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박열' 최희서 "가네코 후미코役, 큰 역할이라 캐스팅 기대 없었다"
2017-06-30 00:05
28일 개봉한 영화 ‘박열’(감독 이준익)은 1923년 도쿄, 6천 명의 조선인 학살을 은폐하려는 일제에 정면으로 맞선 조선 최고 불량 청년 ‘박열’(이제훈 분)과 그의 동지이자 연인 ‘후미코’(최희서 분)의 믿기 힘든 실화를 그린 작품이다.
이번 작품에서 최희서는 박열의 연인이자 동지, 가네코 후미코 역을 맡았다. 일본인이지만 일본 제국주의와 천황제를 반대하고 항일운동을 하는 여성이다. 조선인 학살 사건의 희생양으로 검거되었지만 도리어 당당하고 확고하게 제국주의를 비판하며 “사형을 쟁취하는” 인물이다.
“가네코 후미코를 만난 건 ‘동주’가 끝날 때 즈음이었어요. 감독님께서 흑백사진을 보여주시면서 ‘가네코 후미코를 알고 있냐’고 물었죠. 자서전도 읽어보라고 하면서요. 이 정도로 깊이 얘기하시니 ‘차기작과 관련이 있나? 뭔가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도 사실이에요. 나중에 ‘박열’이 영화화가 된다고 하고, 시놉시스 회의를 할 건데 여자로서 의견을 내달라고 놀러 오고 싶으면 놀러 오라고 하시더라고요. 어차피 저는 ‘동주’ 끝난 뒤 백수였고. 하하하. 그래서 가벼운 마음으로 놀러 갔죠.”
“마음을 비우고 있었는데 감독님께 전화가 왔어요. 같이 하자고! 하하하. 얼마나 기뻤던지. 사실 회의할 때 ‘박열 역에 이제훈 씨가 어울린다’고 말했었거든요. 카리스마, 패기, 저항 정신을 가진 배우로 딱 이었어요. 제가 ‘파수꾼’ 때부터 팬이었거든요. 박열 역에 이제훈 씨가 캐스팅이 됐는데, 후미코 역에 제가 안 됐으면 슬펐을지도 몰라요.”
누구라도 탐낼 만한 캐릭터였다. 진취적이고 당당한 그녀는 단숨에 최희서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최희서는 이준익 감독과 가네코 후미코에 대한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매력적인 가네코 후미코에 대한 이야기를 나눌수록 더욱 빠져드는 기분이었다.
그렇다면 최희서가 생각하는 가네코 후미코는 어떤 인물로 그리고 싶었을까? 그는 “익살스럽고 어디로 튈지 모르는 순수한 매력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너무도 순수해서 철이 없어 보일 정도”면 더 좋겠다면서.
“영화가 블랙 코미디다 보니 경쾌하면서 가벼운 느낌이 필요했거든요. 시나리오에는 대사만 있어서, 자칫하면 센 느낌만 들 것 같았어요. 물론 그것도 매력적이었지만…. 저는 후미코의 불우한 유년기나 아픔 등 다양한 모습이 녹아있길 바랐어요. 그렇게 캐릭터를 발전시켰고 그것이 작은 디테일로 드러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그의 태도는 자연스레 일본어·한국어 연기에도 영향을 미쳤다. 일본에서 유년시절을 보낸 최희서는 자연스러운 일본어 연기를 펼쳤지만, 반대로 어눌한 한국어 연기가 걱정이었다. 한국어를 못하는 척하는 게 더 힘들었던 것이다. 그는 한국어 대사를 히라가나로 고치고 그것을 발음하는 등 수고로움을 거치기도 했다.
“저는 어눌한 한국어 연기가 너무 오그라들더라고요! 하하하. 주변에 계속 이상하지 않냐고 물어보기도 했어요. 하지만 후미코를 연기하면서 그의 당당한 태도에 매혹됐고, 발음이 이상하더라도 전혀 위축될 여자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면서 ‘더 당당하고 이상하게 발음해야겠다!’는 마음이 들었어요.”
가네코 후미코의 자서전은 최희서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다. 그의 사상을, 세계를 이해할 수 있는 열쇠였고 완벽한 시나리오이자 대본이기도 했다. 완벽한 자료가 있다는 건 배우에게 어떤 의미일까? 문득 ‘완벽한 자료’가 최희서에게 약이었을지, 독이었을지 궁금해졌다.
“저는 좋았어요. 자서전에 너무도 자세히 담겨 있어서 그를 이해하고 다가가는 것이 수월했죠. 활달하고 당당한 성격이었지만 학대를 받아 위축된 모습도 보였어요. 저는 그 모습을 그대로 고증하면 됐었죠. 다만 그와 저의 연결고리가 필요하다는 생각은 들었어요. 자서전을 10번 가까이 읽었고 그녀의 묘지도 찾아갔죠.”
찾아오는 이가 거의 없는 가네코 후미코의 묘소. 최희서는 묘소와 나란히 앉아 그녀가 보고 있는 풍경을 지켜보았다. 활달하고, 사람을 사랑하는 그녀가 있기에는 너무도 외로운 곳이었다. 최희서는 휑뎅그렁한 그곳을 보며 울적한 기분을 느꼈다. “육체가 가까워지니 정신적으로도 닿는 기분”을 느낀 것이다.
신기하게도 이준익 감독의 전작 ‘동주’에서 송몽규 역을 맡았던 배우 박정민 역시 같은 말을 한 적이 있었다. 이를 최희서에게 전달하자, 그는 “안 그래도 박정민과 이에 대한 대화를 나눈 적이 있다”고 한다.
“확실히 묘소에 가는 게 도움이 많이 돼요. 정민 씨가 ‘동주’를 찍으면서 정말 힘들었던 때가 있었는데 번뜩 송몽규 선생님의 묘소가 떠올랐대요. 그런데 저도 마찬가지였거든요. 잘 안 풀리거나 답답하면 후미코의 묘소가 떠올랐어요. 그러면서 ‘진짜 잘하고 싶다’, ‘게으름 피우면 안 되겠다’는 사명감에 불탔죠.”
최희서가 언급한 것처럼 영화 ‘동주’와 ‘박열’은 묘하게 닮아있다. 이를테면 이란성 쌍둥이 같은 존재. “‘동주’가 소년, ‘박열’이 어른 같은 인상을 가지고 있다”며 어른들의 섹시함이 느껴진다고 하니, 그는 “박열이라는 캐릭터 자체가 섹시하긴 하다”고 거든다.
“섹슈얼한 느낌보다는 서슴없는 그들의 행동, 정면 돌파에서 오는 섹시함이 있어요. 그게 어른스럽게 느껴지는 요소일 거예요. 동주와 몽규는 시를 읽고, 학교에서 반항하며 내적인 아픔을 겪지만 이들은 술을 마시고 식칼을 휘두르는 등 거친 행동을 서슴지 않잖아요. 어른스러운 행동은 아니지만…. 하하하. 정신적으로 이어진 후미코와 박열의 관계가 더욱 섹시하게 느껴지는 것 같아요.”
후미코와 박열은 정신적으로 연결된 ‘하나’의 상태다. 관계적으로도 멋지고 아름답지만 연기적으로 풀어내기에는 어려움이 있었을 터였다.
“그래서 우리끼리 사인을 만들기로 했어요. 오래된 연인이 주고받는 듯한 느낌을 내려고 했죠. 제훈 씨랑 의논을 많이 했어요. 익살스러운 걸 주고받는데 대표적인 시그널이 코를 찡긋하는 거죠. 대체로 다른 곳에 있지만 그럼에도 함께 있는 것 같은 인상을 주기 위해 애썼어요. 그래서 다테마스와 심문에서 그를 대하는 태도나 대사 톤을 일정하게 맞추려고 했죠.”
영화 ‘동주’로 강렬한 첫인사를 또한 ‘박열’로 묵직한 후폭풍을 전한 최희서. 인상 깊은 등장을 알렸기에 차기작에 대한 우려 역시 깊을 터였다. “한국어 연기를 하고 싶지 않으냐”고 농담하니, 그는 “다들 한국어를 많이 까먹었겠다며 걱정한다”고 되받아친다.
“앞으로는 한국인 역할도 해보고 싶어요. 하하하. 많은 분이 저의 다음 역할을 궁금해하실 것 같아요. 그래서 신중히 고르려고요. 저 또한 배우로서 중요한 시기라고 생각해요. 후미코 다음 역할로 어떤 인물이 좋을지 찬찬히 살피고 있어요.”
한 시간가량의 인터뷰를 마치며 최희서에게 “다음에 만날 때까지 지킬 수 있는 약속을 한 가지 하자”고 제안했다. 그는 “어렵다”며 웃더니, 곧 씩씩한 얼굴로 말했다.
“또 다른 이미지로 나타날게요. ‘이번엔 완전히 다른 모습이네요?’라고 하실 정도로. 작품에 따라 다른 모습을 보여드릴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