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석규의 대몽골 시간여행-61] 왜 오고타이를 선택했나? ②

2017-10-05 11:07

[사진 = 배석규 칼럼니스트]

▶ 호레즘 전쟁前 오고타이 지명

[사진 = 초원의 형제들]

칭기스칸은 툴루이를 가계를 이어갈 인물로 인정했지만 제국을 다스릴 인물로는 오고타이가 적합하다고 보고 이미 호레즘 정벌에 나서기 전에 오고타이를 후계자로 지명했다. 나머지 삼 형제도 칭기스칸의 뜻에 따르겠다고 약속했다. 몽골비사는 칭기스칸이 호레즘 원정을 떠나기에 앞서 애첩인 이수이의 권고에 따라 후계자를 오고타이로 결정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자리에서 주치와 다퉜던 차가타이는 "오고타이야말로 온후합니다. 오고타이를 후계자로 지명합시다. 오고타이는 칸 아버지의 곁에 있으면서 모습이 큰 모자의 처신을 익히게 하시면 될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이에 주치도 "차가타이가 말한 대로 오고타이를 지명합시다. 차가타이와 함께 우리 둘은 더불어 힘을 드리겠습니다."라며 오고타이의 후계자 지명에 동의했다.

막내 툴루이는 "칸 아버지가 지명하신 형의 곁에 있으면서 잊은 것을 일깨우고 잠든 것을 깨워 그러자 할 때 아니 늦고 대오에서 떨어지지 아니하며 긴 정복전(征服戰)에 원정을 나가고 짧은 전투에 싸워 주겠습니다."라며 오고타이를 대칸으로 받들겠다고 약속했다. 이 자리에서 오고타이는 "할 수 있는 데까지 이겨 내겠다"며 후계자 지명을 받아들였다.

▶ 사망前 후계자 재확인
이처럼 오고타이를 자타가 후계자로 인정한 가운데 칭기스칸은 죽기 전에 한 번 더 이점을 못 박았다. "만약 나의 아들 모두가 칸이 되고 군주가 되려할 뿐 아무도 상대방에게 복종하지 않으려 한다면 그 것은 마치 여러 개의 머리를 가진 뱀의 이야기와 같이 될 것이다."라며 후계자가 오고타이라는 것을 재확인했다. 그리고 영토를 네 아들과 동생들에게 나눠주고 떠났다.

▶ 아들․동생에게 영토 분할

[사진 = 카자흐, 우즈벡 국경지대]

큰아들 주치의 영토는 가장 먼 땅인 이르티쉬강 서쪽에서 말발굽이 닿는 곳까지 이어져 볼가강 입구까지 이르렀다. 차가타이는 위구르지역에서부터 일리와 이시쿨, 탈라스 등 옛 카라키타이 지역과 호레즘 제국의 땅이었던 트란스옥시아나(Transoxania) 지역 대부분을 할당받았다. 그리고 주거지는 일리계곡 남쪽 지역에다 정했다. 다만 부하라와 사마르칸드는 대칸의 직할 통치지역으로 남겨 두었다.
 

[사진 = 내봉골 돌룬노르]

오고타이는 발하쉬 동쪽의 옛 나이만 영토 인근지역을 물려받아 에밀강 지역을 거주지로 정했다. 툴루이는 가산의 상속자로서 몽골초원의 본토를 장악했다. 칭기스칸은 세 동생에게도 동쪽 흥안령 방면의 영토를 나눠주었다. 옷치긴은 내몽골 지역 일대와 길림성에 있던 옛 여진족영토 근처지역을 배당 받았으며 카사르는 하일라르강 주변지역을, 카치운은 그 서쪽지역을 차지했다.

▶ 대칸 즉위에 2년 걸려
칭기스칸이 사망한 뒤 2년의 애도 기간 동안에는 화로의 수호자인 막내 툴루이가 섭정으로서 대칸이 선출될 때까지 제국의 경영을 담담했다. 비록 칭기스칸이 오고타이를 후계자로 지명하기는 했지만 그 것이 절대적인 것은 아니었다. 후계자 선출은 어디까지나 쿠릴타이의 몫이었고 전임자의 입김은 사망과 함께 영향력이 크게 줄어들기 때문이었다. 그런데도 결과적으로 칭기스칸의 뜻대로 오고타이가 대칸의 자리에 올랐다.
 

[사진 = 케룰렌 강변 쿠릴타이(공훈화가 만디르작)]
 

[사진 = 만디르(몽골 공훈화가)]

 
그 자리를 차지하는 데 걸린 시간은 2년이 넘었다.
그 기간 동안 대칸의 자리를 둘러싸고 아무 일이 일어나지 않았을까? 아마 그렇지는 않았을 것이다.
 

[사진 = 케룰렌강(헨티 아이막)]

유리한 입지를 차지한 툴루이家의 가신들이 그냥 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2년의 애도기간이 끝난 1229년 봄, 케룰렌 강변에서 대칸을 선출하기 위한 에케(大)쿠릴타이가 열렸다.

▶ 중요한 전환기마다 열린 쿠릴타이

[사진 = 모의 쿠릴타이]

칭기스칸 생전에 중요한 전환기마다 쿠릴타이가 열렸다. 1189년 푸른 호수에서 열린 쿠릴타이를 통해 테무진은 처음으로 칸의 자리에 올랐다. 1206년 쿠릴타이를 통해 대몽골 제국이 탄생했다. 금나라와의 전쟁을 앞두고도 쿠릴타이가 열렸고 호레즘과의 전쟁에 나설 때도 쿠릴타이가 열렸다 쿠릴타이는 지도자를 뽑거나 전쟁 등 국가의 중대사를 결정할 때 열리는 회의체다.
말하자면 오늘날의 국회라고 보면 될 것이다.

▶ 정권에 정당성 부여하는 행사
쿠릴타이는 중대한 사안을 결정할 때는 지도자가 어떤 안건을 내놓고 회의 참여자들은 이를 추인하는 절차를 밟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렇지만 몽골종족의 대표들이 모두 참석해 총의(總意)를 한 곳으로 모으고 중대사를 결정한다는 점에서 쿠릴타이는 대단히 의미 있는 행사였다.

특히 대칸을 뽑는 거사와 관련해 열리는 쿠릴타이는 한 정권이 다른 정권으로 넘어가는 엄청난 의미를 지니는 행사였다. 그래서 이경우의 쿠릴타이를 에케 쿠릴타이, 즉 大쿠릴타이로 부르고 있다.

▶ 전원 만장일치 합의제
훌륭한 지도자를 뽑는 일, 이 일은 유목민들에게 자신들의 생존을 결정하는 것과도 같은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통치 능력과 전쟁 수행 능력이 뛰어난 지도자를 뽑았을 때 그들의 미래는 장밋빛으로 보장받을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무능한 지도자를 뽑았을 때 그 조직에 소속된 사람들의 운명은 급전직하 추락해서 나락에 빠질 우려가 많다.

그러한 점은 동서고금 어떤 경우라도 마찬가지겠지만 지도자에게 모든 것을 거는 과거 유목집단의 경우 그 중요성은 더욱 강조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대칸을 뽑는 쿠릴타이는 만장일치 방식으로 결정된다. 만일 의견 통일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시간이 얼마가 걸리든 간에 합의가 도출될 때까지 회의는 계속된다.

과거 교황선출을 위한 콘클라베(Cum Clavis:Conclave)식 회의 방식과 비슷하다. 만장일치 합의가 이루어진 뒤 투표용지를 태우는 흰 연기가 굴뚝에서 나와야 교황이 선출된 것을 알지만 지난 1992년 교회법 개정으로 지금은 참석 추기경 2/3의 찬성으로 바뀌었다.
 

[사진 = 트루판(위구르인 거주도시)]

쿠릴타이에서 합일점을 찾지 못할 경우 소수의 반대자는 스스로 그 부족을 떠나야 했다. 경우에 따라서는 두 집단으로 갈라져 전쟁을 벌여야 하는 상황이 일어나기도 했다. 그러나 일단 합의가 이루어져서 대칸을 뽑게 되면 그 것을 신의 뜻으로 알고 전적으로 그 결정에 따랐다. 칭기스칸이 선택한 대부분의 제도가 독창적이 아니듯이 쿠릴타이 역시 칭기스칸 때 만들어진 제도가 아니다. 과거부터 북방 유목민들에게 이어져 내려온 합의 제도를 발전시킨 것이다.

흉노와 선비, 돌궐 등 유목국가에게서도 이러한 회의체제가 있었다. 그러나 역시 쿠릴타이가 제대로 모습을 갖추고 본연의 역할을 한 것은 몽골제국에 들어와서다.

▶ "툴루이의 양보에 의해서.."
1229년 대칸 선출을 위한 쿠릴타이가 열렸을 때 툴루이가 차지하고 있던 몽골 본토의 많은 대표들은 오고타이의 즉위를 반대하고 툴루이를 대칸으로 지목했다. 선발과정이 순조롭지 않았다는 것을 말해준다. 툴루이는 2년 동안 섭정으로서 사실상 제국의 권력을 손에 쥐고 있는 데다 군사력까지 막강해서 마음만 먹는다면 대칸 자리를 차지하는 것이 불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사서는 이 때 오고타이가 대칸 자리에 오른 것은 ‘툴루이의 아름다운 양보에 의해서’ 라고 적고 있다. 당시 쿠릴타이는 주치가 이미 죽고 없었으므로 황족 가운데 최고의 연장자인 차가타이가 주재했다. 야망이 높은 툴루이의 즉위를 경계해온 차가타이가 오고타이를 대칸의 앉히고 배후 인물로서 자신의 안위를 보장받기 위해 회의 주재자로서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한 것이 아니었을까?

여기에 중신인 야율초재가 쿠릴타이에서 선제인 칭기스칸이 오고타이에게 대칸의 자리를 물려준다는 유지가 있었다고 상기시키자 대세는 오고타이쪽으로 기울었다. 만장일치의 전통에 따라 툴루이를 지지했던 많은 사람들도 마지못해 오고타이에게 손을 들어줬을 것이고 사서는 이것을 ‘아름다운 양보’ 라고 기록했을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 오고타이 시대의 개막

[사진 = 몽골국기 소욤보]

아무튼 결과적으로는 오고타이가 몽골제국의 제 2대 대칸으로 즉위했다. 오고타이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영토가 분할되면서 대몽골제국은 일종의 연방형태를 취했지만 전체 권한은 대칸인 오고타이에게 집중돼 있었다.

그래서 세계로의 원정 등 제국 전체의 이익이 걸린 일에는 모든 울루스(나라)가 참여해 공동보조를 취했다. 말하자면 느슨한 연방형태로 제국이 운영되고 있었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