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병희칼럼] 지식인이 보이지 않는다
2017-08-11 04:00
지식인이 보이지 않는다.
정치는 이데아를 좇는다. 이데아를 찾기에 정치는 이념이다. 이념의 실현도구는 정당이고 수단은 정책이다. 그 과정은 아름다워야 한다. 정치가 예술이기도 한 이유다.
예술로서 정치는 적절성과 타당성을 확보해가며 정책을 구현한다. 정책이 과학이어야 하는 당위다. 과학적 접근이 결여된 정책은 엄청난 희생과 피해를 가져온다. 역사가 그랬다.
마르크스를 빌리면 좀더 명확해진다. “경제적 토대인 하부구조가 사회 정치 이데올로기적 상부구조를 규정한다”를 “ ’정책’이라는 하부구조가 ‘정치’ 이데올로기적 상부구조를 규정한다”로 바꿔보자. 유물론적 관점이기는 하지만 정책이 과학이어야 함이 분명히 드러난다.
이때 필요한 것이 바로 지식인이다. 정치인 또는 행정가들이 정책을 과학적으로 사고하고 결정하는 데 있어 지식인들의 합리적 견제와 균형은 필수불가결하다.
문재인 정부들어 ‘지식인’이 보이지 않는다. 문재인 정부의 성공을 위해서도 균형자로서 지식인들의 냉정한 분석과 고언(苦言)이 필요한데 말이다.
북한이 대륙간탄도미사일(ICBM)급 미사일에 탑재하는 핵탄두 소형화에 성공하고 미국영토 30~40㎞ 범위 내에 미사일을 쏘겠다는 선전포고에 가까운 협박을 해도, 이에 맞서 트럼프 대통령을 비롯한 미국 측 인사들이 전쟁을 불사하는 일촉즉발의 강경발언을 쏟아내도 우리 지식인들은 그림자조차 없다.
반미(反美), 친중(親中), 광우병사태, 세월호, 촛불혁명에는 찬반을 떠나 나름대로 적극적 의사표시를 했던 지식인들이 계속되는 북한발 위기상황에는 침묵이다. 기껏 관여를 한다 해도 여의도 정치꾼들과 같은 정파적 언어의 유희로 일관하고 있다.
교육부가 밀어붙이고 있는 수능절대평가제 확대 도입 실시도 마찬가지다. 이낙연 총리까지 나서 신중론을 제기했지만 김상곤 사회부총리 겸 교육부장관은 이달 말까지 제도의 윤곽을 만들겠단다. 그는 내친김에 기세를 몰아 2심 재판을 앞두고 있는 세월호와 한국사 국정교과서 시국선언교사들에 대해 선처를 요청하는 편지를 사법기관 수장들에게 보냈다. 불과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처벌에 단호한 입장이었던 교육부로서는 수장의 이런 행동에 당혹스러워해야 할 일이다. 정부의 신뢰에 금이 가는 것은 물론이고.
두 문제 다 활발한 사회적 논의가 필요함에도 불구하고 지식인들은 고요하다. 이전 같으면 정책의 절차적 정당성에서 효과에 이르기까지 갑론을박이 넘쳐났을 텐데 말이다.
“공권력에 도전하면 용인하지 않을 것”이라는 실세 장관의 기업에 대한 윽박지르기나, 탈원전정책에 소극적이라고 담당 부처 장관과 고위 간부들을 반(半)공개적으로 다그치는 대통령 보좌관의 날 선 공박에도 지식인그룹은 그저 덤덤한 모습이다. 전체주의 시절이나 개발독재 시대에나 있을 법한 일이었는데도 별반 의견이 없다.
또 다른 사례을 하나 더 살펴보자.
정부는 그동안 1조6000억원을 들여 공정률 30%에 이른 원전 공사를 중단시키고 미래 전력수요난 우려에도 불구하고 탈(脫)원전정책을 쾌도난마 식으로 결정했다. 향후 수십년간 국가의 에너지정책을 결정하는 중차대함에도 불구하고 원자력 전공 교수들의 항변만 눈에 띌 뿐 원전이 갖고 있는 외교, 안보, 사회적 함의를 진지하게 논하는 지식인들의 장(場)은 없다.
지난달 발표한 고소득자, 즉 부자 증세를 골자로 한 세제개편안과 이에 대한 지식인들의 무관심은 절정에 이르고 있다. 정부가 부자 증세를 정당화하기 위해 ‘정권친화적인 숫자놀이’를 해도 이를 지적하고 교정을 요구하는 지식인들은 눈에 띄지 않는다.
정부가 법인세율을 22%에서 25%로 인상하면서 다른 나라보다 세율이 낮다고 제시한 수치가 OECD 국가 가운데 G20의 11개국 평균 최고 세율 24.7%였다. 그런데 OECD 35개국 평균이 22.7%라는 사실은 편리하게도 생략됐다. 또 소득세 최고세율도 40%에서 42%(5억원 초과)로 올리면서 OECD 평균이 41.9%라고 했다. 세율이 낮은 10개국을 뺀 나머지 25개국 평균이라는 사실은 밝히지 않은 채. 35개국 전체 평균은 35.5%라는 수치는 어디 갔을까? 과거엔 소수점 숫자에도 핏대를 올리던 그 많던 지식인들은 어디 갔을까?
사실 지식인은 그 누구로부터도 위임장을 받거나 그 어떤 권위로부터 지위를 부여 받은 적이 없다. 따라서 지식인은 어떤 권력도 갖고 있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책적 규범까지 포괄하는 지식인의 실천적 주장과 논리는 상황을 정리하고 시민의 복리를 위한 합리적 준거틀로 인정돼 왔다. 문명사회의 균형자로, 역사발전의 견인자로 지식인은 포지셔닝을 해왔기 때문이다.
물론 권력은 지식인을 헤겔의 ‘불행한 의식(conscience malheureuse)', 즉 ‘허무한 평등’이나 ‘노예의식(노예근성)'의 범주로 몰아넣으며 일정 거리를 둬 왔다. 합리적·과학적 사유를 하는 지식인들이 늘 달가울 수만은 없어서이다.
그렇기에 지식인은 실천적 주체를 실현하는 데 목표를 둘 수밖에 없으며, 실천적 주체를 배출하고 지탱해줄 사회원칙의 발견을 소명으로 삼아왔다.
침묵하고 있는 우리의 지식인들은 과연 이에 부합하고 있는가? 아니면 편의에 따라, 시기에 따라, 대상에 따라 선택적 역할을 하는 데 습관화돼 있는가? 견제와 균형을 통한 사회의 진화라는 지식인으로서 본래의 역할을 포기할 때 우리는 지식인을 지식인이라 부르기 어렵다. 그냥 전문기술을 가진 기능인에 불과하다.
실천적 현실 참여를 통해 시대의 양심이 된 에밀 졸라, 앙드레 말로, 앙드레 지드를 우리에게서는 기대할 수 없을까?
지식인들을 바라보는 마음이 편치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