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권의 酒食雜記] 탈선(脫線)과 이색(異色)

2017-11-23 06:00

[사진=박종권 칼럼니스트]


스티브 잡스가 모범생이었다면 아이폰의 신화는 불가능했을지도 모른다. 사실 그는 젊은 시절 대학도 중퇴하고 환각제 LSD에 취하기도 했다. “LSD는 내 생에 가장 중요한 경험이었다”고 실토한 적도 있다. 이런 탈선의 경험이 파격을 통한 창조의 밑거름이 됐을까. 사실 작금의 실리콘 밸리는 60년대 히피들이 집단으로 모여 환각제 축제를 벌이던 지역이었다.

시대의 선구자 잡스의 모토는 우직하게 한 우물을 파는 것이다. 그가 2005년 스탠퍼드대학 졸업식에서 "우직하게, 늘 갈망하라(Stay hungry, stay foolish)"고 말했을 때 세상은 박수를 쳤다. 이 짧은 문장은 시대의 화두가 됐다.

어쩌면 잡스의 모토는 ‘앞서기’였을 것이다. 잘 알려진 대로 그는 빌 게이츠를 싫어했다. 시대에 대한 통찰이나 독창성 없이 앞선 지위를 이용한 ‘독점적 마케팅’으로 IT계를 풍미한 것으로 봤다. 그의 끝없는 경쟁심이 오퍼레이팅 시스템(OS) 분야에서 2위로 밀린 것을 용납하기 힘들었을지 모른다. 여하튼 잡스는 앞서기 비결을 ‘항상 갈망하면서 우직하게 일하는 것’으로 봤던 듯하다.

당시 사회는 인생이든 기업이든 성공을 향한 의지가 대단했다. 목표도 분명해 보였다. 모두 골인 지점을 향해 숨가쁘게 내달렸다. 진(秦)나라 말기 천하를 두고 쟁패하던 시절 '축록자'(逐鹿者)들처럼. 사슴을 잡으려면 토끼는 돌아보지 않는 불고토(不顧兎)의 ‘우직함’과 한신(韓信)처럼 가랑이 밑을 기면서도 움켜쥔 권력을 향한 ‘갈망’이 필요하지 않았겠나.

하지만 10년이면 강산만 변하는 것이 아니라, 시대정신도 바뀐다. 이른바 초(超)연결시대이다. 지구인 5000만명을 연결하는 데 전화가 70년이 걸린 것에 반해 인터넷은 4년 걸렸다. 하지만 ‘앵그리버드’란 게임 앱은 불과 35일 걸렸다. 이 광속(光速)시대에 과연 ‘우직한 갈망’이 여전히 유효한가.

2015년 제87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다. 미국의 시나리오 작가 그레이엄 무어가 영화 ‘이미테이션 게임’으로 각색상을 받았다. 이미테이션 게임은 천재 수학자로 컴퓨터공학의 아버지라 일컬어지는 영국의 앨런 튜링의 일대기를 영화화했다. 튜링은 제2차 세계대전 때 독일의 암호 체계인 ‘에니그마’를 풀어 연합군의 승리에 기여했다. 그 공로로 대영제국 훈장도 받았다.

그런데 튜링은 당시로서는 범죄인 동성애자였다. 사회적으로 보면 탈선이고, 현대적으로는 이색적인 성적 기호였다고 할까. 그는 1952년 외설죄로 고발돼 법원에서 화학적 거세를 선고받고 여성 호르몬을 복용했다. 모멸감에 빠진 그는 1954년 6월 청산가리를 넣은 사과를 먹고 42살의 나이에 자살했다. 잡스가 세운 애플사의 로고가 한 입 베어먹은 사과인 것은 튜링에 대한 무언의 헌사로 알려져 있다. 그는 2013년에야 영국 여왕의 특별사면령으로 공식 복권됐다.

무어가 이미테이션 게임으로 빛을 발한 것은 33세였다. 그는 시상대에서 “16세 때 자살충동을 느꼈다. 내가 좀 삐딱하거나 다르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나는 지금 이 (자랑스러운) 자리에 섰다. 후배들에게 조언한다면, 좀 삐딱하고 다르면 어떤가. 그래도 괜찮다.” '삐딱하고 다르게'는 영어로 ‘Stay weird, stay different!’다. 바로 스티브 잡스의 연설 ‘Stay hungry, stay foolish!’를 모방한 것이다. 이미테이션 게임을 번역하면 ‘모방 게임’이 아닌가. 수상 소감에서도 ‘모방 본능’을 발휘한 것이다. 오히려 더 창조적이고 트렌디하게 말이다.

‘모방’이라고만 치부하기에는 좀 더 심오한 통찰이 담겨 있다. 바로 시대정신의 변화이다. 잡스가 연설한 2005년의 트렌드가 ‘늘 갈망하며, 늘 우직하게’였다면, 10년이 지나 무어가 연설한 2015년의 트렌드는 ‘좀 삐딱하고, 좀 색다르게’로 변했던 것이다. 이제 ‘앞서기’보다 ‘차별화’가 열쇠이다. 공급자 주도 물량 시대에는 우직하게 1등을 향해 달렸다면, 소비자 주도 창의성 시대에는 삐딱하게 바라보며 색다르게 생각하는 것이 미덕이다. 

본질은 변하지 않았는데, 주위 여건이 변해 본질마저 달리 보이는 것인지도 모른다. 주위 배색에 따라 달리 보이는 ‘동시(同時) 색 대비’처럼. 원래 중심 색은 그대로인데 둘러싼 배색의 색상과 명도와 채도에 따라 차이가 나는 현상 말이다. 그런가 하면 두 가지 색상에서 문득 한 색상이 사라지면, 사라진 자리에 다른 색상이 보이는 ‘계시(繼時) 색 대비’일 수도 있다.

모든 비범은 자연스러운 평범의 이면이다. 시대를 이끈 튜링과 잡스와 무어의 교집합은 바로 탈선과 이색, 삐딱하고 다른 관점이다. 이는 사피엔스의 특성이자 본성이다. 

'대성약결'(大成若缺)이라 했다. 진정한 완성은 어딘가 부족해 보인다는 말이다. 그러면 '대성유결'(大成有缺)은 어떤가. 결점이 있어야 크게 성공한다는 뜻으로. 혹한을 겪은 가문비나무가 스트라디바리우스의 명품 바이올린이 된다. 과거가 없는 사람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