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석규의 대몽골 시간여행-32] 서하(西夏)는 길목의 희생양(犧牲羊)인가? ①
2017-08-29 13:28
서하(西夏)는 티베트계인 탕구트族이 세운 나라다. 당초 이들은 중국 사천성(泗川省)의 서쪽 지방에서 살았다.
그러나 이 지역이 티베트의 토번(吐蕃)왕국의 지배 아래 들어가자 동쪽으로 이동해 지금의 중국 감숙성(甘肅省)과 영하회족자치구(寧夏回族自治區) 근처 지역으로 옮겨와 살았다.
이 종족을 이끌던 탁발사공(拓跋思恭)이 883년 황소의 난 때 당나라를 도와 장안을 탈환하는 데 참여했다.
당나라는 그 공으로 탁발사공에게 이(李)씨 성을 부여했고 이후 이씨가 탕구트족을 다스리는 최고의 씨족이 됐다.
그들은 이 지역에서 세력을 넓혀가다가 11세기 초 수장인 이계균(李繼筠)이 송(宋)나라로부터 독립해 서하 왕국을 세웠다.
그러나 송나라에서는 과거 하(夏)나라와 구분해 서하라고 불렀다.
▶ 동서교역 요충지로 경제적 富 축척
東으로는 송나라, 西로는 위그루, 南으로는 티베트, 그리고 北으로는 몽골, 거란과 국경을 접하고 있던 서하 왕국은 동서(東西) 교통의 요충지이자 실크로드의 동쪽 출발지이기도 했다.
이러한 지리적 이점을 안고 서하는 이곳을 지나는 상인들로부터 1/10의 통과 세를 받으며 경제적 부를 구가했다.
이처럼 경제적으로 번영을 구가하던 서하였지만 칭기스칸이 이곳을 공격할 당시 군사력은 중국을 삼분(三分)하던 세 나라 가운데 가장 약했다.
당시 중국 대륙은 금나라와 서하 그리고 장강 이남의 남송이 삼분하고 있었다.
▶ 첫 번째 정벌 목표 金나라
5년 동안 내부 다지기와 주변 정리에 주력했던 칭기스칸은 중국 땅을 지배하고 있는 금나라를 공격할 때가 왔다고 생각했다.
금나라는 과거 몽골족과 깊은 원한 관계로 맺어진 나라였다.
몽골 울루스(나라)의 두 번째 칸을 사로잡아 못을 박아 처형한 나라, 처형당한 암바가이칸이 죽기 전에 처절한 복수를 당부한 나라, 금나라에 대한 공격은 명분상으로도 충분했다.
특히 금나라의 사신으로 몽골에 왔다가 칭기스칸의 풍모에 감명 받아 신하가 될 것을 자청한 거란족 출신 야율아해를 비롯한 중국에서 온 투항자들은 당시 금나라의 사정을 자세히 전해 주면서 금나라 원정을 건의했다.
금나라는 군사적으로 무방비 상태에 있는 데다 병사들의 사기는 극도로 떨어져 있으니 공격하면 반드시 승리할 수 있을 것이라는 지적이었다.
이 같은 건의는 칭기스칸으로 하여금 전쟁 의지를 불태우게 만들기 충분했다.
그러나 칭기스칸은 경솔하게 행동하지 않고 신중하게 전쟁을 준비해 나갔다. 자파르를 비롯한 이슬람 상인들을 먼저 금나라로 보내 보다 정확한 사정을 알아보도록 했다.
▶ 서하통과 금나라 공격 선택
하나는 고비사막을 넘어 중국을 공격하는 방법이었다. 다른 하나는 지금 중국의 감숙성(甘肅省)에 자리하고 있던 서하 제국을 통과해 동쪽으로 공격해 들어가는 방법이었다.
첫 번째 공격로는 비록 거리상으로는 짧지만 거친 사막을 가로질러 가야하기 때문에 병참 라인에 문제가 있을 수가 있었다.
이에 비해 동쪽이나 서쪽으로 우회 공격하는 방법은 비록 거리상으로는 멀지만 공격이 용이한 이점이 있어 칭기스칸은 이 방법을 선택했다.
특히 실크로드 상의 동쪽 요충지에 자리한 서하는 많은 물자가 넘쳐 나서 약탈을 위한 공격 대상으로서도 더 없이 구미가 당기는 곳이었다.
서하에 대한 공격은 원정로(遠征路)를 열고 물자를 보충한다는 것 외에 또 하나의 중요한 목적이 더 있었다.
▶ 요새 공격 시험무대
서하에 대한 공격은 국지적(局地的)인 침략이 아닌 전면전(全面戰)으로는 대몽골 제국이 정착문명권에 대해 펼치는 최초의 군사작전이었다.
유목민족의 용사들은 넓은 지역에서 적을 공격하는 데는 특출한 능력을 지니고 있을 뿐 아니라 잘 조직화돼 있었다.
따라서 서하에 대한 공격은 금나라 공격에 앞서 몽골의 군대가 요새화된 지역을 얼마나 효율적으로 공격할 수 있는지를 점검해 보는 시험무대이기도 했다.
실제로 칭기스칸은 서하의 수도 중흥부 근처를 지나는 황하의 물줄기를 돌려 중흥부를 범람시키려고 시도했으나 실패하는 등 몇 가지 작전에서 차질을 빚기도 했다.
▶ 금나라로 열린 길
서하는 강력한 군사력과 견고한 성을 방패삼아 8개월을 버텼다. 이 위기의 상황에서 서하는 금나라에 구원을 요청했다.
하지만 금나라는 ‘입술이 없으면 이빨이 시리게 된다.’는 평범한 진리를 외면한 채 아무런 도움을 주지 않았다.
금나라로 통하는 길이 이렇게 열렸다.
군사적인 열세 때문에 조공까지 받치며 길을 내줬지만 서하는 속으로 몽골을 그들의 종주국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그들로서는 야만의 나라에게 정복당했다는 사실을 인정하기가 어려웠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한 본심이 칭기스칸이 전쟁을 계속하는 과정에서 협조를 요청했을 때 이를 기피하는 현상으로 나타났고 그것이 나중에는 칭기스칸을 비난하는 데까지로 발전했다.
▶ 16년 뒤 서하 존재 말살
특히 이 전쟁 중에 칭기스칸이 병으로 숨지게 되자 그의 아들과 장수들은 아예 서하의 존재를 없애버리고 그 지역을 쑥밭으로 만들어 버리게 된다.
그러나 칭기스칸에게 금나라로 가는 길을 열어줄 당시 서하 왕국은 그들의 수명이 겨우 16년밖에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을 알 리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