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석규의 대몽골 시간여행-43] 칭기스칸 무덤은 어디 있나? ②
2017-09-11 10:37
칭기스칸의 사망과 관련해 몽골비사는 딱 한 줄만 기록하고 있다.
"탕구드(서하) 사람들에게 칭기스칸이 두 번째로 원정하여 무찌르고 돌아와 돼지해(1227년) 하늘로 올랐다"
그러나 15세기 말에서 16세기 초에 이르는 몽골의 다얀칸 시절에 투멘(Tumen)이라는 것이 있었다. 우리말로 하면 만호(萬戶) 또는 만인대(萬人隊)라고 부르면 될 것 같다. 천호제의 연장선상에서 만 명의 병력을 공출한 집단이다. 이 투멘이 여섯 지역에 배치 됐다. 그 가운데 우랑칸 투멘이 바로 칭기스칸의 묘와 이후의 칸들의 묘를 지켜온 우랑칸 천호의 후손들이었다.
한 비사는 기병 만 명이 매장지를 말발굽으로 밟아 평평하게 만들어서 주위와 구분할 수 없도록 만들었다고 전하기도 한다. 그의 묘지위에 나무를 심어 숲을 만들고 강줄기마저 다른 곳으로 가도록 우회시켰다는 또 다른 얘기도 있다. 또 장례식을 지켜본 2천여 명의 인부들과 8백 여 명의 병사들을 모두 살해했다는 주장도 있다.
▶ 가장 먼저 무덤 찾기에 나선 일본
무엇보다 소련의 위성국가로 있던 70년 동안 소련은 칭기스칸을 폄하하고 거론하는 것조차 금기로 삼았기 때문에 외국인들의 탐사를 허용할 리 없었다. 1990년 몽골이 소련의 영향권에서 벗어나면서 가장 먼저 칭기스칸의 무덤을 찾겠다고 나선 나라가 바로 일본이다.
태평양전쟁 때부터 몽골에 눈독을 들이고 한 차례 전쟁까지 치렀던 일본은 시장경제체제로 전환한 몽골의 사정을 재빨리 파악해 경제적인 공략에 나서려고 서둘렀다. 따라서 칭기스칸의 무덤을 찾는다는 핑계로 몽골전역을 위성 촬영해 지하자원의 매장을 비롯해 몽골의 사정을 파악할 수 있는 기회로 삼았다.
▶ 20년 무덤 찿기에 공들인 크라비츠
그 이후 미국인과 독일인, 영국인, 러시아인들이 수백만 달러를 들여 탐사활동에 나섰지만 모두 실패했다. 특히 미국 시카코 출신의 변호사로 알려진 모리 크라비츠라는 인물은 칭기스칸에 매혹돼 지난 1992년부터 20년 이상 칭기스칸의 무덤을 찾는데 공을 들여왔다.
또 차량 운전사가 알 수 없는 사고로 숨지는가 하면 발굴단 내부에 의문의 전염병이 돌아 인명 피해가 나는 등 사고가 잇따르자 작업을 멈추고 말았다. 몽골의 언론들은 칭기스칸 무덤의 저주가 내렸다고 보도했다. 그래서 당시 바가반디 몽골 대통령이 무덤 탐사작업을 금지시키기까지 했다.
▶ "무덤을 찾으면 재앙이 온다."
대부분의 몽골인들은 칭기스칸의 무덤을 건드리지 말고 그대로 둬야한다고 믿고 있다. 그 무덤이 열리면 세상이 끝난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몽골인들은 칭기스칸의 무덤을 못 찾는 것이 아니라 안 찾는 것이라고 얘기한다.
최첨단 기법을 동원해 신빙성이 높은 장소를 발견했다고 기대를 걸었지만 이 역시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그래서 제임스 본드 시리즈의 첨단기술과 인디애나 존스 시리즈의 모험이 동원된 것과 같은 탐사활동은 계속 이어지겠지만 그 결과는 누구도 예측하기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