지는 사태가 발생하면서 2차 침공은 사실상 실패로 끝난다.
경기도 용인시 남사면(南四面) 주민들은 몇 년 동안 행정구역의 이름을 처인면(處仁面) 으로 바꾸어줄 것을 요청했다. 일제 강점기에 행정상의 편이를 위해 남쪽의 4개 마을이라는 뜻으로 붙여준 면의 이름 대신 과거 몽골군의 총사령관 사르타크가 민중부대에 의해 살해된 처인성의 이름을 붙여달라는 요구였다. 용인시 남사면 아곡리 산 43번지에 있는 조그마한 동산이 바로 이 지역 주민들이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는 역사의 현장이다.
둘레가 425미터 안에 있는 5천여 평의 장방형으로 생긴 동산은 주위에서 보면 주변 보다 조금 높은 둔덕처럼 보인다. 허물어진 토성은 지난 70년 복원 공사로 어느 정도 토성의 모습을 갖췄다. 몽골이 세계정복 전쟁을 시작한 이후 어느 정복전쟁에서도 총 사령관이 적에게 살해된 사례는 거의 없었다. 더욱이 적장을 살해한 사람들은 정규군대도 아닌 대부분 천민인 처인부곡민(處仁部曲民)들이었다. 왕과 귀족들은 섬으로 피신하고 호족들마저 자신들의 안위만 생각하며 달아나기 급급한 때에 분연히 일어서 몽골군에 대항하고 나선 이들 백성들의 항쟁은 2차 여몽전쟁의 전세를 결정지었다.
그런 점에서 보면 남사면의 주민들이 선조들의 자랑스러운 행동을 기리기 위해 지역의 이름을 바꾸어달라고 요구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이 사안을 검토 해온 용인 시청은 2005년 행정단위를 3개구로 재편할 당시 남사면이 포함된 이 지역을 처인구로 재편했다.
▶ 사령관 잃고 퇴각한 몽골군
사령관을 잃은 몽골군은 사기가 극도로 떨어져 도망 길에 올랐다. 사령관이 죽으면 전쟁을 중단하는 것은 몽골군의 관례였다.
"한꺼번에 모여 돌아가지 않고 혹은 먼저 가고 혹은 낙오돼 뒤쳐져 가기도 했으며 혹은 동쪽으로 가려하고 혹은 북쪽으로 가려했기 때문에 떠나는 기일을 정하지 못하고 어디로 갈지도 알지 못했다."
고려사에 기록된 당시 후퇴하던 몽골군의 모습이다. 세계 최강을 자랑하던 몽골 푸른 군대의 체면은 말이 아니었다.
▶ 몽골 내부사정으로 보복원정 지연
원정군의 총 사령관이 살해되는 결과를 가져왔다면 다른 곳의 예로 보면 몽골군은 보복을 위해 즉각 대군을 이끌고 다시 한반도로 밀려오는 것이 다음 순서인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금나라와의 전쟁이 한창 막바지로 치닫고 있는 상황에서 몽골은 주력부대를 다른 곳으로 빼내 전선을 분산시키기가 어려웠다.
▶ 불타 버린 황룡사
그해 탕구(唐古)가 이끄는 몽골군이 다시 고려로 밀어 닥쳤다. 3차 침공이었다. 이번에도 홍복원이 길잡이로 나섰다. 몽골군은 강화교섭도 벌이지 않고 무조건 약탈전술로 일관했다. 사르타크가 살해된 데 대한 보복의 의미를 담고 있었다. 5년에 걸친 오랜 싸움이 이어지는 동안 몽골군은 가는 곳마다 방화와 약탈 그리고 학살을 자행하며 국토를 유린했다.
대 약탈이 휩쓸고 지난 간 자리에는 귀중한 문화유산들이 잿더미로 남았다. 삼국시대 최대 사찰이었던 경주 황룡사(皇龍寺)도 이 때 불에 타면서 황룡사 9층 목탑은 한줌의 재가 돼버리고 말았다. 고려의 군관민은 유격전 형식으로 몽골군에 철저히 대항했다.
▶ 죽주성의 신명(神明) 송문주
죽주산성에 세워진 안내표지판에 담긴 내용이다.
송문주는 귀주성에서 몽골군의 화공(火攻)을 비롯한 여러 형태의 공성전을 경험한 바 있었기 때문에 몽골군의 공세는 별로 두려운 것이 아니었다. 투석기를 이용한 공격도, 기름과 송진을 활용한 공격도 아무 소용이 없었다. 송문주가 ‘이번에는 몽골군이 어떤 장비로, 어떻게 공격해 올 것이니 마땅히 이런 방법으로 응전하라’고 지시하면 적은 어김없이 그런 방법으로 공격해 왔기 때문에 적을 물리치는 것이 어렵지 않았다.
상황마다 미리 대비책을 내놓는 송문주는 부하들이나 백성들에게 전략의 귀재로 보인 것은 당연했다. 그래서 그에게는 신명(神明)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고려사에서는 “귀주에 있으면서 몽골의 공성술을 익히 파악해 신명과 같아 그 계획을 미리 헤아리지 않음이 없었다.”고 평가하고 있다. 특히 몽골의 압박으로 고향인 죽주로 돌아와 있던 귀주성의 영웅 박서가 송문주를 적극 도왔다. 두 사람의 경험과 전략이 합쳐지면서 귀주성의 승첩이 가능했던 것이다.
▶ 승전 기리기 위해 세운 태평미륵
지금은 이름이 죽산(竹山)으로 변한 죽주는 행정상으로는 안성군 이죽면으로 돼 있다. 중부고속도로를 타고 가다 죽산 인터체인지를 빠져 나오면 죽산 삼거리가 나온다. 거기에서 오른쪽으로는 용인 가는 길이, 왼쪽으로는 안성 가는 길이 나온다. 죽산성은 바로 용인가는 길, 매산리 국도변에서 10분 거리에 있는 야산에 자리 잡고 있다. 이성은 신라 때 처음 축성됐다가 고려 때 증축된 것으로 3차 몽골 침입 때 송문주는 주민들과 합세해서 이 성을 지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