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석규의 대몽골 시간여행-1] 최초의 유목민족은 누구인가? ①

2017-07-20 16:05

[사진 = 배석규 칼럼니스트]


▶ 최초 유목민족-스키타이(Scythian)
 

사진설명 : 스키타이 발생지를 표시한 지도


스키타이문화는 아직도 불가사이 한 것으로 인식되고 있다.
스키타이는 최초의 기마 유목민족이다.

그들 고유 문자가 없었으니 그들의 역사를 정확히 알 길이 없다.
다만 그들이 남긴 유물과 유적, 분묘 등이 그들의 존재를 이야기해 주고 있다.

스키타이는 기원전 8-7세기쯤 흑해 주변의 러시아 대초원에서 등장한다.
그들은 유라시아 대륙을 이동해 다니며 양과 소, 염소 등 가축을 키우던 유목민족으로 알려져 있다.

물론 스키타이 이전에도 유목문화가 있었지만 통상 스키타이를 최초의 유목민족으로 인정하고 있다.
그들은 이동을 하면서 말은 기마용으로 타고 다녔다고 한다.

이들의 존재는 헤로도토스(Herodotos)의 ‘역사(歷史)’에 비교적 자세히 언급돼 있다.
그리고 17세기부터 구르칸의 유물들이 발견되기 시작하면서 세계사의 전면에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시작했다.

▶ 불가사이 한 스키타이 문화
스키타이는 전쟁을 좋아하고 민족성이 과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 곳에 정착하지 않고 삶의 터전을 찾아 이동해 다니며 자연 또는 적과 부딪치다 보니 그러한 민족성을 가지게 된 것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그러한 특성은 흉노와 돌궐, 몽골 등 같은 유목민족에게서 공통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정작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초원을 떠돌아다니던 유목민족이 어떻게 그처럼 높은 수준의 문화를 남길 수 있었느냐 하는 점이다.
 

사진설명 : 최초의 유목민족으로 알려진 스키타이 관련 유물들 


무덤에서 발견된 그들의 유물은 정교하기 이를 데 없다.
그 것도 대부분 황금으로 만들어진 것들이다.

일부학자들은 유물들을 관찰해보면 스키타이 문화는 그리스 문화로부터 상당한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그 자체가 독자적인 문화라는 주장도 만만찮다.

그들은 자체 문화를 만들어 내는 데 그친 것이 아니라 그 문화를 동쪽 유목민족에게 전파시켜서 곳곳에 스키타이 풍의 문화를 만들어 냈다.
그 문화는 당시 몽골 초원을 장악하고 있던 흉노에게 영향을 끼쳐 흉노의 본거지였던 오르도스(지금의 중국 내몽골 지방)지방까지 전파됐다.

또 그곳에서 화북지방을 거쳐 중국문화에도 상당한 영향을 준 것으로 발견된 유물들이 얘기하고 있다.
한반도에는 기원전 4세기쯤 한족의 철기문화와 스키타이의 청동기문화가 혼합된 형태로 들어왔다.

그것이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야요이 문화를 만들어냈다는 것이 일반적으로 알려진 스키타이 문화의 전파 경로다.

▶ 바람 같은 기마술
말을 타고 초원을 달리며 활을 쏘고 칼을 휘두르는 마상무예(馬上武藝)는 마상재(馬上才)가운데도 가장 으뜸으로 삼는 기술이다.
그래서 유목민들 사이에는 "말을 타고 활과 칼을 잘 다루면 천하를 얻는다."는 말이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말을 자유자재로 다루는 기마술(騎馬術)과 마상무예는 기마 유목민족에게 전통적으로 이어져 온 것이다.
그 출발은 최초의 기마 유목민족으로 알려진 스키타이 때부터 시작된다.

당시 스키타이가 보여준 바람 같은 기마술과 전술은 마치 기마 유목민족이 역사에 등장할 초기부터 신출귀몰하고도 강한 모습으로 나타났던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을 갖게 할 정도로 강렬한 인상을 준다.

▶ 유목민과 정주민의 최초 대전(大戰)
기원전 6세기에 있었던 페르시아(Persia)와 스키타이의 전쟁은 정주민과 유목민이 최초로 맞부딪친 전쟁이라 할 수 있다.
어떤 면에서 보면 이 전쟁은 20여 년 뒤에 있게 될 아시아와 유럽 간의 최초 대전(大戰)인 페르시아-그리스 전쟁의 전초전 성격을 띠고 있었다.

이 관련 내용도 헤르도토스의 역사에 기록돼 있다.
페르시아는 지금의 이란(Iran)으로 생각하면 이해가 편하다.
페르시아라는 명칭은 이들이 이란 남부 페르시스(Persis;지금의 파르스)라는 곳에서 일어났기 때문에 그리스 등 주로 유럽지역에서 불렀던 이름이다.

이 지역에 사는 사람들은 ‘아리아인의 땅’이라는 의미의 이란으로 불러주기를 더 원하고 있다.
BC 522년 권좌에 오른 다리우스(Darius)는 페르시아제국을 통합하고 유럽 공격, 즉 당시 강력한 도시국가였던 그리스 공격을 준비하게 된다.

그리스 공격에 앞서 단행된 것이 바로 BC 514년의 스키타이 원정이었다.
이 원정에 동원된 페르시아 병사가 70만에 이른다고 기록돼 있다.
하지만 과연 그만한 대군을 동원할 수 있었는지는 믿기 어렵다.

아무튼 대군을 이끌고 흑해 북쪽으로 들어서 스키타이 기마군과 마주친 페르시아군은 마치 귀신에 홀린 듯 스키타이軍에게 농락당한 뒤 어렵게 호랑이 굴속에서 빠져 나오게 된다.
이때 잃은 병사의 수가 무려 8만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 "스키타이는 존재하지 않았다."
바람처럼 나타났다가 한 차례 공격을 퍼붓고 바람처럼 사라지는 스카타이 기마군은 페르시아軍에게는 신기루나 마찬가지였다.
아무리 잡으려고 해도 잡을 수도 없었고 보이는가 싶으면 어느새 눈앞에서 사라져 버리니 신기루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냥 나타났다 사라지는 것도 아니고 한차례 화살 세례를 퍼붓고 사라지는 이른바 치고 빠지기(hit & run)전술을 구사했기 때문에 페르시아군은 뒤를 쫓아다니다가 지칠 수밖에 없었다.
야구에서 구사되는 '히트 엔 런' 전술은 타자(打者)가 치고 주자(走者)가 달리는 것이다.

이에 비해 스키타이 기마군단은 동시에 치고 동시에 달아난다는 것이 차이점이었다.
그들은 달아나면서도 그냥 달아나지 않았다.
달아나면서 화살을 쏟아 붓는가 하면 주위를 모두 불태워 초토화 시켜버리기도 했다.

정신없이 스키타이군을 뒤쫓던 페르시아군이 정신을 차려보면 적의 유인작전에 이끌려 어느새 적진 깊숙이 들어서 있는 것을 발견하기가 일쑤였다.
당시 스키타이인들의 본거지였던 흑해 북쪽의 킵착 초원지대 한 가운데로 유인 당한 페르시아군은 동서남북조차 가늠하기 쉽지 않았을 것이다.

여기에다 스키타이가 주변을 모두 불태워 초토화시켰기 때문에 식량조차 구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 분명하니 페르시아군의 고초가 이만 저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당시로서는 초원 깊숙한 지점까지 병참 라인을 연결시켜 간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병사들이 굶주림에 지친 데다 언제 어디에서 출몰할지 모르는 스키타이 기마대에 대한 두려움이 전군에 엄습했다.

다리우스는 퇴각을 서두를 수밖에 없었다. .
페르시아군이 흑해를 빠져 나와 지중해 입구인 다르다넬스(Dardanelles)해협으로 빠져 나왔을 때 아마 다리우스는 엄청난 참패에 스스로도 악몽을 꾼 것처럼 느꼈을지 모른다.

"스키타이는 존재하지 않았다. 이쪽에 있는 것 같아 공격하면 사라졌고 저쪽에 있는 것 같아 공격하면 거기서도 사라졌다."
전쟁에서 돌아온 다리우스의 탄식이었다.

바람처럼 나타나 한차례의 폭풍우를 일으킨 뒤 사라져 버리는 기마전술 때문에 유목민과 정주민 사이에 있었던 세계 최초의 대전은 이처럼 정주민의 완패로 끝났다.

▶ 유산으로 남겨 놓은 기마술
이후 기원전 490년, 다리우스는 그리스에 대한 공격을 감행해 페르시아-그리스전쟁을 일으키지만 성공을 거두지 못한다.
1차 전쟁은 바로 그리스의 병사 필리피데스(Philippides)가 마라톤평원에서의 승리를 알리기 위해 아테네까지 달려간 거리, 42.195Km를 마라톤의 기원으로 삼았다는 바로 그 전쟁이다.

다리우스의 아들 크세르크세스(Xerxes)에게까지 이어진 세 차례 전쟁에서 페르시아는 결국 패하고 말았지만 전쟁의 후유증을 충분히 극복하고 이후 150년 동안 번영을 구가했다.

그러나 기원전 334년 그리스 지역을 평정한 마케도니아(Macedonia)]의 알렉산더(Alexander)가 거꾸로 페르시아를 공격하면서 다리우스 3세는 숨을 거두고 페르시아제국은 역사 속에서 막을 내리고 만다.

반면 스키타이는 이후 러시아 초원으로, 중앙아시아 초원으로 그 영역을 넓혀가며 그들이 지닌 날랜 기마술과 독특한 전술을 유산으로 남겨 놓게 된다.
그리고 기원전 1세기 스키타이는 역사 속에서 사라지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