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석규의 대몽골 시간여행-81] 쿠빌라이는 왜 장강(長江)을 건넜나?

2017-11-11 09:40

[사진 = 배석규 칼럼니스트]

▶ 전쟁을 선택한 대권 도박

[사진 = 사냥에 나선 쿠빌라이]

명분과 세력에서 약세인 쿠빌라이가 대권을 차지하기 위해서는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가장 단순한 수순은 막내 동생 아릭부케와 한판 승부를 벌여서 대권 싸움의 결판을 내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러한 선택은 승산이 희박했다. 쿠빌라이는 참모장 바아투르와 머리를 맞댔다. 그는 쿠빌라이의 정부인인 차비의 친언니 남편, 그러니까 손위 동서였다. 쿠빌라이로서는 가장 신뢰할 수 있는 인물과 함께 당시의 정세를 분석했다.

그 결과 선택한 카드는 남송과의 전쟁을 계속하는 것이었다. 대권을 잡기 위해서는 당연히 카라코룸으로 달려가 동생과 한판 힘겨루기에 나서야 힐 것으로 보였던 쿠빌라이는 방향을 그대로 남쪽으로 잡은 것이다. 대권 다툼의 경쟁자가 있는 카라코룸은 버려 둔 채 남송과의 전쟁에 나설 것을 주장하고 나선 것은 바아투르였다.

"우리들은 군사를 이끌고 개미나 메뚜기처럼 이 땅에 왔습니다. 이미 남송과의 전쟁에 나선 것으로 소문이 널리 퍼져 있는 데 임무를 수행하지 않고 돌아갈 수 있겠습니까?"

쿠빌라이는 이 주장을 받아들였다.이는 동생 아릭 부케에 비해 불리한 입장에 있었던 쿠빌라이의 입지를 반전시켜주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 이 엉뚱한 수순을 통해 쿠빌라이는 명분(名分)과 실리(實利)를 모두 얻었기 때문이다.

▶ 명분과 실리 노린 도강작전

[사진 = 오논강 뗏목 도강]

물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고 남송과의 전쟁을 승리로 이끌어야만 한다는 점에서 이 시도는 분명 도박이었다. 그러나 명분에서 밀리고 군사력에서도 열세인 쿠빌라이가 이 두 가지를 단숨에 유리한 쪽으로 바꿔 놓기 위해서는 이 보다 더 절묘한 선택은 없었을 것으로 보인다.

우선 남송과의 전쟁은 전쟁터에서 숨진 뭉케의 유업을 계승한다는 명분이 있었다. 또 남쪽 전쟁터에 남아 있는 우랑카타이軍을 구한다는 명분도 있었다. 이 또한 자칫 적이 될지도 모르는 우랑카타이와 그의 군사들을 손에 넣을 수 있는 계기가 될 가능성도 있었다.

▶ 관망세력 유인 노린 절묘한 선택
무엇보다 대권장악의 결정적인 요인이 되는 강력한 군사력의 장악을 위해서도 이 선택은 현명했다. 군사력이 받쳐주지 않으면 대권싸움에서 이길 수 없다는 것은 이미 뭉케의 대칸 즉위 때 입증된 사실이었다. 뭉케는 주치가와 툴루이가의 대 군단을 배경으로 대칸의 자리를 차지했다. 당시 쿠빌라이군은 몽골과 거란, 여진, 한족의 연합군이었다.
 

[사진 = 남북대운하(천진)]

만일 쿠빌라이군이 북쪽 카라코룸으로 방향을 잡는다면 결집력이 없는 이 군단은 뿔뿔이 흩어져 버리고 말 것이다. 더욱이 그 때까지 군벌형태로 중국 대륙 곳곳에 자리 잡은 여러 세력들은 어느 쪽의 손도 들어주지 않은 채 사태의 추이를 지켜볼 것이 분명했다. 그들은 상황이 유리해지는 쪽의 손을 들어줄 가능성이 높았다. 쿠빌라이의 남송과의 전쟁 시도는 바로 관망자의 자세로 지켜보고 있는 이들 중도 세력을 자신의 진영으로 끌어들이는 작업이라는 데 가장 큰 의미가 있었다.

▶ 두려움의 장강 건너 상황반전 노려
유목민들은 물을 두려워한다. 땅에서 말을 타고 달리며 벌이는 전투에서는 탁월한 능력을 발휘한다. 하지만 수전(水戰)이나 도강(渡江)작전은 그들의 전공이 아니었다. 그래서 남송과의 사이에 버티고 있는 거대한 장강(長江) 자체만 해도 유목민군대에게는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쿠빌라이는 바로 그 두려움의 벽을 깨고 장강을 건너 남 송을 공격함으로써 관망 자세에 있는 많은 세력을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이려는 구상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사진 = 장강(양자강)]

중국대륙을 동서로 가로지르는 장강!
1259년 9월, 장강 중류 북쪽에 쿠빌라이 군대가 나타났다. 쿠빌라이는 그해 여름을 산동 서반부의 한인 대군벌(大軍閥) 엄충제(嚴忠濟)의 영내에서 보내면서 엄씨 군벌을 비롯한 주변의 군벌들을 휘하로 끌어들이는 데 성공했다. 군대가 더욱 막강해진 것은 물론 병참과 보급선까지 부가적으로 확보한 쿠빌라이는 황하를 건너 장강으로 남진해온 것이다. 1259년 9월 장강 중류에 도착한 쿠빌라이의 군대는 강을 건너 장강 수륙교통의 중심지 악주(鄂州)을 둘러쌌다.

▶ 부적을 붙이고 건넌 장강

[사진 = 악주전투前 쿠빌라이軍]

악주는 바로 지금의 무한(武漢)이다. 지금은 호북성 제일의 상업도시인 무한은 당시에도 수륙 교통의 요지였다. 한구(漢口)와 무창(武昌) 한양(漢陽) 등 세 지역을 합쳐 무한 3진이라 부르며 장강 중류의 번영을 구가하던 곳이었다. 이백 등 중국의 시인들의 시속에는 물론 무협소설에 자주 등장하는 황학루(黃鶴樓)가 있는 곳도 바로 이 무한이다.

쿠빌라이 군대는 장강을 건너기를 두려워하는 병사들의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 호부(護符), 즉 부적을 붙이고 강을 건너게 했다고 집사는 전하고 있다.
쿠빌라이가 악주를 공격 대상으로 선택한 것은 두 가지 목적이 있었다. 우선 장강에 의지해 정권을 유지하고 있는 남송의 허리를 잘라 동서로 나누려는 것이 그 하나고 운남에서 북상하는 우랑카타이군과 만나야하는 것이 다른 하나였다.

▶ 도박성공..관망세력 대거 합류
예상치 못한 도강에 남송은 크게 당황했다. 그러나 쿠빌라이군은 악주를 포위만 한 채 공격할 기색이 별로 없었다. 장강을 건너 남송 진영을 공격했다는 그 사실만으로도 쿠빌라이는 의도했던 목적을 이루는 데 부족함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쿠빌라이군의 도강은 그 자체로 당시 상황을 지켜보던 각 세력들에게 큰 충격이었다.

물을 두려워하는 유목민 군대가 벌인 성공적인 도강작전! 그들은 쿠빌라이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하고 그의 진영으로 합류하기 시작했다. 우선 강력한 군사력을 지닌 동방 3왕가가 쿠빌라이 진영에 합류했다. 이를 계기로 관망 상태에 있던 중국 각지의 여러 세력들이 줄줄이 쿠빌라이 진영으로 모여들었다. 물론 우랑카다이군과 옛 뭉케 잔류부대의 상당수도 합류했다.

▶ 싱거운 전투..역사적 의미는 커

[사진 = 항주(임안) 전당강]

악주 전투라고 불리는 남송과의 대결은 사실상 쿠빌라이군과 남송군 간에 큰 충돌은 없었고 양편 힘겨루기는 서로의 명분만 살린 채 싱겁게 끝났다. 그렇지만 역사적으로는 그 의미가 컸다. 우선 쿠빌라이에게는 대권장악을 위한 전기가 됐고 남송에게는 15년에 걸친 가사도(가賈似道)정권을 탄생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사진 = 항주(임안)의 서호]

남송 구원 부대를 이끌고 나타난 남송의 가사도가 쿠빌라이 진영과 은밀한 정전 협정 후 도강하는 쿠빌라이軍에 공격을 가해 약간의 손실만 입혔다. 임안(臨安:지금의 항주)으로 돌아간 가사도는 이것을 대승으로 선전하며 정권을 장악하는 수단으로 활용했다. 가사도는 원래 학문도 병법도 모르는 건달이지만 누이가 남송황제인 이종의 총애를 받은 연줄로 높은 벼슬에 오른 인물로 결국은 남송을 망하게 하는 간신배로 역사에 기록된다.

▶ 명분 실리 챙겨 중도(中都)로

[사진 = 쿠빌라이 초상화]

상황이 반전되는 것을 지켜보면서 쿠빌라이는 방향을 다시 북쪽으로 잡았다.
후계 다툼에서 승기를 잡아야할 상황에서 남송과의 전쟁에 매달려 있을 필요성을 더 이상 느끼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여러 세력의 합류로 쿠빌라이는 대칸의 자리를 차지할 수 있는 충분한 힘을 갖췄다.

운명을 건 도박에서 명분과 실리를 챙긴 쿠빌라이는 다음 수순을 밟아 나갔다. 우랑카타이군 구출을 위해 바아토르를 남겨 놓은 쿠빌라이는 다시 장강을 건넜다 쿠빌라이가 병사들을 이끌고 건널 때 장강은 두려움의 강이었지만 다시 돌아서 건널 때는 미래를 약속하는 희망의 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