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성교칼럼] 트럼프 대통령의 방한과 한반도 운명
2017-10-19 20:00
[서성교칼럼]
트럼프 대통령의 방한과 한반도 운명
트럼프 대통령은 힘에 바탕을 둔 평화 구축, 미국 우선주의 등 현실주의 외교정책을 지속적으로 표방해왔다. 특히 북한의 미사일 발사와 핵 실험에 대해서도 외교와 군사적 옵션 등 모든 것을 검토해 오고 있다. 이번 방한을 통해서 보다 명확한 메시지를 제시할 것으로 예상된다. 트럼프는 순방 준비 차 키신저 전 국무장관을 만나 조언을 구했다. 키신저를 "매우 존경하며 오랜 친구이자 엄청난 재능과 경험, 지식을 가지고 있어서 만나는 게 영광"이라고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키신저는 강대국 중심의 이익을 추구하는 냉정한 현실주의(realpolitik) 외교정책을 추구해온 인물이다. 국제사회에서 영원한 적도, 영원한 친구도 없다. 원칙과 이념보다는 철저하게 국가이익을 추구해야 한다.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강대국 간 세력 균형(balance of power)을 유지해야 한다. 그리고 가능한 한 이익이 없는 곳에는 간섭할 필요가 없다는 불간섭주의를 주장해왔다.
키신저가 조언한 북핵 해결 방안은 평소 소신인 ‘미·중 간 빅딜’이다. 중국이 김정은 정권 교체와 북핵 문제를 해결하면 미국은 한반도에서 철수하겠다는 내용이다. 그 논거로 강대국인 ‘미국과 중국이 한반도 교착 상태를 풀어가는 게 최고의 방법’이다. 더욱이 북한 핵문제는 중국을 포함한 동북아 지역에 위협 요소이다. ‘아시아 지역의 핵 무장을 막는 것은 미국보다 중국에 더 큰 이해가 걸린 현안’이다. 북·미 간의 직접 대화보다는 북·중 간에 해결해야 한다. 중국에 대한 인센티브는 주한 미군의 철수이다. 그 이후의 시나리오에 대해서는 아직 구체적인 언급이 없다.
키신저가 제시한 중국 역할론은 트럼프 정부 초기부터 지속되고 있다. 지난 4월 초 미국의 마러라고에서 열린 트럼프-시진핑 회담에서 1차적으로 결론이 난 바 있다. 미국은 중국에 '북한 핵문제를 해결하라. 그러면 무역 적자 해소와 환율조작국 지정을 연기하겠다'는 거래였다. 트럼프의 방한을 앞두고 트럼프와 키신저를 다시 읽어볼 필요가 있다. 문제는 우리 정부이다. 한·미 간의 갈등과 마찰로 신뢰가 무너졌다. 6월 정상회담을 개최했지만 현안을 하나도 해결하지 못했다. 북핵 문제 해결과 사드 배치, 한·미 FTA 재협상, 주한 미군 분담금과 무기 구매, 우리 기업에 대한 반덤핑 관세 등 예견되어 왔던 이슈에 대해 논의가 이뤄지지 못했다. 그 이후 한국 무시론(Korea passing)이 부각되었다.
미국 대통령이 한국을 방문하면 평소 가졌던 인식이 바뀐다고 한다.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가 발전한 서울을 보고, 휴전선의 군사 대치 상태를 보고 나면 현실 인식이 달라진다고 한다. 상황의 엄중함을 느껴보면 새로운 해결의 단초가 마련될 수도 있다. 우선 정부는 트럼프 대통령이 한국의 상황을 제대로 파악할 수 있도록 일정을 세심하게 짤 필요가 있다. 또한 양국 정상 간 사적인 친밀감을 향상시킬 프로그램도 필요하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트럼프와 공화당 주류의 현실주의 국제정치관을 제대로 파악하고 대처하는 것이다.
지난 4월 미·중 정상회담 직후 트럼프는 "한국은 사실상 중국의 일부였다"고 발언해서 논란을 일으킨 바 있다. 3월 북한이 미사일 발사 실험을 했을 때 트럼프 정부는 동해(East Sea)가 아닌 일본해(Sea of Japan)로 발사했다고 표현했다. 19세기 말 미국에서 제작된 대부분의 지도는 독도를 일본의 영토, 동해를 일본해로 표기하고 있다.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1905년 가쓰라-태프트 협약이 있다. 러일전쟁 직후 아시아의 평화를 유지한다는 미명하에 일본은 대한제국을, 미국은 필리핀에 대한 지배권을 상호 인정한다는 협정이었다. 곧 이어 을사조약이 체결되어 대한제국은 외교권을 박탈당했다. 1950년 애치슨라인 설정으로 미국의 극동방위선에서 배제되었다. 그 결과 6·25전쟁이 발발했다. 미국의 현실주의 외교 노선의 결론은 우리에게 재앙을 가져올 수 있다. 트럼프의 외교 멘토인 키신저는 1972년 중국과 수교 협상을 하면서 대만을 버린 바 있고, 1973년 북베트남과 평화협정을 체결하면서 베트남의 공산화를 용인한 적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