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 칼럼] 수과하욕(受袴下辱)
2017-06-29 08:40
이번 정상회담은 서로에 대한 ‘탐색전’이나 다름없는 셈이다. 벌써부터 언론에서는 트럼프 대통령이 각 정상들에게 써먹은 억센 악수 인사를 들어 팽팽한 기 싸움에서 누가 이길지를 두고 호들갑이다.
성공한 사업가와 원칙주의 인권변호사라는 타이틀이 말해주듯 살아온 궤적과 인품이 다른 두 정상의 첫 만남에 관심이 쏠리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평생 가난한 변호사를 내조하면서도 유쾌한 웃음을 잃지 않았던 한국의 퍼스트레이디와 화려한 모델 출신 미국의 퍼스트레이디의 외교전도 또 다른 관전 포인트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문 대통령이 보여줄 협상의 지헤와 기술이다. 정상회담은 국익을 두고 치열하게 싸우는 총성 없는 전쟁이자, 사람과 사람이 만나 이뤄내는 최고의 종합예술이다. 협상을 이끄는 지도자의 리더십이 성패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협상에서는 상호 신뢰가 중요하다. 그 신뢰는 상대방을 인정하는 데서부터 출발한다.
현재 트럼프 대통령은 정권 출범 초기부터 정치적 위기 상황에 직면해 있다. 국내외적으로는 ‘비호감’ 이미지로 미국 국격까지 떨어뜨리고 있다. 그가 정치적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언제든지 북한에 대한 선제타격설을 흘리며 한반도를 전쟁위기로 몰아갈 수도 있다.
평생 사업가로 잔뼈가 굵은 그는 자신의 저서 ‘거래의 기술’에서도 “난 거래 자체를 위한 거래를 한다”고 썼다. 이익이 없으면 절대 물러나지 않는 게 사업가의 기본 속성이다. 특히 그는 상대가 도저히 받아들이기 어려운 조건이나 허를 찌르는 제안을 내놓고 ‘유리한 운동장’을 만든 뒤 원하는 것을 이루는 식의 협상을 펼치는 것으로 유명하다.
한·미 간 시급한 현안은 북핵과 사드,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주한미군 방위비 분담금 조정, 전작권 환수 문제 등으로 하나같이 고차원방정식으로 풀어내야 할 난제들뿐이다.
전문가들은 각론에서 구체적인 합의를 끌어내려 애쓰지 말고 허심탄회한 논의로 서로간의 신뢰를 확인하고 큰 틀에서 공감대를 형성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위성락 전 주러시아 대사는 “트럼프 대통령이 사드나 한·미 FTA를 거론하면 대화에는 응하되 즉석에서 협상을 해서는 안 된다”며 “‘검토하겠다’는 정도의 원론적 답변을 하고 실무 협의로 넘겨야 한다”고 말했다.
앞서 트럼프 대통령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 간 ‘세기의 담판’을 반면교사 삼을 필요가 있다는 조언도 나온다.
트럼프 대통령은 북핵 문제를 미 행정부의 최고 우선순위로 삼겠다며 중국에 대북 압박론을 펼쳤다. 상대방을 압박하기 위해 지렛대를 활용한 것이다. 환율조작국 지정을 면해주겠다며 당근도 제시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압박과 회유를 병행하며 협상의 주도권을 내내 놓지 않았고, 결국 압승했다. 중국 언론만이 시 주석이 선방했다고 평가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문 대통령에게 공고한 한·미 동맹 유지를 명분으로 사드 비용과 주한미군주둔 비용 증액을 지렛대 삼아 강공을 펼 가능성이 크다. 미국 우선주의를 표방해온 트럼프 대통령이 자국의 자동차산업을 위해 한·미 FTA 재협상 카드를 쥐고 흔들지도 모른다.
문 대통령은 "구체적인 사안에 대한 성과 도출에 연연하지 않겠다"면서 트럼프 대통령과 우의와 신뢰를 쌓는 데 주력하겠다고 밝혔다. 두 정상은 앞으로 적어도 3년 반 동안 임기를 같이하게 된다. ‘첫 술에 배부를 수 없듯’ 천천히 차근차근 단계를 밟는 전략이 중요하다.
한(韓)나라의 명장 한신(韓信)의 일화를 담은 ‘수과하욕(受袴下辱)’이라는 한자성어를 떠올린다. 큰 뜻을 품은 사람은 쓸데없는 일로 승강이하지 않음을 비유하는 말이다.
국익을 따질 때는 당연히 할 말은 해야 한다. 하지만 협상 카드는 철저히 숨겨야 한다. 전략적 모호성을 유지할 때 유리한 고지를 점할 수도 있는 법이다.
부드러움이 강함을 이긴다. 문 대통령이 첫 미국 순방에서 좋은 성과를 안고 돌아오길 응원한다.