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남한산성' 이병헌, 시대의 아픔 '눈'으로 말하다

2017-09-28 17:55

영화 '남한산성'에서 이조판서 최명길 역을 맡은 배우 이병헌[사진=CJ엔터테인먼트 제공]

많은 것이 필요치 않았다. 나아갈 곳도, 물러설 곳도 없는 고립무원의 남한산성 그리고 죽어가는 백성과 인조를 바라보는 최명길의 복잡한 심리는 배우 이병헌(47)의 눈을 통해 여실히 드러났다. 어떤 말보다 세밀하고 정교한 그 눈빛은 이조판서 최명길의 감정을 더 깊이 있게 완성해냈다.

내달 3일 개봉하는 영화 ‘남한산성’(감독 황동혁)은 1636년 인조 14년 병자호란, 나아갈 곳도 물러설 곳도 없는 고립무원의 남한산성 속 조선의 운명이 걸린 가장 치열한 47일간의 이야기를 그린 작품. 출간 이래 70만 부의 판매고를 올린 김훈 작가의 동명 베스트셀러를 원작으로 한다.

이번 작품에서 이병헌은 치욕을 감수하여 후일을 도모하고자 하는 이조판서 최명길 역을 맡았다. 제 목숨을 내걸고 백성을 지키고자 하는 그는 유한 말투 안에 담긴 단단한 신념으로 예조판서 김상헌(김윤석 분)과 첨예하게 대립하는 인물이다.

아주경제는 영화 개봉 전 ‘남한산성’의 주인공 이병헌과 만나 인터뷰를 가졌다. 유연한 모습 속에 깃든 단단한 신념은 배우 이병헌에게서도 느낄 수 있었다.

영화 '남한산성'에서 이조판서 최명길 역을 맡은 배우 이병헌[사진=CJ엔터테인먼트 제공]


“제가 생각했던 것보다 영화 평이 좋아서 다행이에요. 요즘 영화들이 워낙 자극적이고, 오락성이 강조된 작품들이 많다 보니 관객들도 그런 작품에 익숙해져 있잖아요. 분명 호불호(好不好)가 있을 거로 여겼죠. 그런데 시사회가 끝난 뒤 호평이 쏟아지니까 살짝 놀랐어요. 다른 이야기지만 ‘레버넌트’나 ‘덩케르크’도 마니아가 있는 걸 보면 관객들 수준도 높고 다양성에 목말라 있는 것 같아요.”

이병헌이 우려한 것처럼 영화 ‘남한산성’은 자극적인 요소를 빼고 담백하고 담담하게 이야기를 서술한다. 원작 소설이 가진 미덕을 그대로 작품에 적용하면서 살벌한 진풍경을 영상에 담아내고자 했다. 이병헌이 작품을 선택하게 된 것 역시 바로 이러한 미덕에 있었다.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상황이잖아요? 병자호란이나 남한산성 등, 교과서적인 정보는 있었지만, 그 시대에 대한 감정은 없었거든요. 그런데 정보와 사실을 감정으로 이야기하는 상황이 오니까…. 어떤 액션보다 강렬하고, 어떤 멜로보다 뜨겁더라고요. 이야기와 말로 사람을 울릴 수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죠.”

그야말로 첨예한 대립. 극 중 이병헌은 치욕을 감수하더라도 백성을 위해 후일을 도모하자는 이조판서 최명길을 연기했지만, 청과 맞서 싸워 대의를 지키고자 하는 예조판서 김상헌의 심정 또한 십분 이해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딱 반반의 심정이었죠. 누가 옳다, 누구 말이 맞다고 생각지 않았고 또 선택할 수 없었어요. 그게 이 영화의 위험 요소이자 또 가장 매력적 부분이죠. 영화를 다 보고 나면 ‘어떤 사상이 옳구나, 어떤 쪽으로 마음을 기울여야지’하는 것이 중요하지 않아져요. 그게 중요한 영화도 아니고요.”

영화 '남한산성'에서 이조판서 최명길 역을 맡은 배우 이병헌[사진=CJ엔터테인먼트 제공]


그가 “반반의 심정”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탄탄한 시나리오 덕도 있었지만 정직하고 치열하게 의견을 펼치는 김윤석의 덕도 컸다.

“김윤석 씨는 연기할 때 자신을 그 상황에 던져놓고 하세요. 그러다 보니 매 테이크마다 패턴이 다르죠. 처음엔 그 패턴에 따라 호흡을 맞춰야 하니까 굉장히 당혹스러웠거든요. 저 역시도 순발력 있게 캐치하고 받아쳐야 호흡으로 연결이 되니까요. 촬영할 땐 당황스러웠지만 모니터를 확인하면서 그게 어떤 재미를 주더라고요. 더 긴장감도 사는 것 같고 좋은 신이 만들어졌던 것 같아요.”

숨 막히는 긴장감을 유발하는 김상헌과 최명길. 관객의 입장에서는 이들의 대립과 치열함이 흥미롭게 느껴졌지만, 배우의 입장에서 또 어땠을지 궁금했다. 압도적인 아우라를 가진 배우가 상대역으로 낙점돼 부담을 느끼진 않았을까?

“김윤석 씨를 비롯해 배우들 캐스팅 소식을 듣고 ‘어떤 것도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시나리오 완벽하지, 캐스팅도 잘해놨지 정말 좋은 영화가 완성될 거란 기대가 있었거든요. 스포츠 경기에서 상대가 너무 세다면 기가 죽겠지만 이건 영화잖아요? 좋은 배우가 붙을수록 든든하고 또 굉장히 신이 나죠.”

살벌했던 영화와는 달리 현장 분위기는 화기애애했다. “남자들이 그렇게 말이 많은지 처음 알았다”는 이병헌, 훈훈했던 현장을 묘사하며 “깔깔 거리고 웃기 바빴다”고 설명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배우들은 배우들이었다.

“웃음이 끊이지 않는 분위기였지만 극 중 상헌과 크게 대립하는 장면에서는 모두가 한마음 한뜻으로 배려해주었어요. 다들 예민해져 있는 상황이었거든요. 처음부터 끝까지 원테이크로 찍고자 했고 중간에 끊기면 처음부터 다시 찍었어요. 호흡을 유지하기 위함이었죠. 그래서 컷 하면 여기저기서 한숨이 터져 나와요. 하하하. 상헌과 툭툭 주고 받는 긴장을 살리려고 많은 분이 배려해주셨죠.”

영화 '남한산성'에서 이조판서 최명길 역을 맡은 배우 이병헌[사진=CJ엔터테인먼트 제공]


단단하고 올곧은 신념을 가진 최명길. 이병헌은 그에게 몰입하기까지 많은 어려움을 느꼈다고 털어놨다. 스스로 “최명길보다는 인조에 가까운 성격”이라고 눙치며, “많은 성격이 있지만, 그중 몇 번 꺼내보지 못한 성격들을 꺼내 젖어 드는 데까지 시간이 걸리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배우들은 수만 가지의 성격을 마음에 안고 살아요. 악마의 본성, 천사의 마음, 아이의 마음 할 것 없이 모두 다요. 그중 저를 규정짓는 건 제가 가진 성격 중 툭툭 튀어나온 가장 잘 보이는 성격일 거예요. 하지만 보이지 않더라도 다른 성격 또한 분명 제 것이잖아요? 연기할 때 그 감정을 극대화하는 거죠. 최명길은 소신이 뚜렷하고 말투는 유하지만, 생각은 단단하고 타협하지 않는 사람이에요. 저는 사실 우유부단한 인조 같거든요. 결정 장애가 있을 만큼 결정도 잘 못 해요. 레스토랑에 가서 항상 고생하죠. 그런 제가 소신 있는 최명길을 연기하기까지 얼마나 큰 갈등이 있었겠어요. 하하하.”

그렇다면 그의 성격과 가까운 인조를 그렸다면 조금 더 수월했을까? 농담처럼 물은 말에 이병헌은 “그건 또 쉽지 않았을 것”이라며 손사래를 친다.

“두 시간 내내 두 사람 사이에서 고민하고 갈등하는 인조가 어떻게 쉽겠어요. 하하하. 내내 고민과 고뇌와 무능력함을 오가고 보여줘야 하는데…. 연기할 때 참 힘들 거라는 생각이 들어요. 제가 인조를 연기했으면 조금 코믹하게 보였을 것 같기도 하고요. 그런 의미에서 박해일 씨가 정말 담백하게 감정 연기를 잘 해냈다고 생각해요.”

추위와 사투를 벌였던 ‘남한산성’인 만큼, 겨울 촬영에 대해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추위에 대한 어려움은 없었냐고 질문하자 그는 “추위보다 연기에 대한 불안이 있었다”고 답했다.

“너무 추울 땐 온열 방석 같은 걸 써서 몸을 녹였어요. 다만 제가 걱정했던 건 감독님이 추위를 고스란히 영상에 담고 싶어 하셔서 마음에 안 드는 신도 입김이 많이 나면 OK를 하려고 했다는 거예요. 하하하. ‘감독님 저는 첫 번째 테이크가 마음에 드는 데요?’라고 해도, 감독님은 ‘하지만 두 번째 테이크가 입김이 잘 살았어요’라면서 갈등하시더라고요. 심지어는 촬영 초 입김이 덜 나와서 2개월 후에 새로 찍기도 했다니까요. 감독님…. 입김에 연연하시는 거 아닌가? 하하하.”

상반기를 바쁘게 달려온 이병헌은 남은 하반기 역시 ‘열 일’할 계획이다.

“영화 ‘남한산성’ 홍보를 열심히 한 뒤, 연말에는 드라마를 시작하게 될 것 같아요. 김은숙 작가의 ‘미스터 선샤인’에 출연하게 됐어요. 작품의 완성도를 위해 올해부터 준비를 시작하기로 했어요. 대사를 맛깔나게 쓰는 분이라고 정평이 나 있는 만큼 작가님의 대본에 기대가 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