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석규의 대몽골 시간여행-73] 무엇이 모스크바를 성장시켰나? ②

2017-10-18 10:19

[사진 = 배석규 칼럼니스트]

▶대공의 자리에 오른 이반 깔리따

[사진 = 모스크바 붉은 광장]

모스크바 공국의 공후들은 킵차크한국의 보호막 아래 영토를 계속 넓혀가면서 킵차크한국과 긴밀한 협조 관계를 유지해 갔다. 특히 3대 공후인 이반 다닐로비치는 킵차크한국의 수도 사라이를 자주 방문해 칸과 그의 아내들에게 값비싼 선물을 바치고 칸을 능수능란하게 다룸으로써 자신과 모스크바 공국의 지위를 확고히 굳혀갔다.
 

[사진 = 모스크바 개선문]

그는 주민들로부터 거두어들인 세금을 킵차크한국에 충실히 받치는 한편으로 별도의 돈주머니를 차고 자신과 공국의 재산을 크게 늘려갔다. 그래서 그가 얻은 이름이 이반 깔리따(Калита), 즉 돈주머니라는 별명이다. 이반 깔리따를 신임하게 된 킵차크한국은 각 공국에 상주했던 징세관을 불러들였다. 대신 이반 깔리따에게 공물과 세금을 거두어 바치게 하는 권한을 주었다. 이에 따라 러시아의 모든 공국들은 모스크바에 예속되지 않을 수 없었고 마침내는 이반 깔리따가 공후들 가운데 좌장인 대공의 자리에 오르게 된다. 드디어 모스크바가 러시아의 정치․경제적 중심지로 우뚝 서게 된 것이다. 몽골의 러시아지배 즉 ‘타타르의 멍에’가 모스크바를 역사의 전면으로 부상시킨 것은 물론 모든 러시아의 중심지로 만들어 놓은 것이다.

▶러시아 정교회도 몽골로부터 큰 혜택

[사진 = 러시아정교 사원(로스토프)]

몽골의 지배 아래서 발전을 이룬 또 하나의 집단은 교회였다. 러시아 정교회가 발전한 이유는 전적으로 몽골 특유의 종교에 대한 열린 정책 때문이었다. 비록 킵차크한국은 급속히 투르크化 되면서 이슬람교가 이들을 점차 지배하기 시작했지만 러시아 정교에 대해서도 최대한의 관용을 베풀었다. 관용뿐 아니라 세금을 면제해주는 면세 특권까지 부여하면서 곳곳에서 수도원 건설이 활발하게 진행됐다.
 

[사진 = 러시아 정교 성당 내부]

몽골의 지배 그룹으로부터 혜택을 받은 모스크바와 교회는 손을 잡고 협조하면서 서로의 발전을 더욱 배가 시켰다. 타타르의 멍에 속에서 몽골과 모스크바 그리고 교회는 하나가 돼 번영을 구가한 것이다.

▶反몽골 운동에 앞장 선 모스크바
상대방으로부터 힘을 받아 자신을 성장시킨 뒤 그 힘으로 약해진 상대방을 괴멸시키는 사례는 역사 속에서도 현실에서도 심심찮게 볼 수 있는 일이다. 反몽골의 기치를 내걸고 러시아를 몽골의 압제로부터 해방시키는 데 앞장 선 것도 모스크바도 같은 경우였다.
 

[사진 = 드미트리 돈스키 참배 (킵차크 한국 방문前)]

몽골의 지원을 받으며 성장했던 모스크바는 타타르 지배에 대한 민족적 저항 분위기가 점차 높아지고 때맞춰 킵차크한국도 쇠퇴의 길을 걷기 시작하자 앞장서 저항을 주도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이반 깔리따의 손자로서 모스크바 공국의 대공이었던 드미트리 이바노비치였다.
 

[사진 = 꿀리꼬보 전투(19세기 러시아화가)]

"조국 루시를 몽골의 지배로부터 구하기 위해 뭉쳐 싸우자"는 드미트리의 구호아래 공동전선을 형성한 여러 공국은 1380년 돈강의 꿀리꼬보라는 들판에서 당시 마마이가 지배하던 킵차크한국의 군대를 대패시켰다. 그 결과 그는 돈 강의 이름이 들어간 ‘드미트리 돈스키’라는 별명을 얻게 된다.

▶다시 초토화된 모스크바

[사진 = 불타는 모스크바]

러시아 승전의 의미는 컸지만 그 대가 또한 혹독했다. 이때는 이미 몽골제국이 중국에 세운 원나라는 명나라를 일으킨 주원장에게 쫓겨 몽골초원으로 되돌아 간지 10년이나 지난 때로 사실상 몽골제국의 수명이 다한 때였다. 그러나 비록 분열의 길을 걷고 있기는 했지만 킵차크한국의 힘은 아직 남아 있었다. 마마이에 이어 킵차크한국의 칸의 자리에 오른 톡타미쉬는 다시 러시아의 공후들에게 이전처럼 충성을 바칠 것을 요구했다. 돈강 전투의 승리로 사기가 올라있던 공후들은 당연히 그 요구를 거절했다.
 

[사진 = 불타는 모스크바]

톡타미쉬의 몽골군대는 1381년 대군을 이끌고 모스크바를 공격했다. 몽골군은 2만 명 이상의 주민을 학살하고 도시를 불태웠다. 모스크바 뿐 아니라 수즈달리, 블라디미르 등도 다시 참화를 당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드미트리 돈스코이는 다시 킵차크한국에 무릎을 꿇었다. 그는 엄청난 배상금을 지불하고 복종을 다짐하는 수모를 겪었다. 이후 몽골의 지배는 1세기쯤 계속 된다.

▶분열로 스스로 몰락한 킵차크한국

[사진 = 이반3세 초상화]

그러나 한번 당겨진 저항의 불길은 꺼지지 않고 1세기 뒤인 1480년, 드미트리의 손자인 이반 3세 때 다시 살아난다. 이때는 비잔틴이 오스만제국에 의해 붕괴된 시기로 이반 3세는 비잔틴 마지막 황제의 조카를 왕비로 삼아 로마제국의 계승자를 표방하고 나섰다. 이를 계기로 그는 몽골에 대한 태도를 바꾸었다.
 

[사진 = 공납서한 찢는 이반3세]

특히 당시 킵차크한국은 사실상 해체의 길을 걷고 있었다. 호레즘 지역에서 몽골제국의 후예를 자처하고 나선 티무르에 의해 상당한 영토를 빼앗긴 데다 내부적으로도 여러 개의 지역으로 나눠지면서 종이호랑이나 마찬가지의 신세였다. 킵차크한국의 마지막 칸인 아흐마드는 이반 3세에게 조공을 바칠 것을 요구하면서 직접 사라이로 올 것을 지시했지만 이반 3세는 즉각 이를 거부했다. 다음 수순으로 두 세력 사이의 충돌이 이어졌지만 이반 3세는 별다른 전투도 없이 몽골군을 쉽게 물리쳤다.

러시아가 킵차크한국을 제압했다기보다는 킵차크한국이 스스로 몰락했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이후 아흐마드가 우랄지역의 유목집단에게 살해되면서 몽골의 러시아 지배는 막을 내리게 된다.
이때가 1481년으로 바투의 원정군이 러시아를 정벌하고 이를 접수한지 240년이 되는 때의 일이었다.

▶몽골제국 마지막 계승국가 크리미아한국
킵차크한국이 사라진 그 자리는 킵차크한국에서 분리해 나간 크리미아한국과 카잔한국 그리고 아스트라한국 등 작은 한국들로 메워졌다. 그러나 이미 지배권을 잃어버린 상황이라 위협적인 존재는 아니었다. 이들은 이후에도 러시아와 크고 작은 충돌을 벌이며 명맥을 유지해왔으나 18세기 후반 러시아의 에까쩨리나 2세 때 크리미아한국이 마지막으로 러시아에 복속되면서 지구상에 남아 있던 마지막 몽골제국의 계승국가가 완전히 사라지고 만다.

▶거꾸로 멍에 쓴 채 살아온 타타르인

[사진 = 바실리 성당(18세기)]

현재 러시아에 살고 있는 타타르인들은 6백만 명 전후로 적지 않은 숫자이다. 전체 러시아 인구의 4% 전후에 이르고 있다. 러시아인과 백러시아인, 우크라이나인 등 슬라브인들을 제외하면 가장 많은 인종이라고 볼 수 있다. 그들의 생긴 모습을 보면 지금 몽골에 살고 있는 몽골인들과는 외모에서부터 차이가 있다는 것을 금방 알게 된다.

그런 점에서 그들을 순수한 몽골인 이라기보다는 트루크인들에게 동화된 몽골 투르크인으로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러시아인들에게 멍에를 안겨준 킵차크한국이 사라진 뒤 러시아 땅에서 5백년 이상 살아오는 동안 타타르인들은 거꾸로 멍에를 진 채 살아왔다. 러시아 문학에서 묘사되는 타타르인들을 보면 그들은 항상 천하고 야만스러운 이미지로 그려지고 있다. 그런 만큼 그들이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새 타타르국가 건설의 꿈

[사진 = 크리미아 타타르 지도]

크리미아 지역에 살고 있던 타타르인들은 나중에 스탈린에 의해 중앙아시아지역으로 대거 강제 이주돼 어려운 삶을 살기도 했다. 그들은 중앙아시아지역에서 지내는 동안 역시 원동지역에서 강제 이주돼온 고려인들과 특히 따뜻한 관계를 유지해온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서로가 먼 이국땅이지만 서로 통하는 것이 있었던 모양일까?

소련이 붕괴되면서 크리미아 반도지역에 타타르자치공화국이 부활됐다. 그래서 상당수 타타르인인들은 크리미아로 돌아가 그들의 국가를 세우기 위한 운동을 전개해 왔다. 그러나 그들이 꿈이 이뤄지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현재 크리미아 지역에 살고 있는 타타르들은 26만 명에서 28만 명 사이로 크리미아 살고 있는 주민 가운데 13-14% 정도를 차지하고 있다. 그러나 2014년 우크라이나 사태가 일어나면서 그들의 꿈이 이뤄질 가능성은 더욱 희박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