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석규의 대몽골 시간여행-89] 대도의 흔적은 얼마나 남았나? ②

2017-11-19 10:13

[사진 = 배석규 칼럼니스트]

▶ 점처럼 박혀 있는 북해 놀잇배

[사진 = 경산공원 만춘정]

경산공원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한 정자인 만춘정(萬春亭)에 올라서자 시야가 한층 나아졌다. 특히 서쪽 아래에 펼쳐져 있는 거대한 호수 북해 쪽은 비교적 또렷하게 그 모습이 잡혔다. 녹색의 숲으로 둘러싸인 공원의 한가운데를 차지하고 있는 거대한 호수에는 수많은 배들이 점처럼 박혀 있었다. 휴일을 맞아 즐기는 북경시민들의 놀잇배였다. 북해는 옛 황실의 인물들이 호화스러운 배를 타고 놀이를 즐겼던 곳이다

▶ 마지막 황제의 호화 뱃놀이
중국에 머물렀던 몽골족의 마지막 황제 토곤 테무르는 북해공원 위에 용선(龍船)이라는 호화스러운 배를 띄워 놓고 뱃놀이를 즐겼다. 용을 모양을 본떠서 만든 뱃머리는 배가 움직이면 여의주와 함께 움직이도록 만들어져서 마치 용이 움직이는 것처럼 보였다고 한다. 무려 길이가 160미터나 되는 거대한 놀잇배의 위에는 다섯 채의 궁전이 마련돼 있어 토곤 테무르와 그의 가신들은 그 안에서 호화로운 뱃놀이를 즐겼다.

고려인 공녀 출신 기왕후가 주도한 궁정 암투와 가신들의 권력 다툼으로 대원제국이 사분오열 돼 있었는데도 한가롭게 뱃놀이를 즐기고 있었으니 주원장의 군대가 북경으로 밀어 닥쳤을 때 이들은 황급히 북쪽 초원으로 도망 갈 수밖에 없었던 것은 당연한 결과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적어도 쿠빌라이가 이곳에 대도를 세우고 태액지라는 이름으로 인공호수를 만들었을 때 그의 후손들이 이곳에서 뱃놀이나 하면서 나라를 한족에게 넘겨주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 시민들의 휴식처로 변한 황실 호수

[사진 = 북해공원 유람선]

당시 서민들은 황제를 비롯한 귀족들의 놀이터였던 이 금지된 호수에 접근하는 것을 감히 엄두도 내지 못했겠지만 지금은 북경시민들이 가장 즐겨 찾는 놀이터로 변해 있다. 궁궐의 한가운데 있었던 넓은 호수가 마치 바다 같다고 해서 북쪽의 바다 즉 북해라고 부르기도 했지만 기능 면에서 위쪽에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적수담과 함께 멀리 바다로 이어지는 종착점이었기 때문에 그렇게 불렀는지도 모른다.

빽빽이 들어서 있는 녹색의 숲과 그와 비슷한 색을 띠고 있는 짙푸른 수면 그리고 숲 속의 곳곳에 자리한 고풍스러운 옛 궁궐들이 어우러진 북해공원의 모습은 중국 역사의 한 부분을 머금고 독특한 느낌을 풍기며 펼쳐져 있다. 호수와 경산공원의 중간 지점쯤에 백색 탑이 눈에 들어왔다. 티베트 불교, 라마교의 백탑이 서 있는 곳이 바로 쿠빌라이가 대칸의 자리에 오르기 전 그의 추종자들과 함께 머물렀다는 인공의 섬 경화도(瓊華島)이다.

▶ 녹지와 물이 어울린 도심의 공간

[사진 = 경산공원서 본 북해]

경산공원의 정상에서 보던 북해는 웅장한 맛을 안겨줬지만 끝이 아른거릴 정도로 넓게 펼쳐져 있는 호수의 모습을 북해 공원 안에서 보니 또 다른 시원한 맛을 느낄 수 있었다. 호수 주변에 녹색의 버드나무가 우거져 있는 북해는 녹지와 물이 어울린 도심 속의 넓은 공간이었다.
 

[사진 = 북해 공원 일대]

도시 중심부에 자리한 아름답고 수려한 공원! 가슴을 확 트이게 하는 이곳은 바쁜 도시생활에 지친 북경시민들에게 활력소가 되는 휴식공간으로 인기를 얻고 있다. 북해공원의 면적은 68헥타르, 그 가운데 절반이 넘는 39헥타르가 호수다. 사방 6백 미터 이상이 되는 정도의 면적이지만 호수의 모양이 고구마처럼 세로로 길쭉하게 생겨 실제 호수 해안의 총 길이는 3,449미터나 되고 호수의 깊이는 평균 2미터 정도가 된다.

▶ 인공 섬과 호수 들어선 늪지대

[사진 = 경산공원 중국인]

북해는 천 년 전인 10세기에는 경치가 수려한 늪지대였다. 당시 요나라는 이곳에 행궁(行宮:왕이 임시로 머무는 궁전)을 지었다. 이어 12세기 금나라 때 들어서는 이곳에 늪을 파서 섬을 만들고 호수는 서화담, 섬은 경화도라고 불렀다. 금나라는 당시 북송의 수도인 개봉을 함락시키고 그곳 북쪽에 있는 간악(艮嶽)에서 이름난 돌들을 가져와 섬을 만든 것으로 전해진다.

경화도(瓊華島)는 옥 같이 아름다운 섬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기도 하지만 전설 속의 불로장생 식물인 경화의 이름을 따서 섬을 이름을 지었다는 설도 있다. 그러나 역시 북해가 본격적으로 역사에 등장하게 된 것은 쿠빌라이에 의해서였다. 대도를 건설하기 전 바로 이 호수 옆에다 겨울 캠프를 치고 지냈던 쿠빌라이와 그의 참모들은 이 호수를 중심으로 새로운 수도 대도의 건설을 구상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래서 쿠빌라이는 이 호수를 근거지로 삼아 주변에 대도를 건설하기로 마음을 정하고 이 호수 주위를 둘러싸는 대도시 건설에 착수하면서 호수의 이름도 태액지(太液池)라고 바꾸었다.

▶ "기쁨과 열락 주는 초록색 언덕"

[사진 = 경산공원 관광객]

다시 마르코 폴로가 당시의 태액지와 경화도를 언급한 내용을 인용해 보자

"서북쪽 모퉁이에 매우 큰 호수에는 각종 물고기가 있었다. 대칸은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물고기를 잡을 수 있도록 여러 종류의 고기를 거기에 넣도록 했다. 그곳에서 매우 큰 강이 흘러나와 언덕근처의 수로를 통과한 뒤 대칸의 황궁과 황태자인 칭킴의 궁전 사이에 있는 또 다른 크고 깊은 웅덩이를 채운다. 그리고 강은 호수의 다른 쪽으로 흘러나간다. 연못에는 백조 등의 물새가 떠다니고 지상에는 궁전에서 궁전으로 이어주는 다리가 걸려 있었다. 궁전에서 북쪽으로 눈을 돌리면 활을 쏘아 닿을만한 거리에 언덕 하나가 있다. 이 언덕은 1년 내내 잎이 지지 않는 상록수로 뒤덮여 있다. 대칸은 어디에 근사한 나무가 있다는 말을 들으면 많은 흙과 함께 나무를 뿌리 채 뽑아 코끼리를 이용해 운반토록 했는데 이런 방법으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무들이 이곳에 모아졌다. 이 언덕은 초록색을 제외하고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아 '초록색 언덕'이라 불렀다. 이 언덕의 나무와 전각은 너무나 아름다워 그 것을 관상하는 사람에게 기쁨과 열락을 느끼게 한다."

▶ 티베트불교 백탑 청나라 때 세워져

[사진 = 백탑]

마르코 폴로가 언급한 내용은 적수담과 수로로 이어진 태액지를 설명한 것이다. 또 아랫부분에 언급된 초록색 언덕은 태액지 안에 있는 경화도를 설명한 것이다. 이 경화도에 티베트 불교(라마교)의 백탑이 세워진 것은 쿠빌라이가 대도를 건설한지 4백년 정도 후인 청나라 때였다.

백탑 안에는 라마의 경문 의발 등이 보존돼 있고 곁에 있는 반원형 건물에는 황희지(王羲之)와 그의 아들 왕헌지(王獻之) 그리고 왕순(王殉) 등 서예가들의 작품 340여 점이 보관돼 있어 이를 보기 위한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