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련, 배철현의 아침묵상] 감각感覺

2017-11-13 05:00

[사진=배철현 서울대 교수(종교학)]

 
허무
오늘 아침 나는 가만히 방석에 앉아 지난 일주일 동안 내가 한 일들을 곰곰이 생각해본다. 나는 나에게 감동적인 원대한 목표를 향해 묵묵히 걸었는가? 나는 호시탐탐 내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유혹과 산만함을 관조해 초월할 수 있었는가? 저 하늘의 북극성보다도 빛나는 내 마음의 별을 바라보았는가? 그 별을 열망하여 추구하였는가? 시간은 자신을 매순간 감동적으로 혁신하지 않는 사람에겐 허무(虛無)다.
 
고대 이스라엘의 위대한 왕이자 가장 지혜롭다고 존경받는 솔로몬조차 인생 말년에 회한의 감탄사를 ‘전도서’에서 외쳤다. “나는 지난 세월들을 너무 헛되게 살았구나! 헛되게 살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구나. 내가 행했던 모든 것들이 헛되다!” 고대 히브리어로 ‘헛되다’라는 단어는 ‘헤벨’(hebel)이다. 경전에 등장하는 단어들처럼 이 단어도 이중적이다. 인간의 경험으로 확인할 수 있는 구체적인 의미와 경험을 넘어선 추상적인 의미가 있다. 헤벨의 가시적인 의미는 ‘수증기’ 혹은 ‘연기’다. 굴뚝에서 나오는 연기가 금세 사라져 자취를 감추기 때문에 추상적인 의미가 이뤄진다. 헤벨의 추상적 의미는 ‘허무’다. 솔로몬은 인생을 연기에 비유하여 ‘허무’라고 한탄했다.
 
우리는 자신에게 다가오는 순간들을 어떻게 위대한 자신을 위한 결정적인 순간으로 만들 수 있을까? 내 몸과 정신에서 요동치는 다양한 욕망들과 생각들을 인식하고, 주변에서 내게 무차별로 다가오는 사건들을 관조하는 기술이 있다. 바로 '감각'(感覺)이다. 감각은 수련을 통해 자신과 주변을 오랫동안 관찰하여 그 모든 것을 감지하는 능력이다. 우리는 자신의 분야에서 일가를 이룬 사람을 ‘감각이 있는 사람’으로 부른다. 우리는 대부분 과거라는 습관에 마취돼 있다. 습관은 날마다 다가오는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려는 우리를 방해하여 좌절시킨다. 나는 어떻게 날마다 새로운 감각을 키울 것인가?
 
감각
나는 몇 달 전 충치 치료를 받았다. 마취주사는 치료하려는 치아 부근의 감각을 최대한 제거하여 고통을 덜어준다. 내가 치료를 마친 후, 입을 헹구려 할 때 이상한 일을 경험했다. 입안의 물을 뱉으려고 하지만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아직 마취가 덜 풀려 입 모양이 내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혹은 무릎을 꿇고 잠시라도 앉아본 적이 있는 사람은 다리를 풀더라도 제대로 뻗을 수 없다. 다리에 감각이 돌아올 때까지 움직일 수 없다.
 
내 몸의 근육을 움직이는 감각을 조절하는 보이지 않는 것이 있다. 바로 ‘신경조직’이다. 신경조직은 몸 전체를 조화롭게 움직이도록 뇌를 들락날락거리는 상호소통의 길이다. 신경조직에는 뇌로부터 신호를 전달받는 ‘운동신경’과 그 감각신호를 뇌로 돌려보내는 ‘감각신경’이 있다. 만일 내가 어젯밤 옆으로 누워 잠을 잤다면, 아침에 팔이 저려 마비된다. 내 팔의 감각을 잃었을 뿐만 아니라 나는 팔을 움직일 수도 없다. 팔의 감각을 회복하기 위해 팔을 조심스럽게 움직이면 운동신경이 먼저 작동되고, 얼마 가지 않아 감각신경이 돌아와 팔을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다. 팔에 감각이 돌아오기 전 팔을 움직일 수 있으나 감각이 없는 시간이 있다.
 
뇌에서 보낸 운동신경 신호를 따라 다양한 근육들이 반응한다. 뼈를 감싼 골격근, 그리고 평상시 운동량에 따라 최적화된 운동을 기억하여 마치 작은 스프링처럼 근육을 잡아당기고 늘이는 근육인 '근방추'(筋紡錘)가 있다. 몸을 움직이는 행위는 뇌가 근방추로부터 신호를 받아 힘줄과 관절을 움직이는 것이다. 이때 인간이 가진 보고, 맡고, 맛보고, 만지고, 듣는 오감 이외에 또 다른 감각이 작동한다. 우리가 눈을 감고 코를 만지거나, 손을 흔들거나 혹은 공을 발로 차는 행위에는 이 다른 감각이 등장한다. 이 여섯 번째 감각이 ‘고유수용감각’이다.
 

미국의 무용가 마사 그레이엄(Martha Graham) [사진=배철현 교수 제공]


제6의 감각, 고유수용감각(固有收容感覺)
우리는 오감과 달리 이 여섯 번째 감각을 쉽게 경험하지 못하기 때문에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인식하지 못한다. 그러나 고유수용감각을 인식하지 못하고 방치한다면 눈이나 귀가 머는 것보다 더 치명적인 병을 얻는다. 우리의 근육으로부터 오는 감각적인 정보 없이 인간의 오감을 작동할 수 없다. 몸의 중요한 기관과 그와 관련된 근육의 움직임 없이 걷거나 움직이거나 먹는 것은 불가능하다.
 
영국 생리학자인 찰스 셰링턴(1857~1952)은 뇌가 사물을 인식하고 그것을 반등하는 인간의 중추신경계를 혁신적으로 연구해 ‘외수용감각’, ‘내수용감각’, 그리고 ‘고유수용감각’이란 용어를 만들어냈다. 외수용감각은 외부의 반응에 대한 신체의 반응들, 즉 오감을 통한 정보를 제공하는 감각이며, 내수용감각은 신체 내부, 특기 장기의 상태와 변화로부터 오는 배고픔이나 고통과 같은 감각들이다. 고유수용감각은 근육, 힘줄, 관절로부터 나오는 움직임에 관한 정보다. 고유수용감각을 영어로 ‘프로프리오셉션’(proprioception)이라 부른다. 이 단어는 ‘자기 자신의; 고유한’이란 라틴어 형용사 ‘프로프리우스’(proprius)와 ‘수용하다’라는 라틴어 동사 ‘카페레’(capere)의 합성어다.
 
고유수용감각은 사람마다 다르다. 자신이 수련을 통해 자신의 근육을 훈련하면, 그 근육은 점점 더 강인해지면서 유연하게 된다. 누구나 자신의 수련 정도에 따라 고유한 근육감각을 가질 수 있다. 현대무용의 창시자라고 불리는 마사 그레이엄(1894~1991)은 남들과는 다른 자신만의 수용감각을 가지고 있다. 그녀는 누구보다도 많이 근육을 늘릴 수 있고 줄일 수도 있다. 그리고 그녀의 몸은 유연하다. 수많은 수련을 통해 그레이엄은 자신만의 무용감각을 만들었다.
 
근육은 운동으로 훈련하지 않으면 시간이 지나면서 감각이 무뎌지고 급기야는 무감각하게 되기 마련이다. 환각(幻覺)은 자신을 훈련하지 않은 사람들의 특징이다. 불의의 사고로 사지가 절단된 사람 혹은 몸의 일부가 절단된 사람이 수술 후에도, 자신의 절단된 신체가 아직도 멀쩡하다고 착각하는 현상을 환각지(幻覺肢)라고 부른다. 신체와 마찬가지로 정신적인 ‘환각지’가 있다. 자신에게 주어진 고유한 임무를 수련하지 않는 사람은 ‘생각이라는 근육’을 더 이상 사용하지 않는다. 그는 자신에게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헛것’을 추구하는 환각에 빠진다.
 
생각
감각은 내가 스스로 세상을 보려는 시선이다. 그 시선은 매일 매일 내게 주어진 하루를 어떻게 보낼 것인가를 생각하는 정신근육운동에서 시작한다. 배움이란 자신이 모른 다양한 정보를 축적하는 것이 아니다. 이미 손바닥만한 핸드폰 안에 세상의 모든 지식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배움이란 오늘을 어떻게 살 것인가를 생각하는 훈련이다.

생각은 너무나 당연하거나 하찮은 것으로 여기는 것들을 다시 천천히 보는 정신훈련이다. 미국 작가 데이비드 월러스는 ‘이것이 물이다’라는 글에서 물고기 야이기를 소개한다. 두 마리 젊은 물고기가 헤엄치고 있었다. 그 곁을 지나가던 나이든 물고기가 물어본다. “물이 오늘 어때?” 그러자 젊은 물고기들이 서로에게 묻는다. “물이 뭐지?” 이 이야기는 우리 삶에 있어서 가장 당연한 것, 흔히 보는 것, 그래서 가장 중요한 현실은 우리가 볼 수도 없고 언급하지도 않는 것들이라고 말한다.

나는 오늘 무엇을 생각할 것인가? 나는 오늘이라는 새로운 날을 위해 어떤 방식으로 ‘초기설정’을 취한 것인가? 나는 어제의 초기설정을 그대로 수용할 것인가? 오늘을 위한 나의 초기설정에 대한 노력이 ‘생각’이고, 그 생각을 훈련한 것이 나의 고유하며 유연한 ‘감각’이 될 것이다.

당신은 오늘을 감각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환각하고 있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