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연구의 과학과 문화] 문명, 문화와 속도
2017-09-05 20:00
최연구의 과학과 문화
문명, 문화와 속도
문명과 문화는 같은 것인가 다른 것인가. 답하기 쉽지 않다. 영어나 프랑스어에서는 문명(civilisation)과 문화(culture)의 의미가 비슷하다. 둘 다 인간이 자연상태에서 벗어나 물질적으로 그리고 정신적으로 진보한 상태를 뜻한다. 프랑스 문명과 프랑스 문화, 서구 문명과 서구 문화는 의미상 별 차이가 없다. 하지만 독일어는 좀 다르다. 문명(Zivilisation)은 기계·건축물 등 물질적인 진보를, 문화(Kultur)는 형이상학적인 가치관·사상·종교·학문 등 정신적인 부분을 가리키므로 다른 개념이다. 우리말은 영어나 프랑스어의 의미와 독일어의 의미를 동시에 수용하고 있다. 넓은 의미에서의 문화는 문명을 포함하는 총체이고, 좁은 의미에서의 문화는 독일어의 뉘앙스를 갖는다. 그래서 기술문명이라는 말은 있어도 기술문화라 말하지 않고, 정신문화라는 말은 있지만 정신문명이라는 말은 쓰지 않는다. 국어사전에 찾아 보면, 문명에 대해 "인류가 이룩한 물질적·기술적·사회구조적인 발전, 자연 그대로의 원시적 생활에 상대하여 발전되고 세련된 삶의 양태를 뜻한다. 흔히 문화를 정신적·지적인 발전으로, 문명을 물질적·기술적인 발전으로 구별하기도 하나 그리 엄밀히 구별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라고 설명돼 있다.
문명과 문화를 구분한다면 과학기술과는 어떤 관계일까. 새로운 원리를 발견하고 이를 바탕으로 새로운 것을 만드는 과학기술은 인류문명사를 이끌어온 원동력일 것이다. 과학기술이 없었다면 인간은 여전히 동물세계에서 야생의 맹수들과 생존경쟁을 하면서 살아야 했을 것이다. 수레바퀴, 종이, 화약, 나침반, 증기기관, 자동차, 비행기, PC, 인터넷, 휴대폰 등 인류역사를 바꿔놓은 모든 발명품들은 과학기술의 산물이다. 이러한 유형의 산물들은 기술문명이라고 할 수 있고 과학적 세계관, 합리적 정신, 과학에 대한 관심과 이해 등은 문화의 범주로 봐야 할 것이다. 요컨대 과학기술은 문명과 문화의 기본 바탕을 이루는 요소라 할 수 있다.
영국의 역사학자 아널드 토인비는 인간의 역사는 ‘도전과 응전의 역사’라고 말했다. 가혹한 자연환경이나 끊임없는 혼란과 위협, 침입 등에 대한 응전에 성공하면 계속 존속·발전할 수 있고 실패하면 소멸한다는 것이다. 인간은 도전을 맞아 응전하는 존재다. 과학기술과 문명은 도전과 응전의 과정을 거치면서 역사적으로 발전해 온 것이다. 문명의 이기는 인간에게 편리함이나 안전 등의 편익을 주며 어느 정도 행복감도 가져다 주지만 때로는 부작용을 동반하기도 한다. 석기시대보다는 철기시대가 편리하고 철기시대보다는 오늘날이 훨씬 편리하다. 하지만 과학연구와 기술개발로 새로운 문명의 이기가 추가될 때마다 새로운 위험들이 하나 둘씩 나타난다. 핵은 청정에너지이고 에너지 효율이 매우 높지만 방사능이라는 가공할 위험을 동반하고, 노벨이 발명한 폭탄은 채굴 및 발파에 도움을 주었지만 전쟁무기로 사용될 수 있는 위험을 낳았다. 오늘날 우리가 매일매일 사용하는 스마트폰은 언제 어디서나 다른 사람들과 연결시켜주고 소통할 수 있게 해주는 편리한 기계지만 대신 해킹의 위험, 사생활 침해의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