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仁차이나 프리즘] 홍콩인에게 ‘애국’이란 무엇인가
2017-10-12 11:00
중국 국경절인 10월 1일, 홍콩의 거리에서는 검은 옷을 입은 이들이 항의 행진을 벌였다. 최근 잇달아 구속 수감된 ‘정치범’들을 지지하면서, 일국양제(一國兩制·한 국가 두 체제)가 무너져가는 홍콩에서 국경(國慶)을 축하하지 않겠다는 시위였다.
행정수반이 참석한 국기게양식에서 항의시위를 하던 이들이 끌려 나갈 때 주위 시민 중에는 시위대에게 침을 뱉는 이들이 있었다.
언론에서는 이들을 ‘애국시민’이라고 불렀다. 홍콩에서 최근 반정부 활동에 대해 거친 언행으로 맞서는 이른바 ‘애국인사’들이 늘어나고 있다. 그들은 스스로 ‘애국’을 자처하고 ‘나라와 홍콩을 사랑한다’는 표현을 자주 사용한다. 이 애국시민들에게 애국(愛國)이란, 사랑(愛)이란 무엇인가.
중국 정부는 홍콩인들이 너무 오래 식민지 세뇌를 받아 자신의 조국을 사랑할 줄 모른다고, 뒤늦게라도 나라를 사랑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이야기해왔다. 그 조국은 물론 현재의 중화인민공화국이다. 그런데 중국 정부는 동시에 찬란한 중화문화를 사랑하라고도 요구한다. 중화문화는 누구의 문화인가? 그 속에서 현재의 중국은 어떤 위치에 있는가? 그 답은 분명하지 않다. 여기에서 균열이 생겨난다.
오랜 전통의 중화문화에 대한 사랑을 강조하는 문화민족주의는, 현존 정치체제에 대한 애국으로 이어지지 않고 오히려 위협이 되기 쉽다.
이미 홍콩에는 공산당으로부터 중국을 구해내고 중화문화를 지키자는 주장이 존재한다. 진정한 중화문화의 계승자는 홍콩이고, 공산당은 중국에서 문화의 맥을 끊었다는 것이다. 이 주장은 한때 상당히 영향력을 가지기도 했었다.
중국 정부가 이야기하는 애국 속에만 균열이 있는 건 아니다. 며칠 전 홍콩에서 열린 라오스와의 친선축구경기에 앞서 중국 국가(國歌)가 연주되는 내내 홍콩 관중 일부가 야유를 보냈다.
관중석에는 ‘죽을 때까지 홍콩(Hong Kong till I die)’이라고 적힌 깃발도 휘날렸다. 국가 연주 때 나오는 홍콩 관중의 야유는, 2014년 행정수반 직선을 요구하다 진압된 우산혁명 이후 출현해 몇 번째 되풀이되고 있는 풍경이다.
중국 정부는 국가 모독을 금지하는 국가법(國歌法)을 제정해 올해 10월 1일부터 시행 중이고 조만간 홍콩에도 적용하려 추진하고 있다. 하지만 이번에도 관중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야유를 보냈다.
홍콩 축구대표팀 경기장에는 몇 년 전부터 ‘홍콩을 위해 죽는다(Die for Hong Kong)’라는 문구가 등장했다. 이는 홍콩 축구대표팀의 성적을 향상시키며 영웅이 된 한국인 출신 김판곤 감독이 말해 유명해졌다. 작년에 홍콩시민권을 획득한 그는 감독 취임 후 “나는 홍콩을 위해 죽을 각오로 뛴다”는 각오를 밝혀 홍콩인들에게 큰 감동을 줬다.
흥미로운 점은 김 감독이 영어로 하는 인터뷰에서 끊임없이 쓰는 ‘국가(country)’라는 단어가 홍콩에서 받아들여지는 방식이다. 홍콩에서 ‘국가’는 중국을 지칭해야 맞겠지만, 온라인에서 널리 유포된 동영상들에서 인터뷰의 중문 자막은 ‘국가’를 모두 ‘홍콩’으로 번역(또는 의도적 오역)했다.
그는 인터뷰 때마다 “우리는 한국에서 어릴 때부터 무엇을 하더라도 ‘국가’를 위해서 해야 하고 ‘국가’를 위해 죽도록 싸워야 한다고 배웠다”면서 “나는 홍콩인에게 이 정신을 가르쳐주고 싶다”고 강조했다.
그런데 그가 강조하는 애국은 중국이 아닌 홍콩을 위한 사랑으로 번역된다. 사람들은 그가 우리 땅 홍콩을 사랑해야 한다고 가르쳐줘서 고맙다며, 심지어 그의 몸속에 홍콩인의 피가 흐른다고 기뻐한다.
반중(反中) 홍콩독립파는 김 감독의 발언을 인용하며 “위대한 김 감독도 홍콩의 독립을 지지한다”고 까지 한다.
최근 격해지는 중국과의 대립 상황에서 “홍콩을 위해 죽는다”는 구호에는 강렬한 아우라가 더해졌다.
이렇듯 사방에서 모두가 큰 소리로 사랑을 이야기하는데, 그 사랑이 향해야 할 대상은 자꾸 미끄러진다. 애국이란 무엇인가. 누구를 사랑하는 것이 애국인가.
그리고 여기, 또다른 사랑이 있다. 10여년 전 등장한 그것은 지시대상이 훨씬 분명한 새로운 종류의 사랑이었다.
철거와 재개발이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던 도시 홍콩에서 2006년 부두 2개가 연이어 철거될 때 청년들이 철거를 막고 무기한 단식농성을 하며 외쳤다.
“우리는 이 땅을 사랑하기 시작하겠다. 영국식민정부도 반환 후의 홍콩 정부도 원하는 것은 단 하나다. 우리가 이 땅에 애착을 갖지 않고, 무언가 빼앗겨도 아픔을 느끼지 않는 것이었다. 우리는 이를 거부하며, 이제 이 땅에 애착을 가질 것이고 아픔을 느끼며 사랑할 것이다. 이는 홍콩이 더 이상 그 어느 정권의 땅도 아닌 인민의 땅이라는 선언이다.”
이 싸움은 지금까지 이어지는 새로운 항쟁 역사의 서막이었다.
청년들이 어떤 이해관계와도 상관없이 자기 몸을 던져 기억의 파괴를 막으며 외친 선언은 비장하고 아름다웠으나, 이들이 외쳤던 홍콩에 대한 사랑은 최근 강경파의 주장 속에서 위험한 사랑으로 변질되고 있다.
강경파는 중국대륙인에게 모욕적 언행과 폭력적 공격까지 서슴지 않는 격렬한 반중 행동을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정당화한다.
“내가 홍콩을 사랑하기에 어떤 희생도 감수하고 항쟁을 하려는 것이다. 중국 대륙인을 포용하라고 하지 마라. 홍콩을 사랑하는 홍콩인만이 이 운동에 참여할 수 있다.”
2017년 홍콩, 이곳에서 사랑할 자격을 갖춘 이는 누구인가. 사랑은 어떻게 증명할 수 있는가. 사랑은 어디까지 정당한가. 애국은 어떤 의미에서 사랑인 걸까.
행정수반이 참석한 국기게양식에서 항의시위를 하던 이들이 끌려 나갈 때 주위 시민 중에는 시위대에게 침을 뱉는 이들이 있었다.
언론에서는 이들을 ‘애국시민’이라고 불렀다. 홍콩에서 최근 반정부 활동에 대해 거친 언행으로 맞서는 이른바 ‘애국인사’들이 늘어나고 있다. 그들은 스스로 ‘애국’을 자처하고 ‘나라와 홍콩을 사랑한다’는 표현을 자주 사용한다. 이 애국시민들에게 애국(愛國)이란, 사랑(愛)이란 무엇인가.
중국 정부는 홍콩인들이 너무 오래 식민지 세뇌를 받아 자신의 조국을 사랑할 줄 모른다고, 뒤늦게라도 나라를 사랑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이야기해왔다. 그 조국은 물론 현재의 중화인민공화국이다. 그런데 중국 정부는 동시에 찬란한 중화문화를 사랑하라고도 요구한다. 중화문화는 누구의 문화인가? 그 속에서 현재의 중국은 어떤 위치에 있는가? 그 답은 분명하지 않다. 여기에서 균열이 생겨난다.
오랜 전통의 중화문화에 대한 사랑을 강조하는 문화민족주의는, 현존 정치체제에 대한 애국으로 이어지지 않고 오히려 위협이 되기 쉽다.
이미 홍콩에는 공산당으로부터 중국을 구해내고 중화문화를 지키자는 주장이 존재한다. 진정한 중화문화의 계승자는 홍콩이고, 공산당은 중국에서 문화의 맥을 끊었다는 것이다. 이 주장은 한때 상당히 영향력을 가지기도 했었다.
중국 정부가 이야기하는 애국 속에만 균열이 있는 건 아니다. 며칠 전 홍콩에서 열린 라오스와의 친선축구경기에 앞서 중국 국가(國歌)가 연주되는 내내 홍콩 관중 일부가 야유를 보냈다.
관중석에는 ‘죽을 때까지 홍콩(Hong Kong till I die)’이라고 적힌 깃발도 휘날렸다. 국가 연주 때 나오는 홍콩 관중의 야유는, 2014년 행정수반 직선을 요구하다 진압된 우산혁명 이후 출현해 몇 번째 되풀이되고 있는 풍경이다.
중국 정부는 국가 모독을 금지하는 국가법(國歌法)을 제정해 올해 10월 1일부터 시행 중이고 조만간 홍콩에도 적용하려 추진하고 있다. 하지만 이번에도 관중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야유를 보냈다.
홍콩 축구대표팀 경기장에는 몇 년 전부터 ‘홍콩을 위해 죽는다(Die for Hong Kong)’라는 문구가 등장했다. 이는 홍콩 축구대표팀의 성적을 향상시키며 영웅이 된 한국인 출신 김판곤 감독이 말해 유명해졌다. 작년에 홍콩시민권을 획득한 그는 감독 취임 후 “나는 홍콩을 위해 죽을 각오로 뛴다”는 각오를 밝혀 홍콩인들에게 큰 감동을 줬다.
흥미로운 점은 김 감독이 영어로 하는 인터뷰에서 끊임없이 쓰는 ‘국가(country)’라는 단어가 홍콩에서 받아들여지는 방식이다. 홍콩에서 ‘국가’는 중국을 지칭해야 맞겠지만, 온라인에서 널리 유포된 동영상들에서 인터뷰의 중문 자막은 ‘국가’를 모두 ‘홍콩’으로 번역(또는 의도적 오역)했다.
그는 인터뷰 때마다 “우리는 한국에서 어릴 때부터 무엇을 하더라도 ‘국가’를 위해서 해야 하고 ‘국가’를 위해 죽도록 싸워야 한다고 배웠다”면서 “나는 홍콩인에게 이 정신을 가르쳐주고 싶다”고 강조했다.
그런데 그가 강조하는 애국은 중국이 아닌 홍콩을 위한 사랑으로 번역된다. 사람들은 그가 우리 땅 홍콩을 사랑해야 한다고 가르쳐줘서 고맙다며, 심지어 그의 몸속에 홍콩인의 피가 흐른다고 기뻐한다.
반중(反中) 홍콩독립파는 김 감독의 발언을 인용하며 “위대한 김 감독도 홍콩의 독립을 지지한다”고 까지 한다.
최근 격해지는 중국과의 대립 상황에서 “홍콩을 위해 죽는다”는 구호에는 강렬한 아우라가 더해졌다.
이렇듯 사방에서 모두가 큰 소리로 사랑을 이야기하는데, 그 사랑이 향해야 할 대상은 자꾸 미끄러진다. 애국이란 무엇인가. 누구를 사랑하는 것이 애국인가.
그리고 여기, 또다른 사랑이 있다. 10여년 전 등장한 그것은 지시대상이 훨씬 분명한 새로운 종류의 사랑이었다.
철거와 재개발이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던 도시 홍콩에서 2006년 부두 2개가 연이어 철거될 때 청년들이 철거를 막고 무기한 단식농성을 하며 외쳤다.
“우리는 이 땅을 사랑하기 시작하겠다. 영국식민정부도 반환 후의 홍콩 정부도 원하는 것은 단 하나다. 우리가 이 땅에 애착을 갖지 않고, 무언가 빼앗겨도 아픔을 느끼지 않는 것이었다. 우리는 이를 거부하며, 이제 이 땅에 애착을 가질 것이고 아픔을 느끼며 사랑할 것이다. 이는 홍콩이 더 이상 그 어느 정권의 땅도 아닌 인민의 땅이라는 선언이다.”
이 싸움은 지금까지 이어지는 새로운 항쟁 역사의 서막이었다.
청년들이 어떤 이해관계와도 상관없이 자기 몸을 던져 기억의 파괴를 막으며 외친 선언은 비장하고 아름다웠으나, 이들이 외쳤던 홍콩에 대한 사랑은 최근 강경파의 주장 속에서 위험한 사랑으로 변질되고 있다.
강경파는 중국대륙인에게 모욕적 언행과 폭력적 공격까지 서슴지 않는 격렬한 반중 행동을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정당화한다.
“내가 홍콩을 사랑하기에 어떤 희생도 감수하고 항쟁을 하려는 것이다. 중국 대륙인을 포용하라고 하지 마라. 홍콩을 사랑하는 홍콩인만이 이 운동에 참여할 수 있다.”
2017년 홍콩, 이곳에서 사랑할 자격을 갖춘 이는 누구인가. 사랑은 어떻게 증명할 수 있는가. 사랑은 어디까지 정당한가. 애국은 어떤 의미에서 사랑인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