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석규의 대몽골 시간여행-13] 칭기스칸은 몽골인에게 무엇인가?

2017-08-07 15:01

 

[사진 = 배석규 칼럼니스트]

▶ 몽골이 곧 칭기스칸
몽골하면 곧 칭기스칸을 떠올릴 정도로 몽골 밖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두 개의 이미지가 거의 동일시 되고 있다.
지금 몽골은 넓은 땅과 풍부한 지하자원을 가진 많은 가능성을 지닌 나라다.

하지만 경제적으로는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 가운데 하나다.
몽골인들의 현재 삶이 그만큼 팍팍하다는 얘기다.

[사진 = 칭기스칸 초상화]

그런 몽골 사람들에게 중세 세계의 절반을 차지하며 세계를 호령하도록 만들었던 그들의 조상 칭기스칸은 그들 가슴 속에 품은 영원한 자존심이다.
칭기스칸이 몽골 땅을 스쳐 지난 지 8백년 가까이 되지만 지금 몽골인들의 가슴 속에 지워지지 않는 잔상으로 남아있는 것은 과거 영광의 시대를 재현할 수도 있다는 미래에 대한 꿈 때문인지도 모른다.

▶ 3백년 잊혀졌던 칭기스칸
이처럼 몽골인들은 지금 칭기스칸을 민족의 영웅, 자랑스러운 선조로 여기고 있다.
하지만 이들에게 살아나기 시작한 것은 불과 27년 전의 일이다. 몽골이 1990년 구(舊) 소련의 위성국가에서 벗어나면서 부터다.
그전에는 몽골인들은 칭기스칸을 입에 담는 일조차 거의 없이 대부분 모르고 지냈다.
그것은 견제와 통제 속에서 살아온 근세 몽골의 역사가 가져 온 결과다.

근세 2백년 이상에 걸친 청나라의 지배와 그 이후 소련의 영향권에서 살아 온 70년 동안 몽골인들에게 칭기스칸을 거론하거나 기억하는 것은 금기(禁忌)였다.
기억한다해도 무자비한 정복자나 학살자로, 히틀러(Hitler)와 같은 냉혈한으로 기억하도록 강요 받아왔다.

청나라나 소련은 몽골인들이 다시 일어서는 것을 막기 위해 그들이 정신적 지주로 여겨왔던 칭기스칸을 비하시키는 작업을 꾸준히 계속해 왔다.
특히 러시아는 몽골의 말발굽 아래서 과거 '타타르의 멍에(Татар Иго;타타르 이고)'라는 말까지 만들어 내며 2백년 이상 치욕의 역사를 겪었다.

그 후신인 소련은 철저히 칭기스칸이라는 인물을 지우는 작업을 펼치도록 수십 년 동안 몽골을 압박했다.
그렇게 살아오는 동안 몽골인들에게 칭기스칸도, 그들의 역사도 하찮은 것이 돼 갔다.

▶ 되살아나는 영웅-홀로 서기의 중심
잊혀졌던 인물 칭기스칸이 다시 살아나기 시작한 것은 소련의 영향권에서 벗어난 1990년부터였다.
오랜 외세의 영향권에서 손발이 묶인 채 살아왔던 몽골인들은 그들의 삶의 고삐를 쥐고 있던 소련이 그 끈을 놓아 버린 뒤 곧바로 홀로 서기에 나섰다.

오랜 통제 속에 살아온 탓에 홀로 서기에 서툴 수밖에 없었던 그들에게 가장 시급한 일은 국민의 마음을 한데로 묶는 일이었다.
국민의 마음을 한데로 모으기 위해서는 그 중심의 자리를 차지할 대상이 필요했고 자연스럽게 칭기스칸이 그 자리를 차지했다.
 

[사진 = 칭기스칸 동상 제막식(1990) 헨티 아이막 소재]

그들의 역사와 칭기스칸을 지우는 데 앞장섰던 공산당인 집권 인민혁명당은 이번에는 칭기스칸을 되살리는 일에 앞장서는 아이러니가 빚어졌다.
칭기스칸의 동상과 비석이 세워지고 역사를 되살리는 작업이 지체 없이 시작됐다.

▶ 축제가 된 몽골비사 탄생 기념비 제막
그 첫 번째 작업이 칭기스칸의 삶을 기록으로 남긴 몽골비사의 탄생을 기념하는 비석을 세우는 일이었다.
1990년 7월, 그 기념비가 케를렌강 근처 아바르가라 불리는 초원에 세워지던 날, 축제일을 맞은 전 몽골이 술렁거렸다.

한적했던 초원은 한꺼번에 몰려든 사람들로 북새통을 이루었다.
그들이 만들어 내는 환호와 함성은 수백 년 잠들어 있던 초원을 일시에 깨운 것은 물론 견제와 통제 속에 살아온 몽골인들의 혼을 일깨우는 소리였다.

그곳에 모인 사람뿐 아니라 모든 몽골인들의 눈과 귀는 이날 이 곳으로 모아졌다.
생방송을 통해 전 몽골에 그 모습이 전해졌기 때문이다.
오치르바트 당시 대통령을 비롯한 정부 관리와 사회 지도자들은 물론 일반인들까지 이곳으로 몰려들었다.

이들에게 수도 울란바타르에서 비포장도로를 덜컹거리며 자동차로 7시간 이상이나 걸려서 이 오지로 달려와야 하는 불편함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비석을 두른 흰 천이 벗겨지고 칭기스칸의 모습이 사람들 앞에 드러났을 때 흥분과 희망이 흘러 넘쳤다.
그 순간은 바로 몽골인들이 새 출발을 다짐하는 자리이기도 했다.

▶ 되살아난 나담(Nadam) 축제

[사진 = 나남축제]

몽골인 최대의 축제는 7월에 열리는 나담 축제다.
칭기스칸 시대 이후 이어져왔던 이 축제는 사회주의 국가시절 혁명기념 행사로 변질됐다.

나담 축제에서 군사 퍼레이드가 사라지고 원래의 축제 모습을 되찾아 가기 시작한 것도 이때부터였다.
그리고 지금은 몽골인 최대의 축제가 됐다.
사흘 연휴인 이 축제 기간 동안 몽골인들은 말달리기와 씨름, 활쏘기 등의 경기를 벌이며 과거 선조들의 영광과 기상을 되살린다.
 

[사진 = 나남축제 개회식에서 애국가를 부르는 새 대통령 '칼트마 바틀가']

2017년 올해 나담 축제에는 특히 막 당선된 몽골의 새 대통령이 참석해 개막선언을 하면서 축제 분위기가 더욱 고조됐다고 현지 한국 교민이 전해왔다.
7월에 당선된 몽골 새 대통령은 격투기 선수 출신 사업가인 50대의 칼트마 바툴기대통령이다.

▶ 수 없이 나타난 성(姓)씨-보르지긴
외세의 지배 아래서 사라졌던 성(姓)씨 찾는 작업도 시작됐다.
성씨가 없이 아버지 이름을 자신의 이름에 붙여 부르는 방법은 전적으로 러시아식의 작명법에 따랐기 때문이다.
다른 점이 있다면 러시아는 자신의 이름과 성씨가 엄연히 존재하고 그 사이에 아버지의 이름을 삽입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사진 = 레닌동상 울란바타르 소재]

레닌(Lenin)의 원래 이름은 '블라디미르 일리이치 울리야노프'다.
레닌의 원래 이름은 블라디미르이고 아버지의 이름은 일리이치이며 레닌의 집안의 성은 울리야노프가 되는 형식이다.
레닌이라는 이름은 그가 시베리아 땅으로 유배됐을 때 사용한 필명(筆名)이 이름으로 굳어진 경우다.

그러나 과거 공산당 정부의 작명법은 러시아식을 따르되 아예 성을 쓰지 않도록 하는 방법을 강요해 왔기 때문에 어느 틈엔가 몽골인들에게서 성씨가 사라지게 됐다.
그렇게 한 갑자 이상 살아오는 동안 뿌리에 대한 의식도 희미해질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흔적이 희미해져 가는 뿌리를 찾아내는 일, 그 일은 그 동안 매도됐던 역사와 조상을 되살리는 복고운동으로 자리 잡았다.
그 성씨 찾기 작업을 앞장서 주도한 사람이 세르체 전 몽골국립도서관장 같은 사람이다.
 

[사진 = 칭기스칸 가계 족보]

칭기스칸의 원래 이름은 테무진이다. 테무진의 정식 이름은 '보르지긴 테무진'이다. 보르지긴 씨족의 테무진이라는 말이다.
성씨 찾기 운동과 함께 수많은 보르지긴 후예들이 나타났다.
너도 나도 보르지긴 씨족을 자처하면서 우리나라의 이(李)씨와 김(金)씨를 합친 것보다 더 높은 비율을 나타냈다.

아직 뿌리를 찾지 못한 많은 사람들도 자신이 보르지긴 씨족일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을 망설이지 않았다.
보르지긴 씨족은 과거 몽골의 역사에서 니론, 즉 성골(聖骨)로 불리던 알랑고아의 후손들을 가리킨다.

이는 곧 몽골의 제1귀족인 칭기스칸의 후손임을 나타내는 것과 같은 의미다.
새롭게 나타나고 있는 수많은 보르지긴의 후손들! 그것은 그 동안 잊혀 진 듯 살아왔지만 몽골인들의 가슴속에는 칭기스칸의 후예임을 자부하는 마음이 살아 있었다는 증거다.

▶ 最高의 자리를 찾아가는 칭기스칸
 

[사진 = 몽골 화폐 만 투그릭]

때를 같이 해 몽골의 지폐에도 칭기스칸의 얼굴이 새겨졌다.
그것도 최고 고액권인 만 투그릭(Tugrik;만원에 해당)짜리 지폐의 한가운데 자리다.

[사진 = 칭기스칸 백주 광고]

몽골인들이 즐겨 마시는 맥주에도, 그들이 최고급 술로 여기는 보드카의 최상품의 상표에도 칭기스칸이 등장했다.

[사진 = 칭기스칸 보드카]

몽골의 최고급 호텔 이름도 칭기스칸이다.

이렇게 칭기스칸은 지금 몽골에서 최고의 자리를 차지했다.
수십 년 간 몽골인들의 뇌리에서 지워졌던 그가 지금 최고의 인물, 최선의 선택으로 자리 잡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