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연구의 과학과 문화] 호모 사피엔스에서 호모 루덴스로

2017-07-04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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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최연구]

 
만물의 영장 인간이 다른 동물과 구분되는 속성은 여러 가지다. 이성적 사고를 하고, 도구를 사용하며, 허구적 상상을 하고, 상징체계를 사용한다는 점 등이다. 사유하는 인간을 호모 사피엔스, 도구를 사용하고 만드는 인간을 호모 파베르, 놀이하는 인간을 호모 루덴스라고 한다.
우리에게 가장 익숙한 것은 호모 사피엔스다. 스웨덴의 식물학자 린네는 현생인류 종에 호모 사피엔스(Homo Sapiens)라는 라틴어 학명을 붙였다. 린네가 고안한 분류법에 의하면 생물 학명은 라틴어로 속명과 종명을 쓰고 뒤에 학명을 명명한 사람 이름을 붙이게 돼 있다. 그래서 현생인류 학명은 ‘호모 사피엔스 린네’지만 보통 린네는 생략한다. 호모 사피엔스는 ‘지혜로운 사람’이란 뜻이다. 철학에서는 무엇보다 이성적 사유 능력에 주목한다. 역사학자 유발 하라리는 자신의 저서 <사피엔스>에 다음과 같이 썼다.
“7만년 전, 호모 사피엔스는 아프리카의 한 구석에서 자기 앞가림에만 신경을 쓰는 별 중요치 않은 동물이었다. 이후 몇 만년에 걸쳐 이 종은 지구 전체의 주인이자 생태계의 파괴자가 되었다.”
어떻게 인간이 지구의 주인이 될 수 있었을까. 호모 사피엔스가 세상을 정복한 성공 비결은 사고방식, 의사소통 방식에 기인한 인지혁명에 있다고 하라리는 설명한다. 또한 그는 인간 언어의 가장 독특한 측면은 허구를 말할 수 있는 능력이라 보았다. 존재하지 않는 것을 상상하고 이를 언어로 소통하는 것은 호모 사피엔스의 사유능력 때문에 가능하다. 인간은 호기심을 갖고 끊임없이 ‘왜?’라는 질문을 던진다. 그것이 과학의 출발점이다. 상상하고 이성적으로 사고하면서 인간은 물질세계와 생명체의 본질과 원리를 알아낼 수 있었고 과학적 발견을 통해 방대한 지식과 학문 체계를 축적할 수 있었다. 과학발전은 호모 사피엔스의 사유능력과 지혜 덕분이다. 이를테면 호모 사피엔스는 과학을 하는 인간이라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인류문명 발전의 원동력은 과학이지만 과학지식은 그냥 놔두면 기초 원리에 불과하다. 과학지식이라는 구슬도 꿰어야 보배가 된다. 과학지식을 활용해 새로운 것을 만드는 것을 기술이라고 한다. 새로운 것을 만들고 발명하는 것은 인간의 또 다른 본성이다. 만드는 인간, 도구의 인간이라는 의미의 호모 파베르(Homo Faber)는 특히 근대산업사회로 들어오면서 설득력을 갖는다. 인간이 다른 동물과 구별되는 근본적 차이점을 만드는 공작 본능에서 찾은 것이다.
20세기 들어 인간의 본성을 조금 색다르게 설명하는 관점이 나타났다. 네덜란드의 역사문화학자 요한 하위징아는 인간의 유희적 본성에 주목했다. 1938년에 출간한 기념비적 저작 <호모 루덴스>에서 그는 모든 문화현상의 기원은 놀이에 있고 인간은 놀이를 통해 역사적으로 문화를 발전시켜 왔다고 주장한다. 문화에서 놀이가 나온 것이 아니라 거꾸로 놀이에서 문화가 만들어졌다는 파격적 주장이었다. 호모 루덴스란 놀이하는 인간, 유희인이라는 뜻인 바 결국 인간은 놀고 즐기는 존재라는 것이다.
이렇게 관점에 따라 지혜로운 인간, 만드는 인간, 놀이하는 인간으로 인간 본성을 다르게 정의해 왔지만 이 세 유형의 인간이 각각 서로 다른 인간은 아니다. 같은 인간의 다른 측면일 뿐이다. 인간은 생각하고, 만들고, 노는 세 가지 본성을 동시에 갖고 있다.
인류역사의 발전과정에서 과학과 지식을 만드는 데 기여한 것은 지혜로운 인간이었고, 산업혁명과 근대화를 이끌어온 것은 만드는 인간이었으며, 문화를 발전시켜온 것은 놀이하는 인간이었다. 사유는 지식의 원천이고, 도구와 공작은 창조의 원동력이며, 놀이는 인간 문화의 핵심이다. 어느 것 하나 인간에게 중요하지 않은 것은 없다.
오늘날 과학기술은 빠른 속도로 발전하고 있고 우리는 첨단기술시대를 살고 있다. 과학 발전은 인간의 말을 알아듣고 인간처럼 생각하는 인공지능을 만드는 데까지 이르렀다. 인공지능과 공존하게 될 미래사회의 인간은 어떤 모습일까. 아마 미래사회에는 힘든 일, 어려운 일, 위험한 일은 인공지능 기계가 대신해 줄 것이다. 인간의 노동시간은 줄어들고 여가시간은 늘어날 수밖에 없다. 인간은 더 많아진 여유시간을 어떻게 보내며 삶을 즐길지에 관심을 가질 것이다. 인공지능 발전과 자동화로 사라지는 일자리도 있지만 늘어나는 일자리도 있다. 새롭게 생기는 일자리 중에는 놀고 즐기는 것과 관련된 서비스 업종이 많아질 것이다. 엄청난 능력을 갖고 있는 인공지능 기계는 호모 사피엔스처럼 생각하고 판단할 수 있으며, 호모 파베르처럼 도구를 사용하고 만드는 일도 능숙하게 해낼 것이다. 어쩌면 호모 사피엔스나 호모 파베르로서의 인간능력을 훨씬 능가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더라도 인공지능 기계가 호모 루덴스처럼 놀고 즐길 수는 없을 것이다. 필자가 미래 인간이 호모 루덴스형이 될 거라고 믿는 이유다. 과학이 발전하면 할수록 문화가 중요해진다. 호모 사피엔스형 인간은 호모 루덴스형 인간으로 진화할 것이다. 이제 인간은 호모 루덴스로 살아가는 법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